<장자>를 통해 인생 성찰하기!

by 방정민


【장자】 장자의 사상을 담아놓은 책입니다. 다른 말로 <남화진경>이라고도 합니다. 장자의 사상을 한 마디로 제물외생(齊物外生)이라 합니다. 나와 너라는 구분 자체를 넘어 아(我)와 물(物), 생(生)과 사(死)의 경계까지 넘어서는 것입니다. 노자의 사상보다 더 광활하고, 그래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놓은 것이 바로 장자의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표현이 엄청 많이 나오는데요, 그 광활하고 무한대의 사고가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저는 이것을 ‘예술적 상상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 경계 허물기의 진수! - 원래 있던 길은 없다

- 제 2편 제물론(齊物論) 중 -

物無非彼, 物無非是. ~ (중략) ~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물무비피, 물무비시. ~ (중략) ~ 시역피야, 피역시야. 피역일시비, 차역일시비.

果且有彼是乎哉, 果且無彼是乎再.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과차유피시호재, 과차무피시호재. 피시막득기우 위지도추.)

사물은 이것 아닌 것이 없고 저것 아닌 것이 없다. ~ (중략) ~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이 또한 이것이다. 저것도 하나의 시비이며 이것도 하나의 시비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저것과 이것이 서로 대립을 없애는 경지를 도의 지도리(중심)라 한다.

道, 行之而成, 物, 謂之而然. 惡乎然, 然於然. 惡乎不然, 不然於不然. 物固有所然,

(도, 행지이성, 물, 위지이연. 오호연, 연어연. 오로불연, 불연어불연. 물고유소연,

物固有所可, 無物不然, 無物不可.

물고유소가, 무물불연, 무물불가.)


길은 사람이 걸어 다녀서 만들어지고 물건은 사람들이 불러서 그렇게 이름 붙여지게 된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다고 하는가. (습관과 편견이) 그렇다고 하는 데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며, 무엇을 근거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습관과 편견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데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물제동의 커다란 긍정의 세계에서는)모든 물은 진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모든 물은 그러한 바가 있으니 어떤 물이든 그렇지 않는 바가 없으며 어떤 물건이든 가하지 않은 바가 없다.



노장사상은 모두 위아(爲我)의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노자는 개인의 자존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약과 겸하의 방법을 발전시켰습니다. 또 그는 개인의 자존에 알맞은 사회 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무위의 이론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장보(오래 삶)와 불태(위태롭지 않은 삶)의 추구라는 노자의 목적은 사실상 성취하기 아주 어려운 것이죠.

인간의 일이란 복잡다단한 것이어서 변화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개인이 처신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타당함을 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삶을 후하게 하고 자신을 귀하게 하는 마음이 절실하면 할수록 안위와 존망에 대한 생각도 더욱 두터워지죠. 어떤 개인이 요행히 오랜 삶을 얻는다 해도, 우환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장자는 노자의 이런 위아(爲我)사상의 결점을 발견하여 깨뜨리고 제물외생(齊物外生)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제(齊)는 ‘하나로 한다’는 뜻으로 ‘하나’는 다양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화와 일치를 의미합니다. 즉 제물외생의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실존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변화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립의 세계에서 대립을 초월한 ‘하나’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행복한 삶을 위해 물(物)과 아(我)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대립되는 경계를 깨뜨렸던 것이죠. 피아. 시비. 귀천. 생사의 구별은 의미가 없으며, “천지가 나와 함께 태어났고 만물과 나는 하나가 된다.”고 장자는 말합니다. 유가에서 물아가 일체를 이룬다는 것은 물아가 공동의 기쁨과 근심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임에 반해, 장자에 있어서의 그것은 물아 사이의 모든 연계를 단절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리하여 사물에 메이지도 말고 간섭받지도 말며 절대 자유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벌써 10년 전인가요, 한 드라마(조선 여형사 다모)에서 유명한 말이 있었죠?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 말 흉내 내는 게 당시는 유행이었는데요, 전 이 말보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과 대립하던 다른 주인공이 한 말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주인공(이서진)이 “길이 아닌 곳을 가지 마라.”고 하자 사회 혁명을 꿈꾸던 혁명가(김민준)가 “처음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다. 한 사람, 두 사람 가다보면 길이 된다.” 고 하였는데요, 작가가 알고 이런 대사를 썼겠죠. 바로 <장자>에서 나온 말입니다.

시위나 데모는 위정자 입장에서 보면 반란일 것이고, 데모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혁명이겠죠. 이렇게 보면 참 장자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요. 태초에 길은 없었겠죠. 한 사람 두 사람 가다가, 필요에 의해서 길을 만든 것일 것이고, 사물의 이름도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이름 붙인 것이죠. 이렇게 나와 너라는 경계를 허물고 완전 자유의 경지에 도달해야 진정 행복해진다고 장자는 말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원래 있던 길은 없다고 했는데요, 잠깐 정치와 관련해 말해보겠습니다. 21세기인 현재 아직도 이념으로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헐뜯는 국가가 있을까요? 통일을 하자면서, 그것도 흡수 통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서로의 체제나 이념을 인정하지 않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통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이렇게 말하면 또 수구세력은 저를 ‘종북’이라고 매도할 것 같은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저는 왕조시대도 아닌데 자식으로 정권을 세습하는 북한 정권은 세계에서 제일 변태독제국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는 ‘종북 빨갱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 나라입니까? 양극화는 심하고 재벌과 정치인들의 특권은 여전하고 그들의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는 나라, 부모의 재력으로 신분이 거의 세습되는 나라가 대한민국 아닙니까? 이런 나라가 정말 자랑스럽습니까?

그와 상관없이 세계 어느 나라도 사회주의나 공산당을 지지한다고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이념이 뭐기에 아직도 한반도는 이러는지…


19세기,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을 때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왕정제도가 진리라며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을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극히 일부의 선각자만 마음속으로 민주주의를 인정하고 있었죠. 그러나 지금 민주주의를 주장하면 역적입니까? 이렇듯 어쩌면 모든 것은 자기가, 우리가 취하고 있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며 우리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합니다. 특히 남쪽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지하면 국가보안법(내란죄)으로 처벌하고 있고, 북은 더 심하겠죠. 장자의 시각으로 보자면 시비가 만들어낸 허구일 뿐입니다. 나의 시각이 옳다고 믿는 편견이고 아집일 뿐입니다. 세상에 절대 진리는 없습니다. 모두 이것과 저것의 대립이 만든 시비일 뿐이죠. 내 것만 옳고 진리라고 생각하는 고집일 뿐입니다. 그런 고집과 편견이 인위적으로 너와 나를 구분하고 배척하게 만드는 겁니다. 공산주의면 어떻고 민주주의면 어떻습니까(저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정말 잘 살 수 있다면 그게 좋은 정치고 이념 아닌가요?

그 어떤 것도 절대 진리는 아닙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 후손들이 본다면 이 민주주의도 낡은 정치시스템이 될 수 있습니다. 제발 내 것만 옳고 진리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사회는 극과 극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제 주위에 기독교인이 많은데,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부처도 스님도 다 사탄이라고 하던데, 여러분도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교회 안에서는 그런 말을 해도 상관없지만 교회를 나오면 그런 말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럼 기독교(하나님)가 절대 진리입니까? 불교가 절대 진리입니까? 누가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런데 왜 시장경제체제와 반공을 위주로 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이 땅에서는 마치 절대 진리처럼 각인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남한의 정치 시스템이 절대 진리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왜 북의 정치 시스템을 악으로 규정하는 겁니까? 그러면서 통일하자고요? 참 어리석습니다. 물론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의 시스템이나 주장도 아집일 뿐이죠.

참으로 안타까운 건 아직도 북은 남을, 남은 북을 적으로 규정하고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같은 민족인데 말입니다. 반공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수구세력도, 이석기 같은 종북세력도 고집불통과 아집에 불과합니다. 반역사적인 작태이죠. 그래서 장자는 제물외생을 주장한 겁니다. 너와 나의 시각을, 그 경계를 없애야 정말 우리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한 겁니다. 장자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의 사고가 굉장히 편협하고 독선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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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지나가는 것들


스쳐지나가는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의미 없는 의미들

이름 없는 꽃은 없다고 했는가

아니다

원래 이름은 없었다

없었던 이름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흘러 지나가버리는 것만이 아니라면

휘어져 돌아오는 것이 시간이라면

나는 어느 지점에서

내가 준 상처를 받고 있을까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두려운 나이

모든 것이 순간이거늘

우리 이쯤에서 헤어지자

그대 없는 세월과도 헤어지자

나는 또 어디에서 누구와

스쳐 만나고 있을까

어떤 의미를 부여해가며


가면 놀이

‘미국발 세계 경제 불황으로 한국 경제도 본격 침체기로 접어든 가운데 실질 가장이…’

세계 경제 위기 전부터 일찌감치 실직한 나는 계속 방콕으로 TV만 보다가 그것도 지겨워 참으로 오랜 만에 아침 일찍 공원으로 운동하러 나갔다. 새벽 공기가 몸에 좋지 않다는 터무니없는 의학지식을 비웃으며 새벽공기를 폐 속 깊이까지 들여 마시고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으악, 저 멀리서 웬 일군의 괴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줌마 괴물들이었다. 큰 선캡을 얼굴 깊숙이 눌러 쓰고 이상한 마스크에 복면까지 착용하며 운동하는 아줌마 괴물들. 어찌 보면 우습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안쓰럽기까지 한 가면놀이.

어릴 적 가면놀이를 한 적이 있다.

가면을 쓰고 남의 집 창문 깨고 도망가기.

가면을 쓰고 남의 집 빨래 더럽히고 도망가기.

가면을 쓰고 여학생 치마 들추고 도망가기.

가면을 쓰고 약한 아이 때리고 도망가기.

가면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 놀래키고 도망가기.

가면놀이가 너무 재밌어 저녁까지 가면을 쓰고 있다가 퇴근하시며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를 놀래키려 하다가 되려 죽도록 맞았다.

그때는 몰랐었다. 아버지가 왜 그토록 나를 때리셨는지. 가면은 쓰기 위해 있기도 하지만 벗기 위해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면은 써야하는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쓰지 말아야 하는, 즉 벗는 타이밍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아줌마들은 어떤 가면놀이를 하고 있는 걸까. 누구를 괴롭히기 위해, 자신을 감추기 위해,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놀이인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가는 가면을 벗어야 하는 놀이이거늘. 언제쯤 이 가면을 벗을 수 있을까. 세상의 빛이 두려워 쓰고 있는 저 아줌마들의 가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고 있는 걸까.

언제쯤 이 가면을 벗을 수 있을지 그 옛날 아버지의 야단과 회초리가 그립다. 날이 완전 밝았는데도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오염된 공기가 이제야 복통으로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훌쩍 커버린 나는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 조삼모사 -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 제 2편 제물론 중 -

勞神明 爲一, 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何謂朝三 曰; 狙公賦芧 曰 朝三而暮四,

(노신명 위일, 이불지기동야, 위지조삼, 하위조삼 왈; 저공부서 왈; 조삼이모사,

衆狙皆怒 曰: (중저개노 왈:)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而, 喜怒爲用, 亦因是也. 是而聖人,

연칙조사이모삼, 중저개열. 명실미휴이, 희노위용, 역인시야. 시이성인,

和之以是非而, 休乎天鈞 是之謂兩行.

화지이시비이, 휴호천균, 시지위양행.)


신명(神明)을 괴롭혀서 억지로 일(一)이 되려고만 하고 그것이 본래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조삼(朝三)이라 한다. 무엇을 조삼이라 하는가. 저공(狙公)이 도토리를 원숭이에게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래서 다시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고 한다. 하루에 일곱 개라는 명(名)과 실(實)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이 작용하였다.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또한 절대의 시(是)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시비를 조화해서 천균(天鈞)에 편안히 쉰다. 이것을 일컬어 양행(兩行)이라 한다.

未知有無之果孰有孰無也. 今我則已有謂矣. 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 其果無謂乎.

(미지유무지과숙유숙무야. 금아즉기유위의. 이미지오소위지기과유위호. 기과무위호.)

유와 무 중에서 어느 것이 유이고 어느 것이 무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내가 한 말이 있는 셈이 되는 것일까, 내가 한 말이 없는 셈이 되는 것일까.

莊周夢爲蝴蝶, 栩栩然蝴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則蘧蘧然周也.

(장주몽위호접, 허허연호접야, 자유적지여, 부지주야. 아연각칙거거연주야.

不知周之夢爲蝴蝶, 與蝴蝶之夢爲周與. 周與蝴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부지주지몽위호접, 여호접지몽위주여. 주여호접, 칙필유분의. 차지위물화.)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문득 깨어나 보니 갑자기 장주가 되어있었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장주와 나비에는 분명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만물의 변화라고 한다.



장자가 물아의 구별을 배제한 것은 두 가지 의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물에 메이지 않는 것이니 나는 다른 사람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마음 내키는 대로 자적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남에게 간섭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서로 간섭하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확대시킨다면 곧 무치(無治)의 이상과 재유(在宥:완전 자유의 경지)의 정치기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물에 메이지도 말고 간섭받지도 말며 절대 자유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 예로 장자의 통치방법은 무정부에 가까웠는데요, 만일 백성을 현재 있는 그대로 너그러이 놓아두지 않고 그 대신 법률이라든가 제도 등으로 백성을 다스리려 한다면 그 과정은 마치 말의 목에 멍에를 씌우고 소의 코에 코뚜레를 꿰는 것과 같고, 또 마치 오리의 다리를 늘리고 학의 다리를 자르는 것과 같은 처사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자연적으로 자발적인 행위를 어떠한 인공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을 장자는 “인위로 자연을 궤멸시키는 일이며 고의로 성명(性命)을 궤멸시키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삼모사’와 ‘장주지몽’은 너무나 유명한 사자 성어라 다들 아실 것이지만 이 말이, 특히 ‘조삼모사’가 <장자>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조삼모사 고사를 통해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비웃지만 그 원숭이는 실은 우리 인간들입니다. 입장을 조금만 바꾸면 다 같은 것입니다. 아무튼 장자의 사상은 실로 무한정으로 뻗어나가고 광대합니다. 현실에서 실현될 가능성은 굉장히 낮지만 그 정신이나 의미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정치시스템이나 문명은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인간의 타고난 자연적인 본성을 해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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