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주의에 대한 철학적 고찰
유미주의에 대한 철학적 고찰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분석-
Ⅰ. 유미주의 연구
1. 미적 가치의 범주
‘美’라는 용어는 그 애매성에 있어 문제가 된다. 종종 ‘미’는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대상 모두를 지시하기 위하여 상식에서나 미학 이론 양쪽 모두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럴 때 그 내포적 의미는 ‘미적 가치’의 그것과 동일하다. 또한 좁은 뜻의 ‘미’란 많은 미적 가치(가령 아름답다, 예쁘다, 매력있다 등)의 종류들 중 오직 하나만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확히 어떤 것이 미적 가치의 많은 종류를 다른 종류와 구별하게 하는가? 라는 모호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좁은 뜻의 ‘미’의 모호성은 쉽사리 극복될 수 없다. 이 용어는 감각적 매력 또는 즐거움, 대상 속에 드러난 상당한 정도의 복합성, 뚜렷한 형식적 가치, 즐겁게 하거나 교훈이 되는 제재, 그리고 주제, 형식 및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의 관습성 중의 몇몇 또는 모두를 내포하는 것 같다. 이것이 옳다면 이 용어는 ‘아름답다’고 불리는 대상에 나타나는 성질 전부가 아닌 많은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즉 ‘미’를 말하고자 할 때는 그 반대되는 개념인 ‘추’를 고찰하면 더 쉽게 그 의미가 다가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추함을 희극에 있어 본질적인 것으로 여겼다. 또한 예술사를 통틀어 강한 흥미를 돋우는 사람의 상을 추적해내어 악마에 흘린 사람과 죽음의 무도를 예술에 구현시킨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1450~1516)와 같은 창조자도 있었다. 추에 대한 통념은 미학자 졸거의 말. “추란 ......확실히 미와 반대되는데 우리는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상호 배타적이라고 여길 수 있을 뿐이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만약 ‘미적 가치’라는 명칭이 추한 예술을 포함한다면 추는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넓은 의미의 ‘미’의 일종이다.
실제로 미는 추함과 비교해볼 때 주요한 유사점을 지니는 또 다른 범주인 숭고에 관한 미학 사상의 발전에 크게 힘입었다. 숭고가 미적 범주로서 맨 처음 중요시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이다. 거기에는 뒤섞이지 않은 단일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거기에는 항상 유쾌하지 못한 정서인 혐오와 공포가 개입되어 있다. 버크는 “공포는 어쨌든 모든 경우에 있어서 ......지배적인 숭고의 원리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위험이나 고통이 너무 가까이 지나갈 때에는 어떤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서울 뿐이다. 그러나 그 위험이 다소 거리를 두고 또 약간 변형되어 지나간다면 마치 일상 경험인 양 즐거울 것이다. 예를 들어 청룡열차를 탈 때 안 떨어진다는 확신을 하기에 타는 것이고 이 때 지르는 비명은 즐거운 비명인 것이다.
숭고는 ‘경외롭다(awful)’와 ‘두렵다(aweful)’ 라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데, 우리의 공포는 종교적 숭배처럼 찬양의 뜻을 동반하고 있다. 숭고의 대상은 ‘살인 미스테리’와는 달리 우리를 압도하는 광대함과 장엄함을 지닌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면서도 고양된다. 이렇듯 아름다움의 대상은 우리의 감동을 얻어내어 기쁨을 주는 대상이며 혐오나 공포를 야기하는 대상은 일상적인 뜻에서 ‘아름답다’라고는 생각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살펴보았듯이 미가 미적 가치의 유일한 범주로 여겨질 수 없는 현실에서 어떤 현대 철학자가 “미학자에게 미는 이미 숭고한 것, 공포를 주는 것, 풍자적인 것, 희극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왜 추한 것은 그렇지 않은가”라고 말하고 있는 의미를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보상케는 그의 『세 강좌』에서 일반적으로 ‘추하다’고 불리는 대부분의 것들이 실상 ‘감상자의 약점’에 기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에게 사물이 추하게 보이는 이유는 오직 그것의 미적 가치를 감상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관점은 미적 경험이 본질상 대상에 의해 표현되는 정서, 즉 감정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보상케는 주정주의자인데 이들은 예술이 표현적인 한 그 어떤 예술 제재나 테크닉도 인정하고 있다. 그로테스크하거나 고통스럽거나 또는 비통한 것 또한 극히 신랄하게 표현적일 수 있다. 보상케는 미를 표현성이라는 관점에서 광의로 ‘미적 우수함’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기에 추가 표현적인 한 그것은 미적 가치의 일종이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 추한 것도 미적으로 잘 표현하면 미가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표현하는데 잘못 전달하는 경우 보상케에게는 추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상케가 결코 전통적인 용법과 신념을 거부한 현대 미학자는 아니다. “추라는 것은 한 상황에서 미적 가치가 없다는 도덕적 부인이다. 그것은 미적인 평가라기보다 윤리적인 평가인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미적인 것에 관한 또 하나의 다른 개념을 낳게 하는데, 그 어떤 태도에도 대상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정향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적 태도는 항상 긍정적인 정향을 취하는데, 그것이 대상을 주목하게끔 하고 또 그것을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즉 미적 태도는 항상 긍정적인 태도만 낳는다. 우리가 그 태도에서 부정적 결과를 낳을 때 그것은 도덕적. 윤리적 태도를 취할 때라고 보상케는 말하고 있다. 이는 미적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2. 예술과 도덕
미적 태도라는 것은 ‘작품 그 자체를 위해서만’ 작품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윤리학은 예술의 결과 즉 행위, 사회의 다른 제도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 현존의 조건에 예술이 끼친 영향을 강조한다. 또 윤리학은 미적 관심에서는 배제되었던 상호관계 속으로 작품을 되돌려놓는다. 그러므로 미학과 윤리학은 각각 예술대상의 서로 다른 성질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공화국』에서 플라톤은 “예술의 상스러움이 영혼을 타락시키는 반면 예술의 질서와 매력은 영혼을 순화시킨다. 그렇게 되면 젊은이는 어느 곳-고상한 작품이 눈과 귀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나 선을 들여 마실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활동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플라톤이 여기서 ‘선’에 대해 말할 때 미적 가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도덕적 가치와 미적 가치를 동일시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질서와 조화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접촉하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선을 들여 마실 때에 젊은이의 도덕적 성격이 개선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 안에 덕스럽고 행복한 삶에 필수적인 심리적 균형을 발전시킨다. “리듬과 조화는 영혼의 안식처에 깊숙이 잠겨 있어 거기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력을 갖고 ...... 육체와 정신의 우아함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톨스토이는 주제가 가치없거나 천해서-억압되어야 하는-정서를 유발시키는 예술을 비난한다. 그는 상당히 많은 근대예술이 ‘자존심과 성적 욕망 그리고 삶의 권태’에 대한 감정을 먹고 산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예술이 쾌에만 전념하는 것을 르네상스 이래 모든 예술의 기본적인 잘못으로 생각한다. 근대 세계는 무관심적인 쾌를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아름답다’고 부르지만, 미는 그를 통해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이 요구되는 바에 견주어서 가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우리는 도덕적 근거에서 예술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술은 다른 근거에서 평가될 수도 있으며 그 근거들 중의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미적 가치이다.
그 미적 가치인 ‘예술을 위한 예술’은 플라톤과 톨스토이가 깨뜨려놓았던 균형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준다. 형식주의자 클라이브 벨은 ‘예술과 도덕’의 문제에 대한 확고한 답변을 제시한다. “예술은 도덕을 넘어서 있다. 아니면 오히려 예술 전체가 도덕적이다. 왜냐하면 ...... 예술작품은 선의 직접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것을 예술작품이라고 판단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윤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판단할 것이며 도덕주의자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둔 것이다. 예술은 무감각한 도덕주의자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나은 황홀경의 상태로 고양시키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험은 미적으로 접근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견해는 ‘유미주의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인간의 가치가 불확실한 세상에는 미적 특성과는 다르고 더 중요한 문제가 보다 급박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 다른 어떤 것보다 미적인 것만을 찬양하는 것은 돈벌이나, 계승된 전통만을 찬양하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다. ‘예술을 위한 삶’은 만일 삶이 결국 내재적인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인데 이 주장은 우리 경험의 결과에 전혀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을 때에 자기파괴적이 된다.
유미주의자는 다시 문제를 제기한다. “도덕주의자는 예술의 사고방식으로 예술의 기능을 이해하지 않는다. 판단을 하는 것이 예술가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판사와 성직자에게 맡겨라. 예술가는 경험을 파악하고 그것을 생기있고, 감동적이고, 믿을만하게 만들려 하고 있다. 타락과 악덕은 세계의 일부이다. 그것은 원래부터 흥미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불한당의 성격, 그의 어두운 동기, 어쩌면 그의 악의의 숭고한 거대함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악행을 자신과 동일시하려 하며 그것이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표현하려 한다.” 유미주의자는 ‘선과 악을 넘어서’ 있다. 그는 모든 경험이 지닌 상상적이고 정서적인 ‘기쁨’을 즐긴다. 경험을 도덕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부적절할 뿐이다.
랄프 바톤 페리는 예술에 대한 도덕적 규정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페리는 자신의 견해가 『공화국』에서 나타난 플라톤의 견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주목한다. 우선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 대해 ‘관심’이 취해질 수 있다면 즉 그것이 갈구와 욕망의 대상이라면 페리에게는 ‘좋은’ 것이다. 고립적으로 취해진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애의 호기심이나 배고픔만큼이나 도덕적으로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상호작용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욕망들은 종종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욕망을 지닌다는 것은 또 다른 욕망의 좌절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적으로 취해진 선한 것은 그것의 상관관계 속에서 나쁠 수도 있다. 행위의 선함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영향을 받은 모든 관심에 대한 언급 없이는 판단되어질 수 없다. 만약 우리의 관심이 통제나 절제없이 스스로 성취되도록 남겨진다면 그 결과는 파멸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가장 강렬한 욕망은 종종 가장 파괴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덕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도덕은 자멸과 풍요한 삶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강요된 선택이다. 관심사가 서로 대립한다면 그것은 인생의 계획을 무익하게 하거나 실패작으로 만들거나 아니며, 잘해 보아야 어려운 모험으로 만들 뿐이다. 이러한 관심사의 ‘상호 대립’을 최소화하는 것이-전부 제거하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도덕의 기능이다. 도덕은 관심을 서로 밀착하고 통일되도록 조직한다. 도덕은 또한 욕망을 위협하고 그러한 욕망을 억제한다. 더 나아가 도덕은 관심사의 공동체를 만들며 그 속에서 관심사간의 상호 보안과 제어가 생겨난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의 욕망에 대한 충족을 방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심의 대상은 그 관심이 다른 관심에 의해 보증될 때에만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다. 페리의 이론을 정리하면 이렇다. “예술은 도덕적 비판하에 있다. 왜냐하면 도덕은 다름아닌 모든 관심의 질서를 규정하는 법칙이며, 그 속에서 예술과 모든 선한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리는 예술에 대해서 허용될 수 있는 주제를 상정하지 않았고, 예술에 있어서의 새로움을 금지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를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것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페리의 접근은 그의 도덕이론이 상대론적이기 때문에 유동적인 것이다. 그 포괄적인 기준은 관심의 조화로운 통합이다. 그러나 이 통합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어떤 결정이 이루어지는 특수한 상황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만약 상황이 다르다면 다른 행위의 과정이 요구될 것이다.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절대적인 행위는 주장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과 페리의 주장 그리고 ‘예술을 위한 삶’의 부적절성은 예술이 혼자 힘으로 특권적인 지위를 주장할 수 없음을 결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자아와 인격적 동일성
자아 혹은 영혼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비물질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비록 어떤 의미에서는 신체 속에 깃들어 있다고 할지라도 본성상 신체적이거나 물질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되는 바로는 신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즉 신체로부터 이탈된 상태에서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이 이질적인 두 개의 요소, 즉 비물질적 영혼 혹은 정신과 물질적인 신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견해는 철학적으로 이원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이원론의 전통은 고대 플라톤에서 근대 데카르트, 로크, 칸트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서양의 중심사상인데, 이것의 관점은 누군가의 정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신체로부터 분리되고 있다는 것이고, 수많은 환타지 영화의 전제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신이 신체로부터 분리됨으로써 나타나는 자아의 정체성 문제를 야기하는 영혼을 다루는 영화에까지 이 모두가 유미주의적 요소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나는 나의 신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나의 정신, 영적인 혹은 정신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일정 기간 동안 본질적으로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내가 일정기간 동안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원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인격적 동일성을 판단함에 있어서, 즉 어떤 사람이 동일한 인격체라고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동일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단서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그가 동일한 정신 내지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동일한 인격체이다. 결국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앞으로 살펴볼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는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의 인격체라 할 수 있는데 그럼 그의 살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즉 내가 실제로 나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은 존중을 받을 인격체라는 말이고 이는 곧 나의 모든 행위에 대해 책임이 뒤따른다는 말과 같다.
인격만이 생명권을 갖는다는 것은 인격이 된다는 것인데, 이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되는 것과 구별되기 때문에 이것이 뜻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 즉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구성원이라는 것이 인격에게 응당 귀속되는 특별한 종류의 도덕적 존중을 자동적으로 부여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격이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특별한 종류의 존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관념의 정식화는 18세기 철학자 칸트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칸트의 경우, 인격은 본질적으로 합리적 행위자로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의 모습과 목표를 결정할 수 있다. 이러한 합리적 자기 결정 능력 때문에 인격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존재일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인격을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해야 하며, 결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인격을 ‘그저 단순한 사물’로서 대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사물은 그것이 인간 목적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갖지만 인격은 칸트가 주장하듯이 ‘본래적 가치’, 즉 ‘존엄’을 가지며, 이 존엄으로 인해 인격은 ‘최상의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그루누이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미소녀들을 살인하는 것은 존엄을 가진 인격체의 행위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격에 대한 도덕적 주장은 인간에 대한 도덕적 주장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인간은 인격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필요한 존엄에 따른 합리성이나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인데, 바로 그루누이는 존중받을 인격체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요약하면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있으나 그렇다고 모두 인격체가 아니고, 존중받을 인격체가 되려면 결국 도덕적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4. 유미주의의 개념과 본질
1) 유미주의의 역사적 발전
유미주의는 18세기 독일 낭만주의 사상에 굳건한 뿌리를 두고 있다. 칸트를 비롯하여 쇼펜하우어. 쉘링. 쉴러. 괴테 등은 프랑스와 영국 문학에 유미주의의 씨앗을 뿌린 대표적인 철학가들이나 문학가들이다. 특히 칸트는 유미주의가 성립하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판단력 비판』(1790)에서 그는 순수한 미적 경험이란 실재나 공익성이나 도덕성과 같은 외적 목적에 관계없이 오직 대상에 대한 사심 없는 관조에서만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목적론적 판단과 심미적 판단을 서로 구별하는 그는 후자에서 얻는 지식은 논리적 추리에 기초를 두고 있는 전자의 지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한다. 목적론적 판단은 대상과 그 대상의 목적성을 고려하기 때문에 개념이나 범주와 어떤 식으로든지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심미적 판단은 외부의 목적과 대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술에서 얻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예술 외의 다른 영역에서 얻게 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것이라고 칸트는 주장한다. 다른 쾌락과는 달리 미적 쾌락은 어느 한 대상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 장식적인 것으로, 그리고 도구가 아니라 성취로 인식하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목적이 없는 목적성’ 또는 ‘내적 목적성’의 개념이다. 문학의 심미적 기능은 대부분의 낭만주의자들에게 핵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상상력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낭만주의자 대표격인 미국 시인 포우는 인간 정신을 순수지성, 취향, 도덕의식으로 나눈다. 순수지성은 진리와 연관되어 있고 취향은 아름다움과 연관되어 있으며, 도덕의식은 선이나 의무와 관련되어 있다.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는 이 가운데에서 바로 취향을 취급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시란 한 마디로 관념이 아니라 영혼을 고양시키는 심미적 흥분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라파엘전파주의’로 잘 알려진 예술 운동 또한 유미주의가 성립하는 데에 산파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1848년 런던의 젊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이 운동은 19세기 중엽에 풍미하던 예술 인습에 대항하여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산치오 라파엘 이전의 예술 형식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이런 배경을 토대로 유미주의는 1890년에 문예사조 전통으로서 독자적인 주의나 이즘을 형성하였다. 즉 19세기 말엽은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사고와 함께 유물론의 물결이 풍미하였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문』(1848)을 발표하였고,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출간하였다. 이 무렵 산업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국가의 부를 곧 문명이나 문화의 척도로 삼았다. 이렇게 모든 현상을 인과 법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파악하거나 유물론적 입장에서 파악하려는 상황에서 인간의 정신적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는 중산층들의 속물주의가 극한점에 달한 시기이기도 하다. 갑자기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부상한 중산층들은 무엇보다도 상업적인 가치만을 중시한 채 부 그 자체를 축적하는 데에만 관심을 보였다. 이러자 문학의 교육적 기능을 중시하는 매슈 아놀드는 문화를 기초로 속물주의자들을 계도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유미주의는 영국에서는 1860년대 이후에, 프랑스는 이보다 앞서 시작되었다. 그러다 1880년대와 1890년대는 유미주의가 가장 극한점에 도달하였고 20세기 들어오면서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하였다.
2) 예술을 위한 예술
‘유미주의’라는 용어는 ‘아스테시스’라는 희랍어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 희랍어는 본래 ‘감성’이나 ‘감각’ 또는 ‘감각인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실체적인 것, 곧 감각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희랍사람들은 실체가 없는 것이나 단지 생각해진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 말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유미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였다. 그들에게는 예술을 창작하는 행위보다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인간 행동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세운 이들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란 바로 짧은 삶을 ‘정열적인 감정’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공리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는 태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조금이라도 공리적이고 실용적인 것에 그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유미주의자들이 예술은 무용한 것이라고 하면서 문학의 가치가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좀처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삶과 아무런 관련을 맺고 있지 않는 이상 예술은 정치적이건 사회적이건 도덕적이건 윤리적이건 어떠한 문학외적 기능도 담당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19세기 지식인들이 절대적으로 믿었던 인도주의적 이상과 사회개혁, 역사적 발전을 그들은 믿지 않았다. 이 점에서 낭만주의자들과 구별된다. 유미주의자들이 예술을 어떤 공리적.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 데에는 예술이 다른 어떤 가치에 종속될 수 없는 그 특유의 자기목적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예술은 다른 가치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홀로 설 수 있는 그 나름대로의 존재이유를 지니고 있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유미주의자들은 주관적 경험을 중시하면서도 예술을 자아 표현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가 자신의 자아를 표현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공리적이고 실용적인 기능에 해당한다. 이 점에서도 전통적 낭만주의자들과 엄격히 구분된다.
유미주의자들의 이런 몰개성적 태도는 프랑스에서 시작된 파르나시아니즘에 이르러 극한점에 달한다. 이는 초기 낭만주의를 극복하여 새로운 문학과 예술을 창조하기 위하여 프랑스에서 처음 창안한 예술 운동을 말한다. ‘파르나스’란 본디 아폴로신과 뮤즈신들이 살던 희랍 산의 이름으로 이 운동에 가담한 예술가들이 <<현대의 파르나스>>란 잡지를 출간하면서 별명이 붙게 되었는데, 될 수 있는 대로 시인의 개성을 제외시킨 채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 고티에한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견고성이나 윤곽의 선명성을 추구할 뿐 아니라 형식에 깊은 관심을 갖는 다는 점에서 시인들은 조각가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미주의에는 늘 ‘형식주의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이런 유미주의자의 태도는 18세기의 문학 이론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18세기 이론가들은 문학의 주제나 내용을 중시하였고 유미주의자들은 형식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미주의자 중 페이터는 ‘훌륭한 예술’은 단순히 형식만을 중시하는 예술을 말하고, ‘위대한 예술’은 형식에 못지않게 내용이나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예술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역사적 시간과 사회적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인간의 문제를 다룰 때에 모든 예술 작품은 비로소 위대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명시적으로 교훈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도덕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페이터는 생각한 듯 하다.
3) 예술로서의 삶, 삶으로서의 예술
유미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예술정신에 입각하여’ 삶을 영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말은 삶 자체를 일종의 예술로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삶은 예술처럼 일종의 감상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관념을 통한 추상적 삶보다는 오히려 감각을 통한 구체적 삶을 중시하였다. 유미주의자들에 따르면 만약 삶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염세주의적 세계관과 관련이 깊다. 페이터의 말대로 “인간은 누구나 다 사형 선고를 받는다. 단지 무기한으로 그 선고가 유예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현세의 삶을 최대한으로 만끽하자는 쾌락주의적 태도가 유미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다.
유미주의자들은 거의 비타협주의자들이었다. 사회의 인습이나 가치관에 맞서 그들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더욱 이들은 보헤미안적인 삶의 태도를 취하였는데, 보헤미아 지방에서 떠돌아온 집시처럼 그들은 방탕한 삶을 일삼기 일쑤이었다. 또한 유미주의자들은 사회적 인습의 관점에서 보면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삶을 영위하였다. 화폐를 위조하고 사람을 죽인 영국 작가 웨인라이트를 와일드는 옹호하였다. 와일드에 따르면 일상인으로서의 인간과 예술가로서의 인간은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4) 세기말과 퇴폐주의
유미주의와 퇴폐주의는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유미주의는 19세기 후반에 풍미하였지만 퇴폐주의는 19세기 마지막 이십년, 그러니까 1880년대와 1890년대에 걸쳐 주로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한 문예 사조나 운동이다.
퇴폐주의의 어원 ‘데카당’이나 ‘데카당스’는 중세 라틴어 ‘쇠퇴’나 ‘타락’이라는 말인데 어떤 상태나 조건이 그 이전보다 다 나쁜 상태로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 ‘퇴폐’라는 용어는 인류의 역사와 같이 사용되어 온 측면이 크다. 모든 신화나 종교가 영고성쇠를 다루고 있고, 캘리네스큐는 퇴폐의 개념이 모더니티와 진보의 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진보는 곧 퇴폐이고 퇴폐는 곧 진보라는 역설적 결론을 도출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특정한 시대와 관계없는 상대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퇴폐나 퇴폐주의도 그 이전의 작품이나 작가 또는 시대와 비교하여 그보다 열등한 상태로 전락한 작품이나 작가 또는 그 시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유미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 문예적 개념으로서의 퇴폐주의는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 개념이다. 문예사조나 전통으로서의 퇴폐주의는 19세기의 세기말에 일어난 운동이다. 흔히 ‘세기말 병’이라고 부르는 질병에 감염된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의 작품 경향을 기술하는 용어이다. 유미주의는 1870~90년대에 이르러 한결 더 극단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렇게 극단적으로 발전한 형태가 바로 퇴폐주의이다. 프랑스의 보들레르, 위스망, 랭보, 베를렌, 라포르그, 빌리에르와 영국의 조지 무어, 시몬스, 오스카 와일드 같은 작가들이 있다.
퇴폐주의는 부르주아 사회에 적대감을 한층 더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미주의와 다르다. 퇴폐주의자들은 자신의 삶마저도 하인들에게 맡겨 버린 채 오직 심미적인 것에만 탐닉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은 살아 숨쉬는 것보다 쇠락하고 부패하는 것을 한결 더 중시한다. 또한 자연적인 것을 완전히 거부한 채 오직 인위적인 것만을 강조하였다. 이들이 추구하는 인위성은 작품의 주제나 내용뿐 아니라 형식이나 스타일에서도 잘 나타난다. 병적이고 기벽스러운 주제나 내용을 다루고 형식이나 스타일에 있어서도 당대의 예술 전통이나 인습에 크게 어긋났다.
그러면 퇴폐주의와 상징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자. 상징주의는 19세기 말엽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되어 자연주의와 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에서 시작되었다. 상징주의는 퇴폐주의를 비롯하여 이미즘이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준 예술 운동이다. 시기적으로 퇴폐주의보다 먼저 일어난 운동이고 주로 시에 국한된 운동이었다. 상징주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기치로 내세운 채 예술의 자기목적성을 강조하고 감각주의와 기벽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퇴폐주의와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자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인위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에 대항하는 예술가의 국외자적 위치를 중시하는 데에서도 발견된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퇴폐주의를 뜻하는 ‘데카디즘’이라는 용어 대신 상징주의를 널리 사용하게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상징주의’라는 용어를 영미문화권의 ‘모더니즘’이라는 용어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미주의는 문학 비평에서도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 실용적 기능을 담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 ‘인상주의 비평’ 또는 ‘감상주의 비평’을 탄생시켰다. 문학 비평에서도 무엇보다도 비평가가 작품을 읽고 느끼는 인상을 중시하였다. 비평가는 전통에 구애받지 말고 타고난 기질과 상상력에 따라 비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와일드는 비평을 창조적 행위로, 비평가를 예술가로 간주하였다.
5) 유미주의의 문화적 유산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퇴폐주의를 포함한 유미주의는 공격을 받는다. 윌리엄 모리스나 톨스토이 같은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하는 문학가들이 삶과 유리된 문학과 예술의 가치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였다. 감각적 경험에만 탐닉한 나머지 엘리트주의적 쾌락주의에 탐닉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비사회적, 비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사회지향적 비평가들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유미주의는 겉과는 달리 실제로는 삶과 그렇게 동떨어지지 않았고 나름대로 비판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유미주의자들이 심미적인 것에 탐닉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때로는 폭력을 통한 혁명의 가능성에도 관심을 보였다. 말라르메는 무정부주의에 심취하였고 대부분의 유미주의자들과 퇴폐주의자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미주의는 당대 사회의 모순과 기치관의 허위를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산업사회의 누추함, 야만성, 억압, 위선과 허위의식, 그리고 중산층의 자기만족감과 속물주의를 비판하였고 빅토리아 시대의 엄숙주의의 사원을 무너뜨리는데 이바지하였다. 더군다나 현대 문예사조나 이론이 발전하는 데에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이미즘 운동, 형식주의와 신비평은 유미주의의 비옥한 토양에서 자양분을 얻고 발전하였다. 또한 1960년대 미국의 수전 손탁의 ‘예술의 에로틱학’,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환희’이론,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그리고 신역사주의와 해체주의에 회의를 보이는 ‘생태비평’이론도 적어도 그 심미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점에서 유미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한 마디로 유미주의는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적 유행에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삶에 대한 태도요 세계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영화에서 영상화되는 유미주의의 의미
유미주의를 표방하는 영화는 대개 생에 대한 수동적. 체념적. 관조적 태도라든가 쾌락적 감각주의나 또는 모순적이고 적대적인 현실로부터 상상세계로 도피하려는 생각에서 연유한 까닭에, 종종 반사회적. 비정치적 허무주의로 귀착하기도 한다. 도덕성을 철저히 배제한 채 영상화하는 유미주의 영화는 역설적으로 인간 정신의 황폐화를 보여준다. 자기 의지를 상실한 채 행동하고 후회하는 영화 속 인간의 묘사에서 허무주의적 분위기가 풍기기도 하는 유미주의 전통의 영화는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사랑이 인간 존재의 근원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향수>는 그런 묘사에도 불구하고 염세적일 수 없다. 지상최고의 향기가 여자. 인간의 냄새라고 주장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듯하다. <고하토>는 엄격한 집단의 논리가 폭력과 광기와 죽음과 성욕이 뒤엉킨 악에 의해 어떻게 궤멸되는지를 품위 있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봉건제의 잔재를 끌어안고 있던 신센구미가 붕괴하게 된 특별한 계기를 탐색한다. 집단의 존속을 위해 마련한 계율과 터부가 인간적인 욕망에 의해 압도당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감독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특유의 유미주의적 스타일을 지뢰처럼 매복해 놓은 유머 감각과 조화시키고 있다. 결국 영화는 막부시대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감독의 은유이기도 하고 집단 속의 개인의 존재에 대해 묻고 있기도 하다. 오시마 감독의 작품 <감각의 제국>은 탐미적이고 자학적인 에로티시즘의 동굴로 침잠해 들어간 작품으로 영화는 내용과 형식을 완벽한 포르노 문법으로 끌어가지만 거기에 절묘하게 일본의 유미주의를 결합했다. 두 주인공이 극단적인 성교에 열중할 때 전통적인 일본 가옥의 정중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실내에서 붉은 옷과 선혈이 서로 어우러지며 시신경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비애가 은근히 느껴지는 것은 세상에 안착할 자리가 없는 인간들이 에로티시즘을 통해 파국을 향해 가는 바로 그 몸부림 때문이다. <감각의 제국>은 도착적인 에로티시즘과 죽음을 향한 탐미주의를 결합해 시대를 바꿀 수 없는 정치를 외면하며 자기 파괴적인 충동에 깊이 빠져 들어간, 오시마 세대의 레퀴엠이었다. <열정의 제국> 더 이상 갈 곳 없는 연인들의 허무적인 공간이, 정신착란적 죄의식이 극에 이른 절망적 세계를 보여주며 여전히 세계는 개인들에게 적응할 수 없는 압력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또한 <올빼미의 성>은 천하를 호령하는 히데요시도 자신이 그저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세상의 부속품일 뿐이라고 자조한다. 히데요시의 모습과 닌자의 정체성을 똑같은 것으로 놓고 혹시 일본적인 정체성이란 것이 파내려 가봤자 심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거대한 빈 구멍은 아닐까 암시하고 있다. <돌스>에서 보여주는 로맨스는 극단의 미를 보여주기 위해 동원된 수단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죽음이 있다. 옛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스침 속에서 이 영화의 인물들은 예정된 운명을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 무표정한 인형들의 연극이 보여주듯 그것은 죽음으로 끝맺는 지극한 미의식의 한 자락에 와 닿는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 <비터문>, <에로스> 등 많은 유미주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결말은 허무 아니면 죽음이다. 인간을 둘러싼 이 세계가 거대한 암흑이며 그 속에서 인간은 혼자 외롭게 그리고 공포스럽게 살아가야함을 성적 호기심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성적인 농담과 그 수위, 그리고 작품성과 완성도는 차치하고서 유미주의 영화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건드리면서 한편으로는 영원히 소통할 수 없는 인간사, 권태롭고 허울뿐인 그 관계를 꿰뚫는 관심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Ⅱ.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연구-소설을 기본 텍스트로 영화와 비교
1. 작품개괄
『향수』는 주인공 그루누이가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발전소설 혹은 교양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재 및 내용상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일련의 살인사건들은 범죄소설로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한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어느 천재가 향수로 대표되는 예술에 집착하고 추구하는 과정에 대한 뛰어난 묘사는 예술가 소설로 보기에 충분하다.
이 작품은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51장의 단편적인 흐름을 통해서 전개되는 장편소설이다. 이러한 4부 51장의 구분되어진 소설의 짜임새는 독자로 하여금 장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개를 확실하게 전달받게 해준다. 1부는 1장에서 22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르누이의 상상하기 힘든 비정상적이고 비천한 출생과 생모의 이야기(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어야 할 냄새가 없다는 매우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반해 세상의 모든 냄새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잔느 뷔시, 테리에 신부, 가이아르 부인을 거쳐 삶을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 결국 그는 무두장이인 그리말에게 맡겨지게 되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냄새에 대한 호기심은 점점 커져가고 냄새에 대한 탐색을 하면서 첫 번째 살인을 하게 된다. 결국 그루누이는 향수 장인인 지세프 발디니를 만나 자신의 천재적인 후각을 통한 향수 제조를 하게 된다. 2부는 23장에서 34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그루누이는 사람들을 회피하게 되며, 인간들을 피해 동굴 속에서 보내게 되는 7년과 그 후 세상으로 돌아와서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루누이 자신이 냄새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루누이가 모든 사람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진 전지전능한 향수를 창조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설정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2부 뒷부분에서는 라 타이아드 에스피냐스 후작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3부는 35장에서 50장까지 연결된다. 이 부분은 그루누이에게 있어 생의 절정을 안겨주고 있다. 향기를 얻는 기술을 그 어디보다 잘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전해 들은 그라스에 도착해서 그는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을 조절해 나간다. 또한 그루누이는 본격적으로 향수를 얻기 위한 살인을 하게 되고, 결국 부집정관의 딸 로르 리쉬의 향기를 얻어냄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게 된다. 이 과정에서 25명의 소녀를 살해(영화에서는 13명의 여인을 죽임)한 죄목으로 사형대에 오르나 그루누이가 뿌린 향수는 사람들의 증오를 즉시 사랑으로 바뀌게 하여 도시 전체가 디오니소스 축제적인 집단 최면의 도취상태에 빠진다. 이 사건은 그루누이에게 가장 위대한 승리로 경험된다. 그러나 그 순간 그루누이는 한 평생 소유하기를 갈망해왔던 향수의 승리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4부 51장에서는 세상에 환멸을 느낀 그루누이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그가 만든 향수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뜯어 먹혀 죽는 끔찍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다. 사람들은 천사를 먹기 시작했고 반시간 쯤 지나자 그루누이는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다시 모여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당혹스런 행동에 죄책감도 없이 오히려 ‘처음으로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을 했다는 것에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2. 유미주의적 요소
1) 예술가의 정체성으로서의 향수
쥐스킨트는 18, 19세기 예술가들이 지녔던 대부분의 속성들을 그대로 그루누이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루누이는 음악가의 재능에 비견되는 소양을 가지고 태어났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루누이도 예술을 꿈꾸며 높고 높은 산으로 순례를 떠난다. 그는 병든 천재이며 가상의 세계를 꿈꾸는 분열된 존재인 동시에 이중 자아의 존재이다. 그리고 그는 후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에 구현된 것처럼 허상적 자기이해에 빠져서 충실한 시민의 외형 뒤에 무절제한 예술가로서의 이중생활을 영위한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그루누이 역시 최상의 것을 추구하며 예술과 죽음을 맞바꾼 행위도 그의 예술가적 기질을 보여준다. 그가 마지막에 로르를 살인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뛰어난 장인이 자신의 예술품을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내는 장면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듯 예술가의 기질을 지닌 그루누이에게 향수 제조는 냉정한 이성의 판단에 의한 예술을 추구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루누이가 창조한 향수가 그의 사형 집행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발휘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사실도 예술과 향수의 관계를 유추하게 한다.
그루누이가 창조한 향수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역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예술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술이 환상이라는 사실은 이 작품에서 예술 자체로 상정된 향수의 성격에 상응한다. 향수라는 그의 예술의 성격은 그 향기가 날아가 버리면 그만인 無인 것이다. 그의 향수는 맡는 사람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도취와 최면에 걸려들게 하며 사랑과 에로티시즘, 미와 연결되지만, 그 향기가 휘발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결국 예술가 자신이 잡아먹혀 버림으로서 문자 그대로 이 지상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이처럼 쥐스킨트가 향수를 통해서 예술의 문제를 피력하기를 시도하였다는 전제 하에, 향수의 제조는 그루누이에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수단이 된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는 그루누이에게 인간 사회에서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인위적인 인간의 냄새를 부여하였다면 그루누이의 유일한 삶의 목적인 향수의 재조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풀이할 수 있다.
2) 예술과 죽음의 문제
그루누이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거치면서까지 예술을 추구해야만 했는지 의문이 든다.『향수』안에는 죽음의 모티브가 여러 번 등장한다. 우선 무두장이 그리말의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소년 그루누이는 어느 소녀의 매혹적인 향기에 이끌려 처음으로 소녀를 살해한다. 이후 그라스에서 최고의 향수를 창조하기 위해 철저한 계획에 의한 25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소설의 마지막에 그루누이는 파리로 되돌아가 온갖 천민들에게 뜯어 먹혀 죽는다. 이러한 사실들을 관찰해 볼 때, 그루누이에 의한 그리고 그루누이 스스로가 선택한 죽음들은 모두 그가 추구하는 예술과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의 예술 작품을 완성하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루누이가 선택한 최후는 자신이 창조한 예술과 세상에 환멸을 느껴 자초하는 죽음이다.
그루누이의 인생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예술과 연결된 죽음의 모티브는 낭만주의 시대의 유산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낭만주의자(또는 유미주의자)들은 진정한 예술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들의 동경과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에 불만을 품고 자기가 만들어 낸 환상을 스스로 파괴하였다.
일반적으로 예술에서 또는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죽음(살인)은 예술의 완성을 뜻하기도 한다. 갖은 고초와 노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예술적 성취를 위해 결국 택하는 방법이 바로 죽음이다. 따라서 예술에서의 죽음은 슬픔의 대상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적 성취를 뜻하거나 그것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오히려 기뻐하거나 경건함인 것이다. 이런 상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전설이 되어버린 에밀레종의 경우도 뭇 중생을 구제하고 부처의 자비를 구하는 최대의 길로, 그리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지상최대의 종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몇 해 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에서도 천재적 화가인 장승업이 예술적 혼을 담는 최고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마지막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장승업의 천재적인 예술적 혼은 결국 그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향수』에는 총 26번의 살인이 등장한다(영화에서는 13번 살인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범죄 소설에 등장하는 살인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원한이나 치정 관계에 의한 살인이 아닌 지상 최고의 향수제조를 추구하는 그루누이가 아름다운 소녀들의 매혹적인 향기를 빼앗아 소유하려는 동기로부터 행한 살인이다. 이 26건의 살인 중에서 첫 번째 살인과 그 이후 25번의 살인 간에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한다. 최초의 살인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저지른 우발적 행동이었다면 나머지 25건의 살인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계획된 의도적인 범죄이다.
그루누이에게 살인이란 그의 일생의 목표인 지상 최고의 향수를 만드는데 필요한 구성 성분을 획득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죄의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살인행위를 ‘(몽둥이로) 내리칠 때의 소음’ 정도의 통상적인 일과처럼 작가는 표현한다. 이런 점이 단순한 범죄소설의 살인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바로 죽음을 예술적 성취로 보는 유미주의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술자는 그루누이가 단 한번도 그의 희생자들에게 성적인 호기심을 갖거나 그녀들의 육체를 바라보지도 않음을 명시한다. 유일한 살인의 동기는 살해 대상이 가진 향기일 뿐이다. 소녀들의 죽음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예술화시키는데 꼭 필요한 하나의 단계라는 것 이외에 그루누이는 다른 의미를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루누이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을 위한 욕망의 극단적인 표출 ‘예술적 광신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는 유미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루누이에게 살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거쳐야하는 당연한 과정으로만 의미가 있으며, 이는 곧 창작의 과정이자 생산의 과정인 것이다. 그루누이의 범죄를 묘사하는 문체를 관찰하면 이러한 사실이 보다 확실히 나타난다. 26번의 살인 중 첫 번째와 마지막을 제외하고는, 발견된 시체에 관한 서술자의 간결한 보고만이 있을 뿐이다. 간결하고 요약되어 반복되는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살인의 과정에 구체적으로 동참하게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며 작가는 이 살인에서 어떠한 공포나 전율을 보여주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루누이는 오로지 최고의 예술 작품을 창조한다는 더 높은 목표 때문에 살인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행하는 살인은 그가 추구하는 목표의 달성을 위한 하나의 단계이며 장인이 자신의 작업을 완전하게 완수하기 위한 냉정한 하나의 작업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향수』에서의 죽음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루누이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다. 그것도 부랑자에게 자신의 몸을 뜯어 먹힘으로써 죽음을 맞이한다. 인육을 먹는 것을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라고 하는데 영화 『향수』에서 식인이 상징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위에서 말했듯 그루누이의 천재적인 예술적 성취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루누이의 죽음은 지상 최대의 향수를 만들었다는 예술적 완성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 처음부터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할 냄새를 그루누이는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루누이의 사회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사회성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그루누이는 자신의 꿈을 이루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뜯어 먹히게 함으로써 드디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회성 획득을 하는 것이다. 셋째, 일반적으로 카니발리즘은 희생을 뜻하기도 하는데 그루누이의 희생은 마치 예수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주게 한다. 예수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듯 그루누이도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지상최고의 향수를 얻어 세상을 다스리고 구제하겠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근대사회의 허구와 광기를 구제, 조롱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제 그루누이의 죽음을 실존철학적 측면에서 잠시 살펴보자.
본질적 인간이 아닌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밝히려는 실존철학은 인간의 자유를 가장 중시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으며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상계의 존재가 근원적 존재를 말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 현존재는 양심을 갖기 원하면서 자신의 본질적인 무력함을 떠맡는다. 이 무력함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실존의 불가능성에 대한 끊임없는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며, 이 죽음은 실존의 유한성을 구성하고, 그 앞에서 현존재는 무력하기 짝이 없으며 죽음은 그의 종말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죽음을 의미하는 끝은 끝에 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끝을 향한 존재임을 뜻하며, 게다가 현존재가 아직은 극단적 끝이 아님을, 그래서 자신의 끝이 항상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로서의 끝이다. 다시 말해 죽음을 향하고 있는 본래적 존재는 자기의 가능성을 구현한다는 의미로 죽음은 그 자신의 가능성에로 미리 달려감이다. 미리 앞서 달려간다는 것은 죽음을 ‘가장 고유하고 확실한, 그리고 규정되어 있지 않고 건너뛸 수 없는 현존재의 가능성으로’ 드러내 보이고 이해하면서 다가가는 것을 뜻한다. 그루누이에게 적용시켜보면, 그루누이는 자기의 자유와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자신의 선택으로 본래적 존재를 찾아간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루누이의 죽음은 스스로 선택하였기에, 그것도 향수로서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는 순간 그는 죽음을 자율적으로 선택하여 존재의 가능성으로서 영원을 획득하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그것은 곧 하이데거 표현을 빌리면 無다. 즉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인식한 후의 죽음은 일반적 끝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실존적 죽음으로서 가능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루누이가 세상을 다 얻는 방법을 향수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실존적 죽음은 무한한 초월이요 끊임없는 가능성의 일종인 것이다.
3) 예술과 도덕의 문제
죽음을 통한 예술의 문제는 예술과 도덕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즉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소녀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그루누이의 책임이나 죄의식, 죄과에 대한 의문과 부딪히게 된다. 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년이 결국 살인자가 된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그루누이가 성장한 사회의 제도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그루누이 스스로가 비도덕적이어서 살인자로서의 기질이 있었던 것인가? 이와 같은 도덕과 상식을 벗어난 예술 추구는 유미주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최고의 유미주의자 와일드는 실제로 살인까지 한 동료의 작가를 두둔하기 까지 한다.
통풍과 매독, 폐결핵을 앓고 있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직후 바로 버림받은 그루누이에게 이러한 유아기의 외상은 살인자이자 동시에 예술가인 이중적 성격의 신뢰할만한 심리적인 해석을 제공한다. 더욱이 서술자는 작품 초반부에서, 태어난 직후 버려진 그루누이의 울음소리로 인해 어머니는 단두대로 보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그루누이가 자신의 생명 보전을 위해 치밀하게 계산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서술자는 그루누이의 삶은 사랑과 상호 배타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실제 영화에서는 파리의 역겹고 지저분한 풍경을 나타내기위해 2.5톤의 생선을 뿌렸고 그 냄새는 몇 마을 떨어진 곳에서도 날 정도였다고 한다. 촬영장에는 60여명의 스탭들이 양동이와 호스를 이용해 여러 가지 더러운 것들을 뿌리고 다녔고 촬영이 끝나면 다시 깨끗하게 청소하는 작업이 반복됐다. 그리고 영화에서 맨 마지막 부분에 그루누이가 처음 살인한 여인이 자신을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어루만지는 상상을 하는 장면은 원작 소설에 없는 영화만의 재산이다. 즉 감독은 주인공 그루누이가 탄생에서부터 제대로 된 인간적인 모습으로 태어났다면, 사랑받고 자랐다면, 이런 인간이었다면 ‘나도 정상인처럼 살았을 텐데...’라고 대신 변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서술자는 그루누이의 불우한 유년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그루누이가 도덕적으로 무심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도덕의 결핍이 그를 예술가인 동시에 살인자의 길로 인도하였음을 암시한다. 그는 단 한번도 살인에 이의를 갖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첫 번째 살인으로 소녀의 향기를 소유하고 난 후, 그는 이렇게 멋진 일이 살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 그는 완전히 무관심했다. 정신적 불구자인 구루누이에게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개념은 낯선 표현에 불과했다.
그루누이의 무취 상채 역시 그의 도덕의 척도로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냄새란 원래 인간적인 따뜻함을 상징하는데, 그루누이의 냄새가 없는 상태는 그의 도덕에 대한 무지함에서 비롯된 잔인한 행위와 연결된다.
그루누이는 그의 끔찍하고 역겨운 일련의 살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비난과 거부감보다는 오히려 연민과 경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독자들은 긴장감 속에서 그와 공범자가 된다. 쥐스킨트는 그루누이의 유아기의 외상, 불우한 어린 시절, 그의 무취 상태 등을 통해 그루누이의 비도덕성을 설명하며 그가 대중 살해범의 길로 들어선 것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즉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예술가를 도덕적인 의무감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예술과 도덕의 문제를 별개의 것으로 다룸을 추측할 수 있다. 바로 쥐스킨트는 자신을 소외시킨 비정한 사회를 대상으로 한 살인자인 그루누이를 완벽한 예술을 추구하다 끝내 좌절하는 비극적인 인물로 그려냄으로써, 살인자의 이야기가 아닌 천재적인 예술가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유미주의적 전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예술과 도덕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살펴보자.
왜 우리는 무엇보다도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우리가 그릇된 일을 할 수 있고 벌을 받지 않는다면 나쁜 짓을 할 수 있음에도 왜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하는가? 우리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과 도덕원리를 지키는 것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이때 긴장은 때때로 자기 이익과 도덕 사이의, 즉 다른 사람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나 자신만의 이익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과 옳은 것을 행하는 것 사이의 긴장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런 경우 도덕적 고려는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이고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의 경우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루누이에게는 처음부터 도덕적 고려나 갈등이 없었다. 도덕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그루누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회는 도덕적 고려는 직접적인 편안함, 욕망 및 자기 이익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들이 항상 도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악이 벌 받지 않는 경우가 더 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따라서 벌 받지 않은 것을 안다면 우리는 도덕적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인가. 그러나 벌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악을 쉽게 저지르지는 않는다. 바로 양심 때문이다. 그러나 양심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람이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논의를 플라톤과 칸트의 이론으로 정리해보자.
플라톤은 자아 혹은 영혼을 이성, 욕망, 기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면서 이 세 부분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이성적 부분이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 내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도덕적이 되는 것이다. 즉 도덕적이 된다는 것은 결코 자기 이익과 대립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행복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플라톤에 의하면 잘 균형 잡혀 있다는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 비도덕적 인간은 균형을 잃고 욕망에 끌린 사람이며, 완전히 비도덕적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루누이를 보면 이 이론이 잘 안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루누이는 내적으로 어쩌면 잘 균형 잡힌 인물이며 잘 조화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 ‘한결같이’ 자기의 목적을 위해 욕망을 통제하고 고통을 이겨낸다. 그러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도덕적이지 않은 그루누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권위의 기초는 우리 외부에 있는 존재하는 객관적인 형상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인 한에서의 인간 자신이다. 이것을 칸트는 이성의 명령인 ‘내면의 도덕법칙’이라 부르는데, 우리의 행동의 결과는 우리의 행동의 도덕적 가치와는 관련이 없으며, 오로지 그 배후에 있는 동기만이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칸트는 오로지 의무감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행동들만이, 그리고 의무를 위해서 행해진 행동들만이 도덕적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성적 존재에 대하여 구속력이 있는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에게 합리적이면서 너에게는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것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원칙이 보편화 가능성이 있다는 것, 즉 그것이 적절하게 유사한 상황 속에 있는 모든 행위자들에 의해 일관성 있게 준수될 수 있다는 것을 확정지을 필요가 있다. 이것을 그는 ‘약속-지키기’의 예로 설명한다. 나에게 불리하다고 약속을 깨면 약속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게 됨으로 약속은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에 있어 도덕은 또한 자유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는 ‘자율’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내가 외부의 영향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준수하여 살아가고, 나 자신의 존재에 모습과 방향을 부여하는 원칙을 내가 나 혼자의 힘으로 정해나간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이해된다. 마찬가지로 만약 내가 외부의 영향에 종속된다면, 즉 ‘타율’의 상태에 있다면 나는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루누이는 외부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의 소리에 따라 행동하였으므로 그루누이의 살인은 도덕적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앞서도 설명이 되었지만, 칸트의 강조는 도덕적이 되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이성적 고려에 의해 동기부여가 될 수 있도록 특정한 상황으로부터 모든 욕망, 성향, 감정 및 느낌을 배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철저하게 의무감에서 행동해야하며 모든 느낌과 욕망을 억누르고 조절하며 통제하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도덕적 사고 속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한마디로 그루누이의 행동은 도덕적이지 못하다. 아무리 자신의 불우한 태생을 이해한다 해도 그의 살인행위는 인류 사회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루누이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술을 위해서는 어떤 행위도 가능하다는 유미주의적 사고만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작가는 그루누이의 태생과 성장과정을 비정상적으로 설정해놓았을 것이고 어쩌면 마지막 그루누이의 죽음을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편입하거나 잘못을 벌하는 상징적인 것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4) 후각의 시각화(영상화)- 후각의 의미
후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냄새’를 다른 감각을 이용하여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해내야 한다는 점은 소설과 영화 모두에게 고민거리다. 소설에서는 작가가 집요할 정도로 다양한 단어의 나열을 묘사에 이용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감귤이나 실측백나무, 사향냄새와는 달랐으며 재스민이나 수선화, 모과나무나 붓꽃의 향기 등과도 다른 것이었다. 또 이 향기는 붙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혼합돼 있었다. 그것도 그냥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면서 말이다. 가볍고 연약하면서도 단단하고 지속적이었다. 얇지만 오색영롱하게 반짝이는 비단처럼...” 독자 개인의 상상력에 의존할 수 있는 소설에 비해 영화는 도움 받을 곳이 그리 많지 않다. 화면에 보이는 것이 즉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 감독은 화면의 질감과 빠른 편집을 이용해 두 장르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 영화 <향수>는 마치 유화물감을 거칠게 덧칠한 듯 찐득한 질감의 색깔을 뿜어낸다. 초반의 생선 시장 장면, 흘러나오는 내레이션대로 영화는 “프랑스에서도 가장 악취가 심한 그 곳”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냈다. 생선내장이 널브러진 바닥에서 태어난 그루누이가 깨어나는 순간, 화면은 빠르게 시장 주변의 풍경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며 훑어나간다. 토막난 생선의 지느러미나 아가미, 떨어진 조각을 주워 먹는 지저분한 개, 버려진 생선들 사이를 기어 다니는 구더기와 쥐 등.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고 빠르게 릴을 감듯 넘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시각을 넘어서는 강한 자극을 준다. 그 자극은 우리 뇌의 어딘가에 기억돼 있는 ‘진짜 생선냄새’까지 끌어낸다.
쥐스킨트는 소설에서 그루누이를 등이 굽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외모로 설정했다. 심지어 ‘악마’, ‘괴물’, ‘독사’라고까지 표현한다. 그는 그루누이를 동정하지 않는 듯하다.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가며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루누이를 연기하는 주인공은 전혀 못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렁그렁한 슬픈 눈으로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한다. 이것은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다. 소설에서는 그루누이의 내면과 생각들을 쥐스킨트의 설명으로 알 수 있지만 영화는 내레이션만으로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인공의 표정과 눈빛, 행동으로 그루누이의 모든 것을 설명해야 했다. 그루누이가 향수 만들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랑받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갈망과 자신에게 냄새가 없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루누이를 잘 표현해냈다. 문제는 그루누이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대한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관객이 그의 집착에 매혹될 수 있는 방향으로 캐릭터를 만들어야 했다. 영화의 그루누이는 집착의 ‘동기’라는 부분에서 관객들에게 좀 더 다가가기 쉬운 캐릭터로 변했다.
영화의 백미는 마지막 사형 집행 장면이다. 13명의 여인들을 죽이고 만든 궁극의 향수를 뿌린 뒤, 모든 사람들이 옷을 벗으며 나누는 충격적인 장면에서 그들은 마치 향수의 향이 시간에 따라 변해가듯 동정, 애정, 욕망을 차례로 표현해냈다. 마치 원작을 뛰어넘어 ‘이것이 영화다’라고 자신 있게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후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심리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 후각이라고 한다. 점차적으로 엄마와의 관계로 사회성이 획득되면서 시각이 발달하게 되고 후각이 퇴화된다고 한다. 문명을 주도하는 감각은 시각이며, 이와 반대로 후각은 광기와 야만의 감각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개인은 심리적 발전 과정에서 진화 과정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사람이 성숙해 감에 따라 유아기적인 냄새의 즐거움도 시각적 즐거움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따라서 아직도 후각적인 것을 강조하는 성인은 심리적 발전이 억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루누이는 반대다. 처음부터 엄마와의 관계 단절로 사회성 획득에 실패한 그루누이는 문화를 의미하는 시각과 언어 사용에 있어서는 뒤떨어지고 원초적인 후각이 발달하게 되었다.
소설에서 그루누이를 맡은 가이아르 부인 역시도 후각과 관련된 인물이다. 그녀는 내면적으로는 이미 죽어 있는 여자로서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부지깽이로 이마를 맞은 이후 후각을 상실했다. 그 한번의 매질로 인해, 그리고 후각의 상실로 인해 그녀는 기쁨도 절망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 된다. 그루누이가 태어날 때부터 냄새가 나지 않고 천재적인 후각 능력을 타고난 것에 비해 가이아르 부인의 후천적인 후각 상실을 비교해보면, 두 인물 모두 비정상적인 냄새와 관련된 인물로서 인간사회, 공동체에 융화되지 못하고 계속 ‘소외’ 된 삶을 살아가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루누이에게 냄새는 하나의 소통 수단에서 시작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었으며, 인간의 냄새 나아가서는 천사의 냄새라는 향기의 절정을 만들어 낸 부분에 있어선 하나의 예술 작품을 완성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25번의 살인을 통해 최고의 향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마지막 리쉬의 딸 살인을 하며 그녀의 채취를 얻어내는 과정에서는 그루누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냄새의 힘은 다양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루누이에게 있어 냄새는 예술의 완성,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 있어 다양한 발판을 마련해 준 반면, 발디니에게 있어 냄새는 자신의 출세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고, 결국 자신의 죽음 후 남겨진 마지막 그의 발자취에 불과하다. 또한 잔느 뷔시 유모나 테리에 신부에게 있어 냄새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녀야하는 것으로 그루누이와 같이 냄새 없는 인간은 악마로 간주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인간들은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냄새의 영역은 자칫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다. 하지만 『향수』에서는 냄새, 후각이라는 모티브가 소설의 전개를 주도해가고 있으며, 이 시대 문학에 있어 하나의 담론을 만들어 주고 있다.
3. 예술과 예술가 소설
그루누이라는 이름은 ‘개구리’라는 말이다. 개구리는 수륙양생이며 이는 예술가로서의 작품 주인공이 갖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잘 나타내 준다. 정작 자신에게는 냄새가 없으면서도 수천가지의 냄새를 분류하고 합성해내는 모순된 존재, 꽃을 이용하여 향수를 만드는 인간계와 자연계 사이의 존재로서 문제성 있는 예술가, 그루누이의 향수에 대한 집착과 망상이 미학적인 용어로 표현되고,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희생자들의 향내를 증류하는 과정이 예술적인 기술을 나타내 주기 때문에 그의 향수 추구는 미적 원칙의 추구로 해석될 수 있다. 작가 쥐스킨트는 18, 19세기 예술가들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속성을 그루누이에게 갖다 붙임으로서 지난 2백년간 예술가 소설의 역사를 되짚어 봄과 동시에 그것이 현재에 지니는 의미를 되새겨보고 있다.
예술가 소설이 가장 최상의 모범으로 삼는 독창적인 천재는 프로메테우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천재 이상의 원초 신화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천재시대의 봉인이며 예술가 그루누이의 자의식이 향하고 있는 정점이다. 그루누이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면을 벗어던지고 스스로를 새로운 인간이라 칭하면서 신의 흉내를 내며 자기자신의 창조행위를 상상하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예술가로서의 그루누이 속에는 천재시대 이상인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 같은 예술가를 자율적인 천재의 원형으로 찬양하는 예술가상은 19세기 중반이 되면 와해된다. 이 시민의 세기에 이르면 의학과 철학과 예술과 사회제도가 함께 작용하면서 예술과 예술가에게서 그 신비함을 빼앗아가고 예술에 급격한 기능변화를 가져온다. 예술가 역시 그 자신이 지닌 이상의 연기자일 뿐이며 가상의 세계를 꿈꾸는 괴짜가 된다. 그래서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는 분열된 존재요, 이중 자아의 존재이다.
낭만주의 천재 예술가들이 마약. 아편. 알콜중독, 정신분열, 간질, 성적 이상자들이 많았으며, 병든 천재가 발육부진의 만년 유아상태에 머문다는 사실, 도덕적인 개념이 없다는 사실 등은 어찌하여 천재 예술가가 범죄자와 살인자로 변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그루누이도 예술을 찾아 높고 높은 산으로 순례를 떠난다. 그러나 그가 산 속 동굴에서 만들어내는 예술은 자기자신을 위한 예술, 도취의 예술, 나르시시즘의 예술이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 속의 자줏빛 살롱에서 제단 앞에 놓인 장의자에 누워 자기자신의 내면성으로 목욕을 하고, 하인이 향기의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을 읽는다. 내면의 동굴에서 만들어지는 인위적 낙원, 상상력 속에서 향수의 아른거리는 연기, 사람을 도취시키고 안개에 싸인 듯이 만드는 그 거짓 향기야말로 예술가 그루누이의 본가이다. 그루누이의 내적 우주에는 진정한 예술품이 아니라 사물의 냄새만이 있으며, 그가 즐기는 것은 독창적인 창조력이 아니라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실체 없는 예술이다. 그가 만들어 내는 것은 이미 알려진 세계, 실험된 세계의 것이다. 그루누이의 나르시시즘은 결코 창조적인 데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그의 상상력은 이미 창조된 모델인 기존의 냄새를 모방하고 합성하는 것에 매달리는 비창조적인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만들어내는 향수라는 예술의 성격이다.
이 자족적인 예술가는 자신이 냄새 없는 인간임을 알고 백발의 모습으로 데카당한 천재가 되어 산에서 내려와 세상에 복귀한다. 이제 사기꾼으로서의 예술가의 속성이 부가된다. 그는 냄새를 만드는 것, 즉 예술이 환상임을 깨닫고, 자신에게 그 환상을 만드는 능력이 주어져 있음을 인식한다. 예술이 환상이라는 사실은 이 작품에서 예술 자체로 상정된 향수의 성격과 잘 맞아 떨어진다. 향수는 맡는 사람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도취된 최면에 걸려들게 하며 사랑과 에로티시즘과 미와 연결되지만 그 향기가 휘발되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물질이다. 사형장면의 집단 섹스도 바로 사람들의 후각을 마비시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은 덧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루누이가 부랑자에게 잡아먹힘으로써 그루누이라는 예술가는 사라져버렸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주체가 사라졌고 바로 無인 것이다. 이처럼 예술가와 無가 동일시됨으로써 이 작품은 1천년대 말인 현재의 예술이 그야말로 실질 내용이 없는 디자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루누이가 나타내는 예술가는 앞모습만 보이는 실체없음이요, 시뮬레이션의 상징이다. 이 예술가 그루누이는 인위적으로 조합된 자아요 비인간이며,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복합성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술가 상들의 조합을 통해 제시되는 작가의 메시지일 것이다. 범죄와 연결되는 예술가, 주체가 해체되는 예술가를 합성해 냄으로써 쥐스킨트는 오늘날의 예술가가 어떤 예술가인가를 보여 주려 한다.
4. 『향수』에서 읽을 수 있는 코드
1) 향수의 역사적 문화적 관점
“냄새는 우리에게 내면의 감정을 제시한다. 시각보다 직접적이고 정신으로부터 독립된 즐거움을 제시한다.” 생 렁베르가 이야기하듯 향수는 인간의 감정과 연관되어 유혹적인 힘을 발휘한다. 쥐스킨트는 향수의 유혹적인 힘을 그의 작품 속에 전개시키고 있다. 향수는 소설과 주인공의 발전의 연관 속에서 여러 의미를 가진다. 파스퇴르가 병을 옮기는 원인을 발견하고 냄새를 모든 악의 원인으로 간주하자 향수의 승리가 시작되었다. 냄새가 병과 부패를 의미하는 반면, 향수의 냄새는 긍정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고유의 냄새를 동물적인 것으로 치부한다면 향수의 기교적 냄새는 미와 세련을 의미한다. 향수를 뿌리는 단계는 사회적으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 귀족들은 달콤하고 묵직한 냄새를 싫어하고 꽃향기 나고 열매 냄새나는 향기를 선호하였다. 반면 혁명가들은 동물적 향기를 선호하였다.
향기는 사회적 영역 안에 포함되어 사회적 특성을 드러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사람들의 땀 냄새와 악취는 남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부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이 자리에 향수가 들어서게 되었다. 냄새가 부정적이면 악취가 되었고, 냄새가 긍정적이면 에로티시즘과 사랑과 연관이 되었으며 유혹의 힘을 지니게 된 것이다.
2) 향수의 정치적 관점
향수는 그루누이에게 결정적 삶의 내용이다. 그는 향수의 도움으로 자신의 부족한 향기를 보충한다. 그는 냄새가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임을 알게 된다. 인간은 냄새를 맡고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이 후각의 특성을 그루누이는 이용 한다. 그의 향수는 인간의 에로틱한 면을 목표로 해 인간을 욕정에 사로잡히는 동물로 만들고 있다. 향수는 인간에게서 동물적 충동적 면을 불러일으킨다. 향수는 유혹이고 권력의 수단이다.
처형 날 그루누이는 향수의 도움으로 이성을 가진 인간을 혼미케 하고 그들에게서 의식과 이성을 빼앗아 버린다. 그들에게 그는 신과 같았다. 그는 대중에게 최면을 걸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루누이의 처형일 날의 집단 혼음 장면은 민속 축제와 카니발 속의 대중의 방탕한 축제의 요소다. 나아가 파시스트적 대중의 광기적 요소와 파시스트의 대중조작의 요소이기도 하다. 또한 그루누이의 처형장면과 그 대중의 오르가즘은 ‘신화적 수준의 미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처형 장면의 사건은 파시스트적 광적인 축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제 3제국 시대에 일어났던 대중과 권력과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처형장에 나타난 그루누이를 처음에는 혐오스러운 연쇄살인마로 생각하며 비난을 퍼붓다가 그루누이가 떨어트린 향수 몇 방울에 사람들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그를 신으로 칭송한다. 이 얼마나 웃픈 아이러니한 장면인가! 최근에 영구집권을 꿈꾸며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김건희)과 구치소에 갇힌 그를 향해 ‘윤어게인’을 외치며 법원을 침탈한 자들을 보라! 이 얼마나 파시스트적인 대중의 광기란 말인가! 이들은 중국 공산당이 한국의 선거에 개입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친일을 찬미하고 독립투사를 비하한다. ‘파시스트의 대중조작적 요소’이자 ‘어리석은 대중의 신화적 광기의 모습’이다. 작가가 어떻게 무려 35년을 뛰어넘어 먼 나라 한국의 현실을 이렇게 신랄하게 꼬집을 수 있을까. 이는 인간 본성이 그렇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Ⅲ. 나오는 말
쥐스킨트는 이야기 속의 예술가 그루누이가 향수를 조합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법으로 이 소설을 구성함으로써 서술 방법을 소설의 주제인 예술의 문제와 연결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예술가와 예술의 유형을 제시하고 있음을 고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향수』는 그루누이의 모습을 통해 예술적 광신주의,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는 유미주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한다. 예술가를 도덕적 의무감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도덕의 척도로는 판단이 불가능한 예술가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대한 문학과 예술의 영향력과 호소력이 급속도로 감소하고 있는 현실에서 쥐스킨트의 『향수』는 18세기 이래 독일의 예술가 소설의 전통을 패러디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예술과 예술가의 유형을 제시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또한 그루누이라는 예술가상을 통하여 현대 예술을 비판하고 이전부터 끊임없이 화두가 되어온 주제인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미주의를 표방하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이는 모습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인간적이지 못한 남녀가 무한정 섹스를 즐기는 모습, 광적인 욕망에의 추구, 그로테스크하고 몽환적인 배경 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영원히 소통할 수 없는 인간사, 권태롭고 허울뿐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연인들의 허무적인 공간이, 정신착란적 죄의식이 극에 이른 절망적 세계로 환치되고 여전히 세계는 개인들에게 적응할 수 없는 압력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 끝은 결국 죽음과 자기 파멸뿐임을 유미주의 예술들은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종류의 소설과 영화를 통해 우리는 존재의 의미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진지한 철학적 물음을 다시 한번 해봐야 할 것이다. 주체적인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실존적인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장르가 바로 유미주의 예술이다.
삶이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지, 아니면 예술이 삶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인간의 숙제요 한계일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을 일회성으로 소비하고 낭비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생을 퇴폐적으로 허비하는 유미주의 예술의 특징은 극복되어야 하는 점이지만, 동시에 이런 유미주의 예술의 특징을 체험함으로써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더 진지하게 반추해 보는 시간으로 승화시켜 나간다면 유미주의 예술의 특징이자 단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분명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