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2000년대 영화에 나타난 가부장 이데올로기 연구
-<미워도 다시 한 번>, <자유부인>, <아버지>, <해피엔드>, <결혼은 미친 짓이다>, <바람난 가족>을 대상으로-
목차
Ⅰ. 서론
Ⅱ.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고찰
Ⅲ.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가부장 이데올로기 변화 양상
Ⅳ. 영화에 반영된 가부장 이데올로기 변화 양상
1.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강화: <미워도 다시 한 번>, <자유부인>
2.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위기: <아버지>, <해피엔드>
3.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해체: <결혼은 미친 짓이다>, <바람난 가족>
Ⅴ. 결론 - 영화에 반영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의미와 한계
Ⅰ. 서론
수세기 동안 가족은 경제적 협동 혹은 일상생활의 공유를 지속하여 정서적으로 만족을 얻는 사회생활의 기초 단위로 인식 되어졌고,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생활하는 장으로서 가장 원초적이고 친숙한 집단으로 이해되어 왔다. 또한 자유연애가 일반화된 이후로 가족은 사랑과 결혼의 자연스런 결과물로 여겨져 왔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가족은 ‘사랑-결혼-가족 형성’이라는 도식화된 공식이 성립되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일반적으로 이상화 및 신성시 되었던 가족이데올로기는 현재 급속히 해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수렵채집사회인 원시시대에는 생존이 최대 과제였기 때문에 소유와 재화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수렵사회가 농경사회로 전환되면서 잉여식량과 경작을 위한 토지, 도구, 가축 소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 결과 분배의 경쟁이 나타나고 이를 독점하기 위한 사유화가 진행된다. 이렇게 사유재산이 생기면서부터 상속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때 출산과 수유에서 자유로운 남성이 생산 활동을 담당하게 되고 자연스레 토지와 도구 등 생산수단을 관리하게 된다. 생산수단을 관리하게 된 남성들은 그들의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할 수 있는 수단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는 부자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집단혼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렇듯 사유화와 상속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가부장 가족이데올로기가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근간이 된다.
전통적인 가족이데올로기란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에서 가부장 권력 하에 가족과 사회 구성원들이 종속적 관계를 형성하며, 이중적 규범의 일부일처제와 젠더이데올로기를 통한 남녀의 성별 분리 등을 특징으로 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여성의 권리 향상,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전통적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해체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어떤 형태로 형성되어 발전, 해체되고 있는지, 그 변화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회통제의 기제로 사용되고 있는지,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국사회의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자 한다.
가부장제에 대하 논의는 가족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주로 연구되어 왔다. 또한 가부장제에 국한하여 논의한 연구가 있다. 전자는 서양가족사를 다룬 연구와 한국가족사를 다룬 연구로 구분되는데 주로 가족의 변천사를 중심으로 경제적 요소나 정치적 요소가 어떻게 가족이데올로기를 형성하여 왔는지를 분석하는 것이고, 후자는 범위를 좁혀 가부장제, 특히 근대 이후 가부장제가 어떻게 여성의 억압기제로 사용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문화는 현실을 반영함과 함께 현실의 변화를 이끌기도 한다. 특히 영화는 어느 특정한 사회에서 공론화된 것뿐만 아니라 공론화되지 않은 것, 지배질서에서 언설화 되지 않는 것 혹은 합법화되지 않는 것들마저 표출하는 공간이다. 영화가 단순히 현실의 반영이 아닌, 영화적 재현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의미와 가치질서를 찾아낼 수 있는 적극적인 협상과 경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따라서 본 연구는 80년대 이후 영화에 반영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변화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가부장제에 대한 현재의 문화적 의미를 분석하고 새로운 담론을 모색하고자 한다.
Ⅱ.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고찰
인류역사가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잉여식량과 분배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인류는 서로 경쟁하게 된다. 사유화의 문제가 생기면서 상속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자기의 재산과 생산수단을 물려주기 위한 방안으로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즉 사회의 공공부분의 활동이 확대되면서 남성들의 역할이 강화되고 생산수단을 확보한 남성들은 여성을 가정이라는 사적부분으로 그 역할을 제한시켜버린다. 특히 근대 이후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더욱 억압하며 그 이념을 공고화한다.
가부장제(patriarchy)는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문자 그대로 아버지의 지배를 뜻하지만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로 쓰인다. 케이트 밀레트(Kate Millett)는 가부장제를 아버지의 지배가 아니라 남자의 지배를 의미하는, 그 자체로서 권력관계와 지배의 보편적인 양식으로 보았다. 가부장제는 상이한 사회, 역사적 시기, 계급적 차이를 막론하고 전면적으로 퍼져있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스템이다. 하트만(Hartmann)은 가부장제를 물적 토대를 갖고 있는 남성들이 비록 위계적이기는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여성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상호종속성 또는 연대를 성립시키고, 창출시키는 일련의 사회적 관계라고 하였다. 즉 가부장제 아래 여성은 무엇을 하든, 여성 자신의 지위가 어떠하든 관계없이 아버지 또는 남편의 지배 아래서 살게 된다. 가부장제 아래 여성은 남성의 허락 범위 안에서만 특권을 누리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한국의 가부장제가 확립된 것은 대체로 조선 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선시대를 통해 강화된 부계혈통의 원리는 여성의 삶을 더욱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양란 이후 더욱 보수화된 조선 사회는 여성을 통제하기 위해 정절, 출가외인, 열녀, 삼종지도 등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 남성들은 동양 사상을 의도적으로 오독하여 여성들에게 생물학적 열등의식을 내면화시켰고 여성은 철저히 남성을 위한 존재로 하락되었다.
가부장제는 근대를 지나면서 더욱 공고화되어 여성을 억압하게 된다. 서구의 근대는 이원론에 기초하고 있다. 신과 인간, 이성과 감정, 영혼과 정신, 능동성과 수동성 등의 이항대립적 구도가 그것이다. 이 이항대립 구도에는 타자가 존재해야 하는데 바로 여성이 타자화 된다. 자본주의 발달로 더욱 확대된 공공부분은 이성적이고 능동성의 특징을 가진 남성이 담당하고, 감정적이고 수동성의 특징을 가진 여성은 사적부분인 가정에 충실하도록 이데올로기화한 것이 근대의 가부장 이데올로기다. 철저히 타자화된 여성은 남성의 가부장 이데올로기 속에서 남성이 바라는 현모양처가 되어야만 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친족제도는 가족으로 묶여지고 가족 속에서 여성이 머물 곳은 가정이라는 방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특히 한국의 근대는 군사독재 세력의 합리화에 이용되었다. 압축적으로 근대를 달성할 필요가 있었던 군사 독재세력은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근대의 프로젝트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가족은 근대화 달성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동되는 일종의 사회제도이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억압과 계급질서를 정당화하는 수단이자 상품의 소비 주체로 동시에 존재한다. 한국 근대의 가족은 국가의 축소판으로 작용한다. 즉 근대 가족은 남성에게는 남편으로서, 여성에게는 아내로서 성 역할을 부여하고 공적 영역(사회)과 사적 영역(가정), 자연(모성)과 문명(노동), 능동적 주체(부양자)와 수동적 부속체(피부양자), 이성과 감정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완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남자는 일하는 산업전사로서, 여자는 내조 잘 하고 아이들 잘 키우는 현모양처로 희생할 것을 요구받는다. 가족과 국가는 공동체로서 강하게 서로를 결속하고 그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각 지위에 할당된 역할에 충실할 것을 강요받았다.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학교, 공공기관, 매체 등에서 한 목소리로 표출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에 대한 관념은 갖가지 방법으로 널리 유포, 침투되어 여성들 자신에 의해 내면화된다. 대중매체의 힘을 빌어 널리 유포된 성역할 이데올로기는 계속 재생산됨으로서 남성지배를 정당화시키고 여성의 억압을 지속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의 핵심적 근간이 된다.
상술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적 영역인 가족 내에서 가족구성원들은 모두 가부장의 권력 하에 종속되어 진다. 즉 경제적 지배권, 정치적 권력, 종교적 통제권은 모두 가부장인 아버지나 남편에게 부여되며 아내와 자녀들은 그의 통솔 하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공적 영역인 사회적 영역과 경제의 장 그리고 국가로 확대 적용되어 개인과 가족은 공적 영역에서 가부장적 구조에 편입되어 통제를 받게 된다.
둘째, 가부장제는 구성원리로서 일부일처제의 결혼을 표방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에겐 억압의 형태로 남성에겐 관대한 제도로서 이중적 잣대로 적용되어 실질적으로 일부다처제 형태로 존재되어 왔다.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성적인 부분이지만, 여성의 능동적 성적욕망의 표출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가령 성적으로 능동적인 여성은 남편과 가정, 사회에서 응징 받으며 억압받고 소외된다.
셋째, 가부장제는 여성/남성의 성차이데올로기(gender)를 바탕으로 하여 여성은 집안에서 정서적 역할을 담당하는 타자로 존재시키고, 남성은 공인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성별 역할 분리를 관습화하고 제도화 시킨다. 이것은 가정이라는 사적영역에서 노동시장이라는 공적영역에까지 확장되어 여성을 남성의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강요하였다.
넷째, 이원론에 입각한 근대를 거치면서 가부장제는 남성을 주체로, 여성을 객체화하였다. 여성을 성적인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으로 분류하여 순결 또는 정절이데올로기를 여성들에게 강요하였다. 성적인 여성은 단정치 못한 여성으로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성적이지 않은 여성은 단정한 여성으로 순결의 이미지를 부여받는다. 또한 수동성을 여성의 특징으로 강조하여 모성, 착함, 인내, 헌신, 친절 등의 이데올로기를 여성에게 부과하였다. 이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써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
Ⅲ.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가부장 이데올로기 변화 양상
전통적으로 결혼을 통한 가족의 형성은 경제적 최소단위였다. 결혼을 통한 재생산과 경제적 공동체의 구성은 개인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었던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결혼은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분리를 통한 임금차별 제도로 정착한다. 즉 근대 산업사회가 시작되고, 임금노동자의 개념이 규정되면서, 자본주의는 성인남자에게 그의 노동의 대가로 그와 그의 부양가족을 위한 생계유지의 비용을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은 그러한 부양의 의무를 지지 않으므로, 남성노동력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지 못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러한 임금차별의 양상은 그대로 남성과 여성의 경제적 차이를 가져오게 되고, 여성이 남성에게 생계를 의지하는 경제적 의존의 양상을 낳았다.
한국의 가부장을 논하기는 쉽지가 않다. 근대화 과정이 서양 선진국처럼 자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과 군사독재의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점, 그리고 한국 특유의 유교문화와 어울려 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에 의해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서구화)가 진행되면서 80년대까지 한국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룩하였고, 이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남성들로만 채울 수 없는 노동시장을 여성들로 채웠고, 여성들은 자연히 남성들의 고유영역인 공적부분(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처음에 많은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남성들에게 차별을 당하는 구조 속에서 억압받았으나 정치, 경제, 사회부문으로 그들의 활동 범위를 확대해갔다. 이런 여성의 활동범위 확대에 위기감을 느낀 남성과 군부 출신 정치인들은 박정희식 군사문화를 더욱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였다. 수직적 질서 속에서 전체 사회가 움직이도록 하였다. 그 방법으로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였던 것이다. 이런 군사 독재정권 하의 국가는 남성적, 공적 세계와 동일시되어 가부장제로 여성을 더욱 억압하고 철저히 사적세계로 그 역할을 한정하도록 이데올로기화 하였다. 남성이 중심이 되는 가정, 가부장과 장남이 절대적 권위를 누리는 가정이 모범적으로 이념화되었다. 아내는 알뜰살뜰하게 돈을 모으고 가족들을 돌보는 역할에 국한된 반면 남성이 아내 외의 다른 여성을 만나는 것은 용인되는 불합리한 시대가 바로 80년대 한국 사회였다.
90년대 한국은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하였다. 그 과정에서 핵가족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사회, 문화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였고 탈근대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페미니즘이 사회에 정착되면서 여성은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고 의식의 변화를 이루었다. 여성들은 더 이상 공적 영역이 남성의 고유 영역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여성도 남성과 같은 역할을 하고 대우받기를 주장하였다. 가정에서 나와 사회라는 공적 영역에서 남성과 당당히 경쟁하던 여자들은 전통적인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구속받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들은 남성과 같은 권리의식을 갖게 되고 경제력까지 갖추게 되면서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더욱 위기 속으로 몰아간 것은 90년대 말에 찾아온 IMF 경제위기였다. 경제위기는 실직 남성들을 대거 양산하였고,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담당하던 공적영역에서의 퇴출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곧 남성성의 위기이자 가족의 위기이며 이분법적인 성별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중대한 위기를 의미했다.
근대화의 한 축이던 자본주의와 함께 더욱 발전한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아이러니하게 경제위기로 그 운명의 위기를 맞았다. 즉 경제위기는 남녀의 역할구조와 권력구조가 변화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위력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경제위기와 함께 가족이 해체되는 것을 우려한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왔으며 ‘고개 숙인 아버지’ 담론을 형성하였다. 아버지의 부재가 가족, 특히 자식에게 크나큰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안겨준다며 무너져 가는 가부장제를 떠받치려 하였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남성, 여성 모두에게 크나큰 짊이며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가부장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해체는 시대적 요청과도 같았다. 2000년대 한국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서 그 이전과 달랐다. 진보적 정권의 탄생, 시민사회 영향력의 증대, 국민들, 특히 젊은 남성들의 의식 변화, 여성의 사회지위 향상 등으로 가부장제는 그 생명을 다하며 해체를 맞이하였다. 사회의 수직적 질서가 수평적으로 급격히 변화한 것이다. 근대의 이원론, 즉 공사영역의 이분법은 더 이상 사회에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성보다 경제력이 높은 여성들이 많이 나타나면서 그 역할이 전도되기에 이르렀다. 즉 수백만에 이르는 주부 남성, 연상연하 커플의 보편화, 예쁜 남자, 인기 있는 악녀 등의 이미지는 고전적인 남성성(근엄함, 엄숙, 강함)과 여성성(부드러움, 다소곳함, 착함)을 부정하고 급기야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기에 이른 것이다. 여성들은 이제까지 억눌러왔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의 길,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선택한다. 남편에서 벗어나 정체성을 찾아 당당하게 자아실현을 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은 전통의 가부장제를 해체, 새로운 가족담론을 형성한다. 비혼 동거형태의 가족, 여성들끼리의 가족, 혈연에서 벗어난 가족 등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형성한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가부장 아래 일부일처제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젊은 남성들을 위주로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남성과 여성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남성의 능력은 오로지 경제적, 사회적 지위와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기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무능한 남성은 더욱 설 자리를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0년대 이후 가부장제는 필연적으로 해체할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Ⅳ. 영화에 반영된 가부장 이데올로기 변화 양상
영화는 예술의 장르를 뛰어 넘는 새로운 의사전달의 수단이자 새로운 사회의 언어이며 훌륭한 정보원의 역할도 해내는 매우 중요한 매체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매스커뮤니케이션으로서 영화는 사회적 행위의 집합체로서 일종의 문화 산물이다. 그 사회의 지배담론은 영화의 탄생에 기본적인 배경이 되며 또한 상품 판매라는 자본의 목적으로 인해 영화는 관객의 욕망을 반영하게 된다. 즉 영화는 국가권력이나 그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적 질서, 더 나아가 관객의 욕망에 부응하는 형태의 담론을 조직해 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산된 영화는 그 자체가 담론이 되어 주체에게 새로운 의미를 이식하는 권력의 매개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제 영화는 생산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관객의 욕망, 상업적 이해, 지배 담론이 각축하는 장이며 새로운 권력관계를 창출하는 의미화의 장이 되는 것이다.
가족제도는 인류 사회 문명의 근간이 되고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가족은 단골소재로 활용되었다. 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경제발전과 여성의 인권향상, 여성의 의식변화 등으로 전통적인 가족형태의 변화, 해체를 맞고 있다.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가부장 가족관계에서 평등적이고 다양한 가족관계로 이행하기 위한 시대적 요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980년대 이후 한국영화에 반영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변화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사회의 가족담론이나 성 지배담론이 어떻게 변화하여 왔으며, 또 앞으로 어떤 사회적 가치를 담보해 나가야 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단 본 연구에서 영화분석은 그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시각으로 한정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영화 곳곳에 장치되어 있다. 인물설정이나 인물간의 관계, 배경 등에서도 영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으며, 또한 관객의 관점으로 영화를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 즉 감독이 의도하는 바(주로 결론에 압축적으로 나옴)를 위주로 분석할 것이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나타나는 영화 중 가부장제의 강화를 주장하는 영화는 주로 전형적인 여성상과 남성상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사회 생활하는 여성을 바람난 여자, 즉 탕녀로 몰아가서 결국 그 여자를 응징하게 된다. 또는 남녀의 역할전도를 통해 남성화되는 여성, 여성화되는 남성을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역할전도가 가정과 사회를 피폐하게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럼으로써 가부장제를 강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부장제를 부정하는 영화는 그 반대의 논리대로 영화를 이끌고 간다. 즉 여성을 긍정적으로 남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결론에서 가부장제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여성을 승리자로 묘사함으로써 가부장제의 해체를 주장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분석할 것이다.
1.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강화: <미워도 다시 한 번 80>, <자유부인 81>
<미워도 다시 한 번>은 68년 첫 작품이 만들어진 이후 71년에, 80년에 리메이크 되었다. 80년 <미워도 다시 한 번>의 내러티브 구조는 철저히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고 있다. 근대의 가부장제는 국가가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고 통제하기 위해 철저히 합법적인 일부일처제만을 인정하고 있다. 그 이외의 결혼과 사랑은 불법으로 간주하여 가차 없이 법으로 차단한다. 그러나 남자의 외도는 허용되지만 여자의 외도는 철저히 응징하는 것이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특징이자 독선이다. 주인공 강신호는 혜영과 바람을 피우고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남성인 강신호는 영화에서 강한 비난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혜영은 강신호와 헤어진 후 직장도 잃고 지방으로 쫓겨 어렵게 살아간다. 가부장제의 이중적 성규범이 작동된 것이다.
8년이 지난 혜영은 강신호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영신을 데리고 나타나서 강신호에게 아들을 보낸다. 부계혈통과 부권중심의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주입되는 장면이다. 또한 강신호의 부인은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한 여자는 부인의 자리를 지킬 가치가 없다며 엄마의 자리를 내주겠다고 한다. 이는 여성이 남성의 사랑과 보호 없이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다. 남편의 외도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그 아이까지 받아들이는 강신호 부인의 역할은 가부장 사회에서 가정부인의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다. 강신호의 부인이 현모양처의 전형(선)이라면 혜영은 가정을 위협하고 순결 이데올로기를 위반한 비난의 대상(악)이다.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선악이분법이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자유부인>은 정비석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50년대, 80년대, 90년대 세 번 이상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주인공의 직업과 상황설정이 약간 바뀌었을 뿐 한결같이 가부장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81년 <자유부인>은 한국 근대화의 이분법이 그대로 적용된 영화다. 남자는 공적 영역인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여자는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 남편 내조 잘 하고 아이들 잘 키우는 철저한 현모양처로 이분화 되어 있다. 영화는 가정에서 살림만 해야 할 여자가 가정 밖으로 나갔을 때 어떤 수난을 당하는지 처절히 보여준다. 여성(아내)에게 가정은 선(善)의 공간이고 가정 밖의 공간은 악의 공간이므로 여성은 철저히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이를 잘 키우는 존재로만 살아야 한다는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노골화한 작품이다.
여주인공 선영은 집에만 박혀 있는 맹추라는 친구의 핀잔에 세상에 구경나왔다가 패션 디자이너 강과 불륜에 빠진다. 결국 선영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정으로 돌아오려 하지만 남편의 이혼 선언으로 자살하고 만다. 영화는 여성의 의식이 그 이전과 달라진 것을 경계하며 철저히 여성을 남성 위주의 가부장 이데올로기로 억압한다. 선영을 유혹하는 그녀의 친구들은 세상 물정에 밝고 개방적이다. 술, 담배, 방종한 성 행위를 일삼는 요부나 악녀로 그려진다. 이는 세상 모든 여자를 요조숙녀 아니면 요부로 나누는 근대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에 충실한 인물설정이다. 선영의 친구 뿐 아니라 불륜 대상자 등 선영의 주변 인물은 하나같이 전형적 인물이고 사이비 인물이다. 이는 사회 현실과 영화의 리얼리즘을 떨어뜨리는 것이지만 전통적 가부장 질서를 내세우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소극적이고 남자의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선영을 보여줌으로서 영화는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있다. 결국 영화 <자유부인>은 가부장 이데올로기 강화를 위해 여성을 가정에만 그 역할을 한정시키고, 여성의 성을 남자 또는 국가가 관리하고 통제해야 함을 보여준다. 이는 남자의 성은 얼마든지 허용되지만 여자의 성은 통제되어야 할 사회의 악으로 규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곧 여성의 육체는 원색적이고 부패한 사회상으로 재현되며 이는 순결해야 할 여성의 육체를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철저한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작동되고 있는 영화다.
2.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위기: <아버지>, <해피엔드>
90년대는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이 많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근대의 공사 이분법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사라져 갔으며 여성들의 권리 의식도 높아져 갔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과 소비의 쾌락을 대담하게 즐겼고 타자의식에서 벗어나 남성과 동등하다는 주체의식을 가졌다. 그러나 90년대 중후반 경제위기와 IMF 외환위기는 흔들리는 가부장제를 다시금 복원하자는 사회적 여론을 형성하였다. 많은 가장들이 직장에서 쫓겨나서 노숙자로 변하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하는 등 사회문제가 발생하자 정부와 사회는 아버지의 부재는 가정의 파괴로 이어지고 결국 사회의 위기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떨어진 아버지의 기와 권위를 살려주자는 이른바 ‘고객 숙인 아버지’담론을 형성하였다. 실상 경제위기 때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많이 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사회, 언론은 이 문제를 간과한 채 아버지의 권위 찾아주기에 몰두하였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영화도 이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였다.
영화 <아버지>가 대표적인데, 서로 타인처럼 지내던 가족들이 죽어가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신뢰하게 된다는 단순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암에 걸린 아버지가 이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독감, 외로움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며, 결국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사회에 가부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가부장제를 되살리려 하고 있다. 영화는 술자리에서 남편이 술상을 뒤엎는데 여기에 대한 반성이 없다. 또한 밤늦게 남편의 술상을 봐야하는 아내에 대한 배려도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남편의 외도 고백에 대해 아내는 질투보다 고마움이 앞서고 남편이 안 돼 보이기까지 한다며 오히려 남편을 외롭게 한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철저한 남성중심적 사고가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철저히 남성은 사회에서 열심히 일만 하는 존재, 여성은 가정에서 내조 잘 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90년대 사회는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시기였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가치 있다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팽배하였다. 따라서 아버지는 직장에서는 일 열심히 하며 가정에서는 근엄하고 엄숙한 존재여야 한다는 근대적 가부장제는 오히려 아버지인 남성을 더 힘들게 하고 가족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제도로 전락하고 있었다.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아버지를 사회, 가정 모두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무력하게 하는 제도임을 깨달아야 하는데, 영화 <아버지>는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없고 무너져가고 있는 아버지의 쓸쓸한 모습만을 부각시키며 힘들어하는 아버지의 기를 세워주고 권위를 지켜주자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불행한 아버지의 비극적인 인생행로를 재현하는 수법으로 가장의 복원, 가부장제의 향수를 꿈꾸고있는 작품이 영화 <아버지>이다.
영화 <해피엔드>는 90년대 우리사회의 변화를 가장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 영화다. 사회에 진출하여 남성보다 경제력이 높은 여성이 많아짐에 따라 기존의 근대식 남녀 공사이분법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해피엔드>는 공적 영역을 담당하는 가장-남성과 사적 영역을 담당하는 주부-여성이라는 성역할의 이분법이 이 영화에서는 전도되어 나타난다. 서민기는 실직한 가장으로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모습으로, 최보라는 영어학원 원장으로 능력있는 직장여성인 동시에 혼자 가족을 부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경제위기와 탈근대사회로의 진입은 가족의 변화를 가져오고 가부장의 위기를 가시화하는 한편 남녀 성별이분법 구도를 허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피엔드>의 인물배치는 뒤바뀐 남녀의 역할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남편은 헌책방에서 연애소설을 찾아 읽으며 쭈그려 않아서 눈물을 흘리는 추레한 모습이, 아내는 잘 나가는 커리우먼으로 오피스텔 복도를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대칭적으로 보여진다. 잠시 후 외도의 대상인 남자와 오피스텔에서 격렬한 섹스를 하는 장면은 관객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제목처럼 역설적 상황임을 암시한다. 결국 영화는 외도하는 커리우먼 보라를 죽임으로써 가부장제의 회귀를 꿈꾼다. 영화 전반에 걸쳐 민기의 역할은 기존의 여성이 하는 일(출근하는 아내를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연속극을 보며 우는 모습, 딸을 놀이방에서 찾아오는 모습 등)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민기가 갖고 있는 남성성 자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보라의 외도가 개입하면서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의 남성 지배적 구조를 비판하기 보다는 그 구조가 요구하는 남성다움으로부터 개인 남성들이 남성으로서 입게 되는 상처와 피해가 얼마나 큰가를 드러내는 쪽으로 급선회한다.
가부장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권력의 배치, 즉 남성을 가정의 역역에, 여성을 공적 영역에 배치하게 되면, 그것은 양자에게 부자연스런 것이 되고 결국 관계는 파괴될 수밖에 없음을 <해피엔드>는 보여준다. 영화는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인물들과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적절히 드러낸다. 여성이 주체성을 획득하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때, 그녀는 사회구조를 깨뜨리는 일탈자가 되고, 타자의 위치에 서게 된 남성은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관객들에게 인식시킨다. 그 결과는 응징이다. 남성의 폭력으로 여성의 자리바꿈을 처벌하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것은 남성의 사기를 높여 생산의 역할에 남성이 전력을 기울이게 하려는 것과 가장으로 군림하던 남성의 역할을 재강화하려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이다.
3.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해체: <결혼은 미친 짓이다>, <바람난 가족>
소비지상주의인 자본주의가 정점에 달한 2000년대는 모든 것이 상품가치가 있는가, 상품으로서 교환가치가 있는가에 의해 평가되는 시대이다. 인간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인간의 존재도 그러하고 사랑과 결혼도 같은 계층끼리의 물물교환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에 전통적인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이제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그 운명을 다하여 해체되기에 이른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담론을 냉소적으로 파헤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결혼제도의 상투성과 통속성을 비판한다. 즉 영화는 관습과 제도의 측면에서 가부장제의 일부일처제 결혼 제도에 저항하고 여성의 몸의 경험을 결혼제도 내에서만 가능하도록 묶어놓은 가부장적 규범성을 제도화하는 담론에 저항하며, 여성을 둘러싼 사회의 억압적 형태를 그 권위적 울타리 내에서 교묘하게 전유하며 그것을 가볍게 뛰어넘고 있다. 가부장 이데올로기 질서를 전유하되 ‘절대로 들키지 않으면서’ 그 질서를 교란시키고 뛰어넘는 이가 바로 여주인공 연희다.
문학은 억압을 이야기하고 억압의 폐해를 이야기하고 권력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의 잠재된 억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나 강사는 농부나 광부보다도 아래라는 우스갯소리가 통용되는 세상이듯,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주인공 준영은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상품가치가 없어 결혼시장에서 최하위등급을 받는 인문학 강사라는 사실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런 열등감은 물신화된 세상에 대한 조소와 냉소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부장) 결혼제도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가부장 결혼 제도를 부정하고 전복하는 태도에 있어 여주인공인 연희의 태도는 준영보다 계산적이고 교묘하다. 현재의 제도권에서는 경제적으로 우수한 의사 남자와 결혼생활을 하고 준영과는 가부장 일부일처제 밖에서 사랑을 한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연희의 말에서 가부장의 일부일처제를 신랄하게 부정하고 냉소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사랑과 결혼을 분리시키고 자본주의 결혼문화가 만들어 낸 욕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연희는 그 자체로 소비되어가는 사랑의 환상에 주체적으로 탐닉한다. 영화는 연희에 대해 가증스럽기는 하나 귀엽게 묘사하며 그녀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또한 영화 결말 부분에서 준영과 잠시 헤어졌던 연희가 준영의 옥탑방을 다시 찾는 장면은 이들의 관계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려준다. 이는 <해피엔드>처럼 남녀의 역할전도로 인한 폐해를 부각시켜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부정, 해체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그래서 영화는 남자 주인공 준영보다는 여자 주인공 연희의 시선과 행동과 말에 초점을 맞추며 주제를 부각시킨다.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둔 연희가 준영이와 떠난 신혼여행 중 민박집에서 섹스하는 장면은 혈통을 중시하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전면적 부정을 강하게 보여준다. 준영이가 질외사정을 하려고 하자 연희는 안에다 해도 된다고 말한다. 연희의 이 대답은 부계혈통을 부정하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전면 해체로 읽히기도 한다. 연희의 자궁 안에서 준영과 남편의 정자들은 서로 뒤섞이며 일부일처제의 부계질서는 끊임없이 교란된다. 다만 연희와 준영이 감지하는 물신화된 욕망의 모호함이 계층적 환경의 차이 이상으로 탐구되지 못하는 것은 이 영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즉 연희의 의식 있는 행동이 아쉽다. 가부장 또는 자본주의의 결혼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데까지만 나아갔을 뿐 그 대안이나 새로운 모습을 창출해내지는 못했다. 감독은 연희의 모습을 통해 가부장의 일부일처제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물신화에 맹목적으로 빠진 우리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완전 부정, 해체하고 모계사회로의 진입을 시도한 영화는 <바람난 가족>이다. 이 영화에서 가부장은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들의 억압 아래 있던 가족 구성원은 풀려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가부장에 의한 가정의 수직적 억압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이 영화는 확실히 보여준다. 이 영화의 가부장들은 한결 같이 비정상들이다. 가부장끼리(아버지와 아들)의 소통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가족 그 누구와의 소통도 원만하지 않다. 아버지가 병으로 죽음에 임박했을 때 정작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는 사람은 며느리다. 늙은 아내는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고 아들은 아버지가 토한 피가 옷에 묻자 동상처럼 굳어 있다. 가부장의 권위가 죽어 이제는 보호받아야 할 상황이 되었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무관심한 이 역설은 가부장제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영화 <아버지>식 가부장의 기나 권위를 살려주려는 시도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 만큼 가부장제의 모순과 폐해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는 뻥 뚫린 올림픽대로를 달리던 주인공 영작의 차가 짐승의 시체 때문에 멈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로지 경제성장을 제 일의 기치로 내세운 한국 근대 가부장제가 경제위기와 사회변화로 브레이크가 걸리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피해자 유골 발굴 장면은 개인의 가족사와 한국의 비성찰적 근대화 과정을 겹쳐놓는다. 영작은 유골이 발견된 구덩이로 곤두박질치는데 이는 가부장적 근대화의 수난과 다름 아니다. 또한 영작은 애인과 쿨한 섹스를 즐기는데 도통 애인과 어울리지 않고 알 수 없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가부장들이 이렇게 소통부재에 시달리고 수난을 겪는 반면, 여성들은 그동안의 가부장제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거나 나름대로 주변인들과 소통을 잘 한다. 시어머니는 남편이 죽자 ‘인생, 솔직하게 살아야 한다’며 애인과 함께 남은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난다. 영작의 아내 호정은 달리던 자전거에서 어린이가 다칠까봐 스스로 자전거에서 넘어지고 아이들은 물건을 주워준다. 서로 소통하고 화해하는 것이다. 또한 호정은 입양아들에게 솔직하게 입양사실을 말하고 ‘가슴 쫙 펴’라고 말한다. 남자들이 쩨쩨하고 인간관계에 서툰 것과 대조적으로 여자들은 나름대로 주변인과 신뢰를 쌓고 소통을 세련되게 잘 한다.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최대 피해자는 여전히 여성이지만 이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는 그 의미를 역전시키고 있다. 남성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이고 미성숙하고 관계 맺기에 서툴다. 영작의 할아버지는 아무도 없이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아버지는 간암으로 죽고 아들은 본인 때문에 죽는다. 가부장으로 대표되는 남성들이 이렇게 미성숙하다는 것은 현재의 가부장제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 더 큰 짐이 되고 남성들을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죽는 모습은 부계혈연 중심의 가부장제의 종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호정은 또 다른 미성숙한 남성인 옆 집 고등학생과 관계를 가지고 임신을 하지만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싱글맘의 인생을 선택한다. 영작이 뒤 늦게 호정에게 오려고 하지만 호정은 가볍게 영작을 아웃시킨다. 부계혈통의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더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영작의 행동이다. 호정에게 아웃당한 영작은 해방감이 느껴지는 가뿐한 걸음걸이로 무용실을 빠져나온다. 가부장제는 여성에게만 억압과 압박을 준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큰 책임과 부담감을 준 제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제가 없어져야 남성, 여성 모두가 자유롭고 즐겁고 편안한 수평관계가 유지된다고 항변하고 있다. 호정의 싱글맘 선택을 보여주고 그 흔한 고부갈등이 전혀 나오지 않는 이 영화는 가부장제의 종말을 고하는 한편 모계제 사회로의 이동을 조심스레 보여주는 영화로도 읽힌다. 모계사회야말로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며, 인류가 ‘자연’을 되찾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래서 순수한 본능을 되찾는 일이 아니겠냐고 반문하는 듯한 영화다.
Ⅴ. 결론 - 영화에 반영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의미와 한계
영화는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할 뿐 아니라 의미 생산의 과정이며 담론의 장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수직적 문화가 수평적으로 바뀌면서 가장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공간이 바로 가정이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해체되고 전통적 가족의 개념이 부정되고 있다. 따라서 1980년대 이후 한국영화에 반영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변화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사회의 가족담론이나 성 지배담론이 어떻게 변화하여 왔으며, 또 앞으로 어떤 사회적 가치를 담보해 나가야 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작업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과 <자유부인>은 80년대 우리 사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남성은 사회에서 열심히 일만 하고 여성은 가정에서 내조 잘 하고 아이들 잘 키우는 현모양처가 되어야 했다. 가부장의 권위는 대단하였으며 여성들은 타자화되어 복종하여야 했다. 남성의 외도는 비난받지 않거나 응징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나 여성의 외도는 철저히 처벌받고 응징되었다. 여성은 스스로 주체화되지 못한 채 철저히 타자화되어 남성이 이룩한 가부장제의 희생자로만 남았다. 여성들의 인물설정에서도 영화는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만든 현모양처 캐릭터는 선으로 묘사하고 그렇지 못한, 즉 사회에서 일하거나 정체성을 찾으려는 여성들은 한결같이 탕녀로 묘사하는 이분법으로 가부장제를 강화 하려한다.
<아버지>, <해피엔드>는 90년대 여성의 사회진출과 의식변화, 그리고 경제적 위기로 닥친 가부장의 위기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특히 IMF 경제위기는 견고할 줄 알았던 남성의 공적 영역을 한 순간에 무너뜨렸고 가부장의 권위와 지위도 함께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가부장의 위력은 대단했다. 직장에 쫓겨난 가장, 노숙자 가장 등이 많아지자 사회와 언론은 아버지 부재가 곧 가정 파괴와 사회 혼란으로 이어진다며 ‘고개 숙인 아버지’담론을 형성하여 가부장의 기와 권위 살리기에 몰두하였다. <아버지>는 가족들과도 소통부재에 시달리고 혼자 외롭게 단절되어 사는 아버지를 가족들이 이해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결말을 처리하여 가부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해피엔드>는 뒤바뀐 남녀 역할을 보여주며 남성의 영역(사회에서 성공한 모습, 외도를 하는 모습)에 도전하는 여성을 무참히 죽임으로써 가부장으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두 영화는 가부장의 나약함과 모순성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위기에 봉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바람난 가족>은 확실히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부정, 해체하고 있다. 달라진 여성의 사회위상과 사회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남녀 성역할 공사이분법은 이제 더 이상 이 사회에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과 행위에 당당한 여성을 보여줌으로써 여성이 주체가 되는 사회의 모습, 즉 모계제로의 이행을 조심스레 말하고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가부장제의 일부일처제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허구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전처럼 외도하는 여성을 단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의 해체를 통해 여성의 주체화를 선언한다. <바람난 가족>은 확실하게 가부장제의 종말을 고한다. 근대의 가부장제가 얼마나 남성마저도 억압하고 불편하게 하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앞으로의 사회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모계제로 이행해야 함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부계 혈통중심의 남성 가부장제의 종말을 고함으로써 평등하고 자유로운 모계제로 이행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고작 두 편의 영화로 한 세대(10년)를 대표할 수 있는가, 하는 대표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위에서 살펴본 결과 80년대 영화는 인물 설정과 결말이 근대 남녀 역할 공사이분법을 철저히 따르고 있는데 이는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90년대 영화에서는 변화하는 사회에 맞게 여자의 역할이 많이 향상되었으며 심지어 남녀역할의 전도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 영화 과정이나 결말에서 사회 생활하는 여성을 탕녀로 몰거나 응징함으로써 가부장제의 회귀를 꿈꾸고 있거나 여전히 가부장제가 견고함을 말하고 있다. 2000년대 영화는 더 이상 이 땅에 가부장제가 존재할 수 없거나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통해 모계제로의 이행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영화가 대안이 거의 없다는 것이 한계이다. 사회의 문제점만을 부각시키되 대안이 없거나 그런 고민의 흔적이 전혀 없는 영화는 진정성에 타격을 받기 쉽다. 소재 거리가 좋은 가족이나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선정성이나 상업성의 전술로만 이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영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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