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사이버인간이란?
사이버펑크 소설 『뉴로맨서』 연구
Ⅰ. 서론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는 사이버펑크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 작품이며, 과학소설 분야의 최고 영예인 휴고상(Hugo Awards), 네뷸러상(Nebular Awards), 필립 K. 딕상(Philip K. dick Awards)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이다. 『뉴로맨서』는 ‘사이버페이스’(cyberspace)라는 개념이 처음 사용된 작품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진행된 이 작품에 대한 연구는 사회적, 문화적 관점에서 전개되었다. 토니 마이어는 『뉴로맨서』에 나타난 포스트모던 이미지를 분석하는 글에서 『뉴로맨서』가 제임슨이 설명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인 불평등과 다국적기업이 지배하는 사회구조에 주목한다. 그에게 있어서 『뉴로맨서』의 배경이 되는 사회는 다국적 기업들이 세계 경제와 문화 체계를 통제하고 상품의 끊임없는 소비가 사회 조직을 움직이는 추진력이 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사회의 가장 적합한 예가 된다.
마이어가 『뉴로맨서』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것에 비해 캐빈 로빈스는 『뉴로맨서』에 나타나는 윤리적 문제에 주목한다. 로빈스에 의하면 『뉴로맨서』에서 사이버스페이스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은 현실의 불완전성을 초월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유혹이다. 그녀에 따르면 사이버펑크 소설은 후기 구조주의 이론과 함께 오래 전부터 신뢰받았던 경계인 인간과 기계. 자아와 타자, 육체와 정신, 환상과 현실 등을 분해, 해체한다. 명확환 경계가 사라지면서 오로지 새로운 조합과 변화된 상태만이 강조된다. 그녀는 사이버스페이스가 제공하는 것이 ‘퇴행적 판타지’라고 설명하면서 과학 기술이 가져오는 비윤리적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에 나오는 배경과 용어는 오늘날 너무나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지만 사실 이 소설은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80년대 중반에 씌어진 소설이라는 점, 그리고 이 소설을 쓸 당시 깁슨이 PC를 전혀 다룰 줄 몰랐던 컴맹이었다는 점은 우리를 다소 놀라게 한다. 몇 해전에 개봉하여 인기를 누렸던 영화 매트릭스도 사실 이 소설을 근간으로 했으며, SF소설이나 SF영화를 떠나서 현재 우리는 인간복제시대(부분적이긴 하지만)에 살고 있으며 사이버 세상과 현실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공간에서 산지는 제법 되었다. 또한 인간과 같은 외형의 로봇과 인간처럼 생각하는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있다. 이런 변화가 과연 인간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해 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러한 변화가 우리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오고 있다는 점, 그래서 인간이 사이버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로봇과는 어떤 관계가 바람직한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30년 전에 이미 이런 변화를 예상이라도 한 듯 깁슨은 그의 소설에서 오늘과 같은, 또는 가까운 미래의 우리 세상을 펼쳐 보이고 있는데, 그의 소설을 통해 미래 우리의 삶을 반추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깁슨은 1948년 미국 사우스 케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물살 즈음이었던 1968년 월남전 징집을 거부하며 캐나다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깁슨은 캐나다 벤쿠버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변변한 직업이 없이 지내면서 독서와 습작에 몰두했다. 깁슨이 즐겨 읽은 것은 토마스 핀쳔이나 윌리엄 버로우즈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과 J.G. 발라드 같은 뉴웨이브 SF물이었다고 한다.
데뷔작은 1977년에 발표된 ‘홀로그램 장미의 파편’이라는 단편이었다. 그 뒤 단편들을 계속 내놓다가 1984년 첫 번째 장편소설 『뉴로맨서』를 출간했다. 바로 이 작품으로 깁슨은 SF문학가에서 여러 상을 석권하며 일약 혜성처럼 떠오르게 된다.
깁슨은 그 뒤 ‘카운트 제로’와 ‘모나리자 오버드라이브’로 이어지는 두 편의 장편을 더 발표해 이른바 ‘사이버 펑크 3부작’을 완성했다. 그리고 ‘버추얼라이트’, ‘아이도루’ 등의 장편을 냈다. 또한 사이버펑크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논객이 된 브루스 스털링과 공저로 ‘디퍼런스 엔진’이란 장편을 집필하기도 했다.
깁슨의 초기단편들에는 『뉴로멘서』와 같은 배경과 등장인물이 나오는 경우가 여럿 있다. 이 시기(1983년 이전)의 작품들은 ‘불타는 크롬’이란 제목의 작품집으로 묶여져 발간됐다. 이 책에는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코드명 J'원작인 ‘조니 니모닉’도 수록돼 있다.
*다국적 기업이 구축한 컴퓨터 정보통신망이 전세계를 뒤엎고 있는 가까운 미래사회, 전자공학과 신경 생리학의 결합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사람들은 신체의 일부를 변형시키거나 인공 기관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주인공 케이스는 자유자재로 정보 네트워크에 침투할 수 있는 유능한 해커다. 그는 ‘컴퓨터 카우보이’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지신의 고용주로부터 데이터를 훔쳐내려다 발각된 뒤, 몸 안의 신경계에 손상을 입은 채 쫓겨나고 만다. 사이버스페이스로 접속하려면 신경계를 통해 뇌에 전극을 연결해야 하는데, 이제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일본에서 약물에 취해 자포자기한 나날을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날 아미타지라는 정체불명의 의뢰인이 나타난다. 그는 신경을 회복시켜 줄 테니 대신 예전의 해킹 실력을 발휘해달라고 요청한다. 케이스는 그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신경회복 수술을 하면서 케이스의 몸 안에 시한장치가 내장된 독극물 주머니를 심어 놓는다. 정해진 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주머니가 녹아버리는 것이다. 케이스는 늦기 전에 해독제를 얻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일에 뛰어든다.
수수께끼의 의뢰인과 몰리라는 여성이 케이스의 파트너가 된다. 몰리는 두 눈에 특수렌즈를 꿰매 붙이고 손톱 아래에는 칼날을 봉합해 넣은 보디가드로서 냉혹한 청부살인업자이다. 또 한때 케이스의 스승이었던 전설적인 해커 딕시 플래트라인도 일행에 합류한다. 그는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만 존재하는 일종의 ‘전자유령’이다. 일행은 지구 상공에 떠있는 거대한 스페이스콜로니로 갔다가 경찰의 추격을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한편 그 와중에 케이스는 정체불명의 의뢰자의 배후에 다국적기업의 인공지능 컴퓨터인 윈터뮤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의 의뢰받은 일은 다름 아닌 윈터뮤트의 본거지로 침투하는 일이었다.
이후 스페이스콜로니와 북미대륙, 그밖에 세계 각처를 돌며 숨가쁜 침투와 해킹이 벌어진다. 케이스 일행은 서로의 감각기관과 신경망을 연결해 타인의 눈과 귀를 자신의 것처럼 활용하며 고도의 해킹 전술을 구사한다. 마침내 윈터뮤트의 중심부에 도달한 케이스, 그는 그곳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접하게 된다. 윈터뮤트를 접한 케이스는 윈터뮤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의아해 한다. 윈터뮤트는 일종의 정신적 인격체와 결합해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일이 끝난 뒤 다시 숙소로 돌아온 케이스는 어느 순간 숙소 단말기의 모니터에 윈터뮤트가 나타나더니 케이스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해준다. 이제 윈터뮤트는 모든 것의 전체이자 총합체인 매트릭스가 됐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윈터뮤트는 같은 동아리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다. 윈터뮤트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에 전파망원경으로 수신된 우주 신호의 일부는 켄타우르스 항성계의 외계 지성이 보낸 통신문이었다. 윈터뮤트는 이제 자신이 우주의 초월적인 존재 중의 하나가 됐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고, 케이스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Ⅱ. 본론
1. 『뉴로맨서』와 사이버펑크 문학
『뉴로맨서』는 사이버펑크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를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린 작품이면서 지금까지 최고의 사이버펑크 소설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다. ‘사이버펑크’라는 용어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에서 나온 ‘사이버’라는 단어와 대중음악 장르이면서 하나의 반문화 운동이던 ‘펑크’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어원적인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사이버펑크는 과학 기술과 여러 가지 문화가 융화되어 생겨난 것으로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작품명으로 쓰인 ‘뉴로맨서’라는 독특한 합성어는 작품에 등장하는 두 대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중 한대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 인공지능의 설명에 따르면 이 이름은 ‘신경’ 혹은 ‘은색의 길(silver path)’을 뜻하는 ‘neuro'와 ’죽은자를 소환하는 마법사‘인 ’necromancer'의 합성어이다. 하지만 비록 작가가 직접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이것이 제목으로 쓰인 이유로 ‘New-Romance', 즉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라는 의미의 동음이의어로 쓰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뉴로맨서』가 사이버펑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따라서 사이버펑크 문학은 장르와 작품을 넘어 포스트모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급진적인 문화운동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사이버펑크 작가들은 기존 과학 소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과학 소설을 위한 의견들을 교환하였다. 그들은 과학 소설이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인 ‘외삽법(extrapolation)’과 ‘뉴웨이브’의 실험정신을 결합하여 구시대의 과학 소설을 대체할 새로운 과학 소설을 창조하자고 주장한다. 그 결과 탄생한 새로운 과학 소설이 바로 사이버펑크 소설이다.
뉴웨이브는 과학 소설의 과학적 사실성을 우선시하는 기존의 과학 소설 기법을 거부하고 세련된 소설 기법의 도입을 주장하던 과학 소설 내에서 일어난 문학 운동이다. 뉴웨이브의 선두 주자는 고도의 상징성과 시각 이미지를 이용한 작품으로 잘 알려진 J.G. 발라드이다. 전통적 과학 소설이 우주 공간으로 대표되는 ‘외 우주(outer space)’를 지향했다면 발라드를 중심으로 하는 뉴웨이브 작가들은 인간의 내면에 펼쳐지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내 우주(inner space)’를 탐구한다. 사이버펑크는 이러한 뉴웨이브의 실험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사이버펑크에서 ‘사이버’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이버네틱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이버네틱스’는 정보현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기초하여 소통과 관리의 문제를 탐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학문분야이다. 이것은 소통과 관리가 인간의 근간이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정보의 소통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과 기계가 동일한 원리를 따른다는 점에서 구분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정보를 받고 그것에 대해 반응하여 정보를 내놓는다는 점에서 인간과 기계는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기계가 ‘정보처리기계’로서 동등하다고 파악하는 것으로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관한 혁신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사이버펑크는 이와 같이 인간과 기계가 동등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한다.
사이버펑크에 사이버네틱스나 뉴웨이브와 함께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펑크’라는 개념이다. 사이버펑크는 어떤 집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펑크 문화의 일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펑크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펑크음악이다. 이것은 1970년대 말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섹스피스톨즈(Sexpistols)에 의해 대중에게 전파되었다. 펑크 문화에 동화된 집단은 ‘펑크족’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1950년대의 ‘비트족’, 1960년대의 ‘히피족’과 같이 시대를 대표하는 반사회적 집단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비트족과 히피족이 물질문명과 산업 사회로부터 해방과 반전의 메시지를 표명한다면 펑크족은 현실 개선을 목표로 기성 사회의 가치관에 저항한다. 사이버펑크 소설에는 이와 같은 펑크 문화가 잘 나타나 있다. 사이버펑크 소설에는 일반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조직들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강압적인 정부기관이거나, 거대한 다국적 기업, 또는 사이비 종교집단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앞선 기술력으로 정보를 독점하고 일반인들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사이버펑크 소설에는 이러한 조직들에 맞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정보화, 기계화를 철저히 거부하고 원시적 삶을 살기도 하고 정보화, 기계화가 만들어내는 체계 내에 들어가 그 안에서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그 체제를 전복시키려고 시도한다. 사이버펑크 소설은 이러한 주변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뉴로맨서』가 후기 산업사회. 후기자본주의 사회 등으로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의 정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상의 미래사회에 투영하고 있을지언정, 일부 급진적인 사이버펑크 지지자들이 주장하듯 소위 저항문화로서의 구체적 형태 혹은 방법 등을 가르치는 ‘행동지침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뉴로맨서』가 사이버펑크를 통하여 저항문화의 실천적 행동을 읽고자 하는 지지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제공하였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뉴로맨서』에서 비롯하는 다양한 이론적 고찰들은 작품에서 등장하는 몇 가지 혁신적인 이미지들의 분석에 천착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뉴로맨서』에서 그려지는 미래사회와 그 첨단 기술들은 분명 현대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혹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편으로 그러한 미래의 기술 환경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또 다른 불합리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뉴로맨서』는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포스트휴먼 담론으로 대표되는 기술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을 보여주는 한편, 그러한 낙관적 기술론이 가리는 기술-자본 결합양상의 어두운 이면 또한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뉴로맨서』를 단순하게 저항문화의 첨병으로만 읽는 행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뉴로맨서』의 진정한 저항성은 미래의 첨단 기술 사회에 대한 막연한 낙관론이 가리는 불합리한 모순의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그러한 문제점이 후기 산업사회. 후기자본주의 사회로 점철되는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의 양상에서 비롯되었음을 냉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질적인 것들의 통합 가능성을 연구하면서 인간과 기계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가를 탐구한 작품이 바로 『뉴로맨서』라고 할 수 있다.
2. 『뉴로맨서』에 나타난 세계관
『뉴로맨서』에 나타난 세계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되고 있다. 하나는 『뉴로맨서』에 미래의 과학기술 시대를 암울하고 어둡게 보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나타나 있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그와 반대되는 환상적 세계관이 나타난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뉴로맨서』에서 깁슨은 양쪽을 다 말하고 싶어했고, 실제로 작품에도 양가적 의미가 함께 드러나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먼저 『뉴로맨서』의 세계관을 비교적 부정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글을 살펴보자.
『뉴로맨서』의 시대적 배경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미소 전쟁과 전염병이 세계를 휩쓴 후 유전공학 및 생체공학이 더욱 보편화 되었다는 점, 해킹의 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를 침투시키는 행위가 스크리밍 피스트 군사작전에 의해 최초로 시도되었다는 점은 결국 반휴머니즘적인 소재로 이해될 수 있는 사이보그 및 유전자 공학, 사이버스페이스, 컴퓨터 바이러스, 해킹 등의 출현과 발전이 전쟁 혹은 전염병과 같이 문명사회를 디스토피아로 이끈 재앙과 함께 맞물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뉴로맨서』에는 생명공학과 같은 첨단과학기술의 주도권이 미국 및 서구 유럽에서 아시아, 특히 일본으로 넘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컴퓨터의 여러 제품이 일본제라는 것, 자본회전의 방식이 신엔(New yen)이라는 일본 화폐가 통용된다는 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기술 발전의 역전 현상은 단지 경제 및 기술의 권력구조가 재편된 것의 의미가 아니라 고전적인 인식구조인 인간/기계, 자연물/인공물, 자아/타자 구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 예로 딕시 플래트라인와 같이 컴퓨터 메모리에 저장된 인격 구조물(ROM personality matrix)을 들 수 있다. 플래트라인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케이스와 능동적으로 대화하며 때로는 임무수행을 위한 충고를 주기도 한다는 점은 삶과 죽음의 경계 자체에 의구심을 갖게 만들며 또한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자연을 묘사함에 있어 그것을 자연의 색으로 묘사하지 않고 기계의 색체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현대의 독자로 하여금 자연/인공물의 경계에 대한 인식을 모호하게 만드는 사이버펑크 특유의 수사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묘사는 비단 하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치바시와 같이 첨단기술이 발전된 도시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밤하늘은 ‘독으로 오염된 은색’으로 표현되며, 빌딩 숲은 ‘계곡’에 비유되고 거리는 ‘네온불빛’, ‘홀로그램 광고’ 등의 인공적 색채로 가득하다.
지금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지만, 뉴로맨서에 나타나는 음식문화는 자연 상태의 야채나 육류가 아니다. 유전공학으로 조합된 음식을 먹으며 인공식품을 소비하고 있다. 이는 기술발전과 후기 산업사회가 진행된 미래 도시사회의 비인간적인 자연 환경의 면모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작품의 반휴머니즘적 성격을 극대화하는 요소는 도시 혹은 지역의 성격 분석에서부터 개성, 인격, 혹은 운명과 같은 개인의 삶의 영역에 이르는 전 분야에 걸쳐 모든 구성요소들이 정보량으로 번역되어 데이터의 형태로 생산, 저장 및 유통이 되며, 또한 그것이 대상 파악을 위한 실재적 근거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뉴로맨서』의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성질과 행동양상이 객관적인 ‘패턴’과 ‘프로필’로 분석이 되어 데이터 형태로 환원 된다.
이처럼 인공식품, 프로필, 데이터 교환빈도와 같은 기호들이 실재하는 자연물을 대체하고 데이터 혹은 그것의 시각적 형상화를 통하여 실제를 가늠하는 것이 일반화 된 『뉴로맨서』의 상황은, 보드리야르가 “실재의 사막”이라고 일컬었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양상을 극단적으로 형상화 시킨 것이다. 특히 “실재가 더 이상 과거의 실재가 아닐 때 근원적 신화와 사실성을 나타내는 기호들의 가격이 상승한다”는 그의 지적은 인공식품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자연식품이 고가로 유통되는 미래사회의 경제현실을 훌륭하게 설명한다. 또한 “오늘날의 시뮬라시옹은 과거처럼 영토 그리고 이미지나 지시하는 대상 또는 어떤 실체의 시뮬라시옹이 아니라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체, 즉 파생 실재의 모델을 가지고 산출하는 작업”이라고 지적한 그의 설명은 단지 데이터의 교환 빈도만을 가지고도 도시와 공업단지의 윤곽을 잡아내는 지도 프로그램의 원리를 규명해 낸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가상의 것들이 팽창함으로써 그 지배대상이 극대화된 『뉴로맨서』의 시대는 이 작품이 포스트모던 사회 현상에 대해 주목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좋은 예다. 여기서 포스트모던 사회 현상이란 과학기술의 발전, 특히 매스미디어 문화를 포괄하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문화 형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이버스페이스는 ‘시뮬라크르가 실재에 우선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양상을 SF의 형식을 빌려 공간적 개념으로 형상화시킨 가상의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재하는 지식을 양적 개념의 이미지 데이터로 전환한 정보공간인 사이버스페이스는 정보를 지배함으로써 권력을 갖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실현케 한 기술적 진보의 결과이다.
그러나 『뉴로맨서』에 나오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시공간을 낙관적으로 보는 분석도 있다. 우선 이 소설의 사이보그들은 에로틱하다. 이런 류의 다른 소설이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주인공 케이스와 몰리가 성적 오르가즘에 달하는 장면은 밤의 도시 치바의 어둡고 칙칙한 길거리와 대비되어 시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이보그들의 ‘육체’에 대한 모멸감은 성적인 사랑의 향수로 바뀐다. 이 소설에서 사랑의 행위가 가장 극적으로 제시되는 장면은 주인공 케이스가 자신의 첫사랑인 린다 리를 해변에서 만나 정사하는 장면으로 윈터뮤트와 뉴로맨서가 결합할 때 느끼는 감동보다 더 강렬하다. 가상 세계에서 해변의 정사를 그린 것은 깁슨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뒤집어 놓는 사건이라 하겠다. 그것은 거대한 기계가 범접할 수 없는 육체가 가져다주는 인간적인 교감지대이다. 이것은 금세기 초 근대 기계 문명과 현대의 조직 문화 속에서 시들어가는 인간성을 건강한 성의 해방을 통해 건강하게 회복하고 인류 문명을 생동감 있게 만들고 싶은 욕구라 하겠다.
‘사이버스페이스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는 모체라는 의미이다. 그 어원은 ‘자궁’, ‘어머니’이고 주로 남자들이 특권적으로 이 지역에 들어간다고 본다면 ‘여성의 지역’이다. 여성(자궁)은 모든 창조의 원천이며 생명의 원천이고 상상력의 원천인 것이다. 컴퓨터 운용자들은 키보드를 누르는 것을 여성의 몸체를 애무하는 것, 그리고 컴퓨터에 들어가는 행위(jacking in)를 성행위와 비유한다. 물론 깁슨의 관심은 이런 성적인 비유가 아니라 서로 대립되는 요소가 결합되는 데에 있다. 굳이 이분법을 사용하자면 남성적 원리(케이스, 카우보이ㅡ 정신)는 여성적 원리(몰리, 매트릭스, 육체)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또다른 것으로 앞서 언급한 윈터뮤트와 뉴로맨서의 결합이 있다. 스위스 베른과 연결된 윈터뮤트(이성, 행동, 남성)와 브라질의 리오와 연결된 뉴로맨서(감성, 수동, 여성)의 결합에서는 지리적 거리감이나 성별과 같은 차별의 이분법은 약화된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하나의 커다란 음양의 우주이며, 음양이라는 이분법은 조화를 이루고 통합을 이루어 ‘작업의 총합, 온전한 모습’을 만들어낸다.
이제까지 사이버스페이스의 세계관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정작 깁슨 자신은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태도에 있어 애매모호하다. 깁슨은 사이버스페이스를 “별들처럼 정보가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는 단색의 비공간이며 그 위에서 대기업 은하계와 군사 조직의 차가운 나선형의 무기들이 불타고 있는 곳”으로 묘사하였다. 이 공간은 ‘멋진 신세계(환락의 순간)’이면서 동시에 ‘어둠의 속(밤의 도시)’이다. 그의 태도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단순한 열광도 순진한 빈정거림이 아닌 좀더 성숙한 자세이다. 중립적, 객관적 태도는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아니라 지적, 이념적으로 정직한 태도가 될 수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의 가능성을 담담하게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삶이 사이버스페이스에 침윤될 것이라면 사이버스페이스는 결국 우리의 가능성이며 한계점을 지닌 인간의 존재의 아이러니이다. 아름다운 무지개는 사이버스페이스의 거대한 공허 속에 걸려 있지만 우리가 현실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안타까운 것이다. 선도 결국 악이 있음으로 해서 덕목이 되듯이 無(사이버스페이스)에 有(실제 세계)가 있고 다시 有 속에 無가 존재하는 역설이 성립된다. 바로 여기에 자연과 인간의 비밀이 있을 것이다. 단순히 사이버 세상이 온다, 오지 않는다는 논쟁에서 벗어나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마 또 다른 가상이요 허무요 꿈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 현실을 어떻게 활기 넘치고 화합하면서 인간과 인간 또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답을 제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버에서의 활동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오프라인으로 다시 동아리를 만들어 인간의 냄새를 맡으며 정을 쌓는 현재의 네티즌들의 모습을 보면 미래에 닥칠지도 모르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두려움을 지나치게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3. 『뉴로맨서』를 둘러싼 제 문제들
1) 현실과 가상
테크놀러지 체계는 상상적으로 인간들과 상호작용하거나 경험을 재창조해내며 욕망과 환영을 현실화할 수 있다. 개인의 욕망과 정체성의 의미와 기억이 가상적인 것으로 대체되고 상품으로 다시 팔려지는 과정을 통해, 자기자신을 이미지와 추상의 형태로 소비하는 이들이 거주하는 포스트모던 사막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많은 SF 텍스트들은 테크놀로지가 시간과 기억, 자기정체성,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을 변형시키는 충격적인 방식을 그린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실로 고대 그리스 이후 서구가 스스로를 바라봐왔던 동일성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재사유할 것을 명백하게 요청한다.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이해하는 바탕이었던 남성과 여성, 유기체와 비유기체, 인공물과 자연, 현실과 환상, 원본과 복사물,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의 구별 등 친숙한 대립적 범주들의 붕괴는 SF 영역에서 강박적으로 탐구되어 왔다. 기본적인 의미에서 그 작업은 동일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오늘날 ‘인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일한 것은 무엇이며 변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테크놀로지는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인간이 사이버스페이스(가상 세계)에서 겪는 경험은 마치 유아가 거울을 통해 겪는 경험과 같다. 유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이러한 경험은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적인 것이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적이고 정신질환적 방어는 탈근대적 주체성의 특징이며, 이는 환상을 통해 어머니의 가슴을 창조하는 어린이의 원초적 전능성으로 퇴행함으로써 자아로서의 자신의 지위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를 극복하려는 전략이다. 가상현실은 내적, 외적 세계관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내적, 외적 현실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판타지를 만든다. 사이버스페이스가 제공하는 판타지 속에서 인간은 어떤 상실이나 대가도 치르지 않고 전능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타지 속에 빠져 있는 것은 비사회적이며 비도덕적일 수 있다. 사이버스페이스가 제공하는 판타지 속에 갇힌 인간은 현실, 즉 상징계를 거부하게 되고 타자를 인정할 수 없다. 상징계로 진입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정신병의 전형적 증상이다. 즉 정신병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정신병적 공간에서 케이스는 현실과 가상, 그리고 소망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을 경험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탈육체화된 케이스는 결핍과 장애물이 없는 상태를 경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핍과 장애물이 없으면 욕망이 생기지 않고, 욕망이 생기지 않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케이스의 스승인 플래트라인은 이미 죽은 상태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만 존재하는 완전히 탈육체화된 존재이다. 그는 육체적으로 죽은 상태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살아있는 상태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 관한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보자면 플래트라인은 불완전한 육체의 삶에서 해방되어 영원하고 완전한 사리버스페이스의 삶을 즐기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지옥에서 영원히 죽지 못하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가장 큰 소원은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프래트라인이 “어이, 얼간이”하고 불렀을 때, 핀은 이미 여러 걸음을 가고 있었다. 핀이 멈춰서 반쯤 돌아섰다. “나는? 내 보수는?”하고 플래트라인이 묻자, 핀은 “네 몫을 받게 될거야.”라고 대답했다. 케이스는 트위드 모직 옷을 입은 그 야윈 등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 “그게 무슨 말이지?”라고 물었다. “나는 지워지고 싶어.”라고 그 구조물(플래트라인)이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기억하지?”(206)
깁슨은 『뉴로맨서』에서 사이버스페이스, 즉 가상현실이 불러일으키는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그리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해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이야기 한다. 케이스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여러 번 뇌사상태를 경험한다. 케이스는 이러한 뇌사 상태에서 인공지능인 뉴로맨서와 만나게 된다. 뉴로맨서는 케이스에게 사이버스페이스에 영원히 남으면 불멸성을 얻게 될 것이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케이스는 사이버스페이스밖에 두고 온 육체와 완전한 단절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사이버스페이스와 현실의 삶을 오가며 육체의 삶을 지속시킨다. 케이스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삶과 현실의 삶을 조화롭게 유지한다. 깁슨은 이와 같이 사이버스페이스가 제공하는 판타지에 붙잡혀서 현실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와 현실의 삶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2) 신체의 문제(정신과 육체)
『뉴로맨서』에서 기계는 인간화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신체를 떠나 자유롭게 정보의 바다를 떠돌던 케이스는 신체에 대해서 지독한 혐오감을 나타낸다. 그에게 있어서 현실의 신체는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하는 도구일 뿐이며, 실재세계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폐쇄된 공간이다. 단지 고깃덩어리인 신체를 멸시하는 케이스는 그의 손상된 신경을 치료해주는 대가로 또다시 해커로서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갑자기 공포감이 밀려들었다.(...)수술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언제까지나 이 고깃덩어리로 살아가야 된다면 (...) 이것이 모두 일종의 꿈이며, 가련한 망상이라면.......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다.(37)
케이스의 의식은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하면서 비로소 활발하게 기능하기 시작하고 무한의 공간을 움직이며, 케이스에게 새로운 정보와 자극을 끊임없이 공급해준다. 접속 상태의 케이스야말로 비로소 한 인간으로 기능하며 사이버스페이스와의 끊임없는 교감을 통해서 자신의 인식을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신체는 생리적 욕구로 가득 차 있으며 그가 정보를 수집하고 네트(net)에 접속하는데 있어서 불완전한 신체는 오히려 방해될 뿐이다. 그가 보여주는 신체에 대한 혐오는 마치 데카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정신이 신체와 완전하게 구분되고 신체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신체는 개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불필요한 존재처럼 보이게 한다.
육체의 문제는 딕시를 통해서도 제시된다. 딕시는 뇌만으로 존재하는 육체없는 인간이다. 케이스의 스승이기도 한 딕시는 윈터뮤트의 형제인 뉴로맨서의 방어망에 접근하려다 세 번이나 뇌사를 당하고서도 살아남은 ‘사이버스페이스의 죽지 않는 몸’이다. 멕코이 폴리(Mccoy Pauley)가 분명하지만, 이 사건 이후 뇌파제가 수평을 그렸다는 의미에서 ‘플래트라인’으로 불리게 된다. 육체는 죽은 채 구조물로 된 기록으로만 남은 것이다. 딕시는 자신의 구조물이 연결된 컴퓨터를 켜고 사용할 때에만 살아 있는, 배선이 필요한 ‘롬 인격 매트릭스’(ROM personality matrix)이다.
뇌만 남은 인간 딕시는 순수 지성의 극단을 상징하기도 한다. 지성만 남은 딕시를 통해 직접적으로 육체를 긍정한다. 자신의 육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딕시는 말한다.
“난 죽어 있어. 한참 동안 이 호사카 속에서 지내면서 그걸 깨달었어.”
“어떤 느낌이죠?”
“느낄 수 없어.”
“어디가 괴로우세요?”
“내가 괴로운 건 괴로운 데가 아무 데도 없다는 거야. 9...) 엄지 손가락이 동상에 걸려 잘라낸 동료가 있었지. 근데 그 친구가 몇 개월째 잠을 못 자는 거야. (...) 없어진 엄지가 가렵다 하더군. (...) 부탁이 있는데, 이 모험이 끝나면 이런 고약한 건 지워버려.”(105-106)
딕시는 말도 하고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움직일 수 있으며 다른 구조물에 기대어 지속적인 기억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불만족스럽고 심지어 참을 수 없다는 듯 딕시는 자신을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그럼으로써 딕시는 육체없는 삶이 공허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증명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불사성은 결코 불사성이 아니며, 육체의 부활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더욱 그는 인공지능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길 거부한다. 케이스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윈터뮤트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할 때, 유일하게 딕시만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말한다. “그(he)가 아니고 그것(it)이야.”(181)
신체, 즉 몸에 대하여 데카르트와는 다른 사고를 한 위대한 철학자가 있다. 니체가 몸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뉴로맨서』에 나타난 신체의 문제를 정리해보자.
니체는 인간의 몸은 자연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한다. 몸이란 생명이 관통하는 자연의 언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인간의 몸을 경멸하는 지금까지의 세계 부정적, 금욕주의적 가치관을 비판하며 차라투스트라를 생명의 옹호자로 표기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서는 사유를 해야 하는데 이를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정신뿐이며, 사유할 능력이 없는 신체는 일단 열등한 개념으로 취급받게 된다. 그러나 니체에 있어서 몸이란 이성과 무의식이 만나는 장소이자 의식과 본능이 접합되어 세계와 관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몸이란 큰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요, 전쟁과 평화이고, 짐승의 무리이자 목자다.” 인간의 몸이란 거대한 살아 있는 욕구가 서로 충돌하고 투쟁하는 장소이자 동시에 그러한 투쟁 가운데 다양한 힘들이 조직되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성장하는 마당이기도 하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총체적 충동의 생 또한 힘에의 의지라는 생명의 기호로 환원될 수 있다. 인간의 몸에는 무수한 욕망과 충동의 투쟁이 벌어지며, 무의미와 혼돈이 있고 동시에 창조적 신성함, 정열, 의미가 공존한다. 즉 인간은 몸을 통해 피조물(인간 속의 재료, 무의미, 혼돈)과 창조자가 일체화되는 자기 창조 가능성이 있고 조형 가능한 존재로 규정된다. 이에 반해 정신이란 작은 이성으로 큰 이성으로서의 몸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인간의 내적인 세계와 외적인 세계를 매개해주는 의식 작용, 즉 언어적, 개념적 인식의 기능을 담당한다. 즉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의 명제를 “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로 생명 있는 존재자를 근대적 자아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니체는 기존의 진리(인식 이론)와 도덕, 예술(미학)에 대한 해체 및 가치전도 작업을 통해 이성적 주체의 탈중심화, 즉 살아 있는 주체의 발견을 그의 철학적 중심 주제로 설정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몸, 즉 신체의 긍정성을 통해 이성과의 조화도 꾀하고, 또한 인간과 자연의 조화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신체가 활기 있게 건강해야 모든 것(삶이나 정신)이 의미가 있고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다.
니체에 따르면 『뉴로맨서』에 나오는 케이스는 진정한 의미의 생기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저자 깁슨은 딕시를 통해 신체 없는 정신, 그것도 컴퓨터에 접속할 때만이 기능하는 정신은 진정한 의미의 삶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듯 깁슨은 『뉴로맨서』에서 신체에 대한 생각을 데카르트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면서 동시에 니체적인 사고를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신체는 항상 외부조건들과의 소통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인 역사가 각인 되어있다. 이성 중심의 사고는 필연적으로 인간중심주의를 낳았고, 이것은 인간과 인간을 차등하는 잣대로, 인간과 동물 또는 자연을 차등하는 잣대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고가 인간 정신의 황폐화와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졌고, 이제 인간과 지구는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따라서 인간다운 삶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한 타자(자연 등)와 더불어 잘 살 때 진정한 의미의 삶이라고 한다면 『뉴로맨서』가 제시하는 신체의 물음을 통해 신체와 이성의 관계를 반추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존재론적 문제(인간과 비인간)
테크놀로지는 자본의 중심을 ‘산업’에서 ‘정보’로 이동시킨다. 생산력 발달에 발달에 따른 새로운 변화는 ‘정보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요약할 수 있다. 정보테크놀로지는 컴퓨터 기술과 통신망의 결합, 즉 비트(bit)와 네트(net)의 결합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뉴로맨서』에서 공상적인 형태로 최초의 모습을 드러낸 사이버스페이스는 이후 사이버네틱스와 시공간압축기술 그리고 극소전자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테크놀로지 발달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 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출발하는 가상현실 담론은 테크놀로지가 양산하는 미래 전망 가운데서 현재로서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후기구조주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 강변하는 주체의 해체를 철학적인 차원에서라기보다는 물리적인 차원에서 제기한다. 새로운 주체 양식과 동시에 그것의 통제가 발생하는 깁슨의 사이버스페이스는 정보테크놀로지가 제시하는 미래상에 대한 탁월한 묘사이자, 그 뒤에 감춴진 새로운 통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은유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보사회란 사이버네틱스의 통제의 원리를 가장 잘 구현하는 컴퓨터에 기반한 사회이다. 이제 컴퓨터는 대중사회를 관리하는 도구로서의 차원을 넘어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동요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사이버사회 혹은 정보화사회는 자유와 통제라는 양가적 의미를 내포한다. 물리적으로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그 경계의 모호함을 제기하며, 이는 위협적으로도 혹은 긍정적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다. 바로 인간과 비인간의 문제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주체는 상대론적으로 다변화하는 복합적인 좌표축들의 그물망 위에서 탈중심화된다. 주체의 문제는 『뉴로맨서』에서 흥미롭게 인간이 아니라 ‘윈터뮤트’와 ‘뉴로맨서’라는 AI(인공지능)에 의해 그려진다. AI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유령으로 표면적으로 삶과 젊음과 자본과 권력의 불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오용된 과학적 결과물을 상징한다. 윈터뮤트는 눈물나는 노력으로 또다른 쌍둥이 짝인 뉴로맨서와의 결합에 성공한다. 이것은 자신이 자기의 자아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고 한 때 적이었다. 윈터뮤트는 조직을 관리하고 의사결정하고 바깥 세계를 변화시키는 사이보그였고 뉴로맨서는 인격이 있고 영원성이 이는 사이보그였다. 그들은 인간의 속성인 주체성, 동기, 의도, 자율성 등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결합을 꿈꾸었다. 그 결과 윈터뮤트는 이제 컴퓨터와 연계된 정보와 통제라는 ‘존재의 대고리’를 벗어나 뉴로맨서와 만나게 된다. 기계들 속에서 다른 존재를 그리워하고 찾아나서는 의지와 욕망은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주인공 케이스는 윈터뮤트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다.
“나는 이제 윈터뮤트가 아니야”
“그럼 뭐요?”
“난 메트릭스야 케이스.”
케이스는 웃었다. “당신이 소속된 곳은?”
“아무 곳에도. 모든 곳에도. 나는 모든 것의 총합체, 나는 전체야.”
“그럼 당신은 무얼 하고 있소? 거기에 존재하기만 하는 거요?”
“같은 패거리하고 대화를 하지.(269-70)
케이스와 윈터뮤트의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는 깁슨이 생각하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하여 알게 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우리는 어떠한 곳이든지 갈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어떠한 곳으로도 우리를 데려갈 수 없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모든 것들의 총합이고 완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완전한 존재라고 말하는 윈터뮤트가 다른 존재를 찾고 그것들과 대화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기계인 윈터뮤트가 인간인 케이스와 다정히 대화를 나눈다.
『뉴로맨서』는 과학 기술로 인해 점점 약해져 가는 인간과 인간들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관계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대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서로간의 차이에 대한 인정이다. 깁슨은 윈터뮤트와 케이스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기계가 서로 인정하고 공존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는 케이스와 다른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인간들도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뉴로맨서』는 정보테크놀로지와 후기자본주의의 결합하는 현실과 관련해 타자와의 소통과 변화를 지향하는 자유로운 자아 개념을 새롭게 제시하는 한편 이것의 배후에서 야기될 수 있는 새로운 통제를 암시한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한갓 기계가 인간과 연속선 위에 놓이는 공간으로서, 인간 대 기계로 주어졌던 인식론적 이분법을 위반한다. 이제까지의 주체론들이 주체내부의 균열을 증명해 그 기반 자체의 허구성을 지적했다면 테크놀로지 시대의 그것은 대상을 ‘정보처리기계’라는 차원에서 기준을 달리해 봄으로써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구별을 넘어선다. 이것은 고정되고 견고한 자아라는 주체 개념이 종말하고 네트워크 상에서 자유롭게 유목하는 존재라는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하기도 한다. 즉 인간 아닌 것을 타자화시켜왔던 휴머니즘적 태도에 대해 정면으로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생명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같다.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곧 생명이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깁슨의 고민이 있는 것 같다. 이미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공간에서의 영원히 사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어려운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굳이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공간이 아니라도 사이보그는 이제 영화에서나 나오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다. 이미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 의수, 의족, 인공장기, 심장박동보조기와 같은 기계까지 몸에 이식하고 살아간다. 머지않은 날에 인간과 기계가 결합된 중간단계의 사이보그가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히 사는 인간(또는 기계)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이런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주체화하고 있는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감’ 또는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죽음’을 통해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밝힌다. 죽음은 인간이 무, 불안에서 해방되어 본래적인 인간 실존을 살아가게끔 하는 인간 자신의 회복을 의미한다. 죽음 자체도 삶의 한 과정임을 열어 밝힘으로써 본래적인 삶의 가능성을 자신에게서 불러일으키려는 하이데거의 의도 또한 인간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한 것이다.
또한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죽음과 삶을 말한다.
정오의 순간에 인간은 삶이 ‘하나의 깨어 있는 꿈’이라고 자각할 수 있으며, 삶 속에서 죽음을 앞서 맞이하여 향유할 때 진정한 의미의 삶의 명랑성을 회복하고 참된 삶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은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삶 속에서 죽음을 선취하여 받아들이고 이를 삶 속에 녹임으로써 진정한 삶의 의미와 삶의 명랑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죽음이 없는 영원히 사는 존재는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 된다. 『뉴로맨서』에서 비록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사이버스페이스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아닌 것의 영원성에 대해, 그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역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존재론적 물음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Ⅲ. 결론
문학은 변모 속에서도 전통이 끄는 구심력의 힘을 무시할 수 없으며 반대로 전통 역시 새로움이 추구하는 원심력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지점에 사이버소설이 존재한다. 따라서 사이버소설은 전통과 새로움의 매개 기능을 하기에 충분하다. 현재는 사이버소설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이런 개념조차 낯설었던 20여년전 사이버펑크 소설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다시피 하며 반향을 일으킨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에 대해 알아보았다.
사이버소설의 존재가 그러하듯 사이버펑크 소설인 『뉴로맨서』는 기존의 전통을 뒤엎는 데서 시작하며 그럼으로써 우리의 사고를 유연하게 하고 사이버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 사고의 끊임없는 팽창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뉴로맨서』가 단순히 기존의 전통을 무시하고 인간과 기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인간관에 대한 인식론. 존재론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앞으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기술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철학적 사유를 구체화하여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깁슨은 미래 사회를 어느 한쪽의 방향으로 몰고가지는 않는다. 미래 사회의 다양한 양상을 구현함에 있어, 그것에 대한 도덕적인 가치판단을 직접적으로 적용하기 보다는 그러한 기술적 진보의 시대에 인간과 기술이 상호작용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는데 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들이 혼돈과 불안 속에 살아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한편으로 인간의 인지능력과 행동능력의 영역을 넓히고 강화할 수 있는 첨단기술의 등장으로, 오히려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사회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뉴로맨서』는 인간과 기계의 조화로운 공존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것은 곧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회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듯 『뉴로맨서』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 존재를 인정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인식론적. 철학적 질문을 화려한 기계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공간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의식과 의지와 감정의 복합적 활동에 대한 개념적 종합일 따름이다. ‘나’라는 인식은 타인 및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나의 활동의 결과 또는 총체에 대한 개념적 기호일 뿐, 사실 그 어느 것도 참다운 나의 모습은 아니다. 이렇듯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존재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가 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의미가 비롯되기 때문에 ‘나’와 ‘타자’와의 공존 가능성은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길이 우선돼야 한다.
이런 관계를 『뉴로맨서』는 현실과 가상, 인간과 기계, 정신과 육체라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비록 배경은 미래의 가상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미래의 일, 뜬구름 잡는 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닌 것은 현재 우리의 삶이 비인간성의 정점에 있으며 정신적 황폐화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소설, 환상소설, 사이버소설이라는 경계를 넘나드는 『뉴로맨서』는 현재 인간의 삶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가?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 하는 존재론적 물음을 던져주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참고문헌>
*논문류*
1. 손명신, 「사이버펑크소설의 윤리성-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를 중심으로-」, 경희대학원 석사, 2003.2
2.박영미, 「환상문학의 정치성 연구」, 연세대 대학원석사, 2000.
3.위준호,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에 나타난 사이버펑크 문학 연구」, 연세대대학원 석사, 2004.
4.서정민,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 연구-신체와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중앙대학원 석사, 2002.
5. 박상준, 「인터넷 시대의 인간상 뉴로맨서」, 동아사이언스 과학동아, 2000년 3월호, 2000.
6. 정정호, 「사이버스페이스 소설의 미학과 정치학」, 인문학 연구 vol27, 1998.
7. 최병우 「사이버소설의 플롯 구조상의 특징」, 인문학 논총 제5집 제1호, 2005.
8. 조미숙, 「사이버소설의 미적 구조 연구」, 문학 한글 17, 2003.
* 도서류*
1. 김정현,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 책세상, 2006.1.
2. 한국 니이체학회, 『니이체연구』 제 2집, 이문출판사, 1996.9.
3.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 까치,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