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첫 덕질은 있다.

취향의 기록을 시작하는 덕후의 변

by LYMY

2020년, 올해로 기념비적인 스포츠 만화 슬램덩크가 30주년을 맞이했다.

발간과 동시에 이 전설을 즐겼던 이들은 나보다 다소 윗세대지만, 나는 운 좋게도 전설의 끄트머리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당시 SBS에서 슬램덩크를 수입 방영했는데, 이것이 내 인생 첫 덕질의 시작이었다.


지금과 달리 그때의 덕질은 환경이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천리안 같은 모뎀 인터넷을 사용해야 했고, 정보를 교환할 게시판도 미약하기 그지없었으며 일러스트 한 장 다운받는데 적잖은 시간과 데이터 비용을 지불해야만 했다.

실제로 나는 용감무쌍하게도 모뎀을 사용하는 동안 전화세가 무궁무진하게 나올 것을 무릅쓰고 부모님 눈을 피해 꽤 많은 일러스트를 다운 받았고, 이런저런 정보도 쓸어 담았다. 그중 대부분은 강백호의 원작 일본 이름이 사쿠라기 하나미치라는 둥, 그의 농구화가 조던이라는 둥의 당연한 것들이었다.


나는 교복도 입어보지 못한 어린애였다. 나이키는 들어봤어도 조던이 뭔지 포스가 뭔지 덩크가 뭔지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강백호의 검붉은 조던은 충분히 멋있어 보였다. 요즘 말로 힙해 보였다. 그 멋진 캐릭터를 좋아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슬램덩크 속 인싸 캐릭터를 좋아하면, 나도 그들처럼 멋져지는 것 같았다.


이 기묘한 허영심과 열정은 공책에 손수 슬램덩크 로고를 그려 표지를 만들고 캐릭터들의 원어명과(알지도 못하는 한자를 낑낑대며 적었던 기억이 난다) 넘버링 스펙, 좋아했던 대사 등등을 정성스레 적어놓고 신줏단지처럼 모시게끔 만들었다.

어디 그뿐이랴, 10대 중반의 아이에게는 버거웠을 당싯돈 2000엔(못해도 2만 5천 원은 했을 텐데, 학생에게는 장기 하나 내다 팔아야 할 정도로 큰돈으로 여겨졌었다)의 화보집을 용돈 모아 사고, 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하드커버 만화책 전질을 친언니에게 반 강제로 뜯어내기도 했다. 나름 유난한 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야말로 아련한 첫 덕질이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시간은 무사히 지나갔다.

어느덧 나이를 먹어 더 이상 슬램덩크의 캐릭터들을 염치없이 오빠라고 부를 수 없을 지경에 다다랐을 무렵 (멋있으면 다 오빠-는 시대 불문이지만, 그마저도 도저히 염치없었을 때 말이다) 나는 다른 창작물을 열렬히 좋아하고 있었고, 그렇게 열렬히 좋아하는 창작물은 때론 만화가 되기도, 영화가 되기도, 게임이 되기도 했다. 하물며 도서, 패션, 테크 브랜드까지 다양하게 확장되었다. 싫어하는 게 많아진 만큼, 추앙하는 것도 많아졌다. 접할 수 있는 컨텐츠의 폭이 넓어진 만큼, 관심의 깊이는 점차 얕아졌다.

물론 첫 덕질을 잊은 건 아니지만, 또한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2020년, 문득 올해로 슬램덩크 30주년이라는 사실을 접했다.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 맞다-정도의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갈 정도는 됐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서점에서 만난 슬램덩크 두 번째 화보집이 30주년을 기념해 나온 것인 듯했다. 인터넷으로 확인하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작가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30주년을 맞이해 새로 그린 그림을 포함한 화보집을 선보였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니까 두어 달 전,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잠시 들린 서점에서 슬램덩크 두 번째 화보집을 발견했다.

'어랏' 하고 반갑게 만지작 거렸지만, 선뜻 구매하기에는 애매한 가격대였다. 비싸지도 싸지도 않았다. 내 팔다리를 한 짝씩 내놔야 하는 가격이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구매하려고 했거나, 아예 덮어놓고 단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그냥 뭔가 애매했다. 교복을 바짝 줄여 입던 시절, 몇 달 용돈을 아끼고 일본 서적만 파는 희귀 서점을 멀리까지 찾아가 구매했던 첫 번째 화보집과는 영 다르게 맹숭한 소유욕. 그저 오늘은 짐이 많으니까 다음에- 같은 핑계로 미적대다가 결국 빈손으로 서점을 빠져나왔었다.


올해가 슬램덩크 30주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서점에서 지나친 그 화보집이 아른거렸다. 왠지 어린 덕질의 추억(?)이 훼손된 듯한 마음에 씁쓸해졌다. 그때는 참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좋아했는데. 당시는 지구를 뿌셔버린다던지, 아파트를 뽑아버린다던지 하는 표현은 없었지만, 당시 마음의 강도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었다. 지금은 동거묘를 봐야만 가뭄에 콩 나듯 나는 그 마음이 그때는 그렇게도 자연스러웠다. 뭐랄까 굉장히 활기 넘쳤달까.

따지고 보면 이건 비단 '슬램덩크'라는 만화 얘기가 아니다. 지금은 무언가를 특별히 좋아해서 '열렬히'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그때만큼의 열정은 아니라는 생각에 공연히 심술이 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자랑스럽게 (그리고 동시에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마음먹은 즉시 카드를 긁는 습관이다. 이 습관의 수혜를 입은 슬램덩크 두 번째 화보집은 친절한 쿠팡의 로켓 배송에 힘입어 다음날 도착했다. 새삼스러운 인쇄물의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 30년이 지난 지금도 촌스럽지 않은 10대 꼬맹이 농구선수들이 몹시도 반가웠다. 여전하구나 너희는. 내가 관짝에 누울 때까지 여전할 테지만, 어쨌든 여전하니 안심이다. 급작스레 감성이란 것이 터져버려 즉시 슬램덩크 만화책을 처음부터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몇십 번째 정주행이었을 거였다.


넓은 체육관 바닥에 비벼지는 밧슈 소리, 바스켓볼이 경쾌하게 튕기는 소리, 덩크에 백보드가 흔들거리는 소리 같은 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캐릭터들의 실없는 농담과 개그 포인트는 여전히 웃겼다. 이미 닳고 닳도록 봐서 달달 외우고 있을 정도지만, 긴장되는 한 골 승부처와 감동적인 명대사도 여전히 가슴을 웅장하게 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환갑을 맞이해도 영원히 오빠일 것 같았던 그 애들이 지금은 귀여운 10대 소년으로 보였다는 점 정도일까.


슬램덩크를 읽는 동안 참 오랜만에 신이 났다.

나도 카나가와현 어느 체육관에 앉아서 해남전의 종료 휘슬이 울릴 때 백호와 같이 울고 있었고, 윤대협과 서태웅의 1 on 1 대결에 입을 쩍 벌리는가 하면, 이미 승패를 알고 있어도 최강 산왕 공고와의 마지막 시합은 긴장되어 죽을 것 같았다.

아무리 내가 감정과잉이고 감성에 매우 약한 얼간이라고 해도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지금은 누구를 사랑한들 첫사랑의 설렘과 같을 수 없듯, 10대 꼬마가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왠지 그 비슷하게는 느껴졌다.


그래서 결심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둬야지, 지금 감성에 터져버린 얼간이의 주접을.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내 취향이 호! 극호!를 외쳤던 수많은 다른 것에 대해서도 적어봐야지.

시간이 흐를수록 느는 것이 변덕이라 얼마나 갈지, 어떻게 변해갈지는 모르지마는 그래도 한때는 눈을 반짝거리며 좋아하고 열광했던 것들에 대해서 적어봐야지 싶었다. 그것들이 바꾼 나에 대해서 적어보고 싶어 졌다.


그러니까 이건, 2020년 겨울을 앞둔 어느 날,

앞으로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난잡한 나의 취향과 덕질의 기록에 대한 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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