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 소녀들이 우리를 지켜주니까

악당들아, 정의의 이름으로 너넨 죽었다, 이제

by LYMY

내 격동의 유년시절이 90년대를 지나왔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90년대가 만화의 황금기라는데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두말하면 입 아픈 작품들이 참으로 많은데, 특히 소녀전사들이 활약하는 순정 활극의 활약은 아주 눈이 부셨다. 그중에서도 세일러문은 단연코 소녀전사물의 선두에 있는 작품이라 불릴만했다.


앞서 이야기했듯 당시의 나는 격동의 유년, 즉 초등학생의 치기 어린 나이였다. 왜 그랬는지 지금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여성스러운 것을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강박을 품었더랬다. 속으로는 사랑스러운 공주님이 환장하게 좋으면서도 겉으로는 무덤덤한 척했고 나아가 그것들이 유치하다고 여기는 척 굴었다. 그 연장선에서 또래 소녀들이 열광하던 세일러문은 나의 원픽이 되기에 다소 부족했던 셈이었다.


실제로 나는 비슷한 시기에 방영하던 슬램덩크에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있었기에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똥꼬 치마를 입은 소녀전사들을 진심으로 박해하지는 않았다. 되려 '만화'라는 컨텐츠를 무척 좋아하던 새싹 덕후로서 뭇 소녀들 못지않게 열광했었다. 그러나 왠지 여성스럽고 싶지 않았던 그 웃기는 허영 덕분에 그 마음은 꼭꼭 숨겨 두었다가 되려 20살이 지나고 나서야 잠재된 덕력이 터져 나왔다.


솔직한 말로, 어떤 사람이 풋풋하고 생기 넘치는 세일러복의 소녀를 마다하겠나. 또 소녀들이 변신할 때 사용하는 휘황찬란한 보석템은 어떻고? 여심을 한껏 자극하는 요망한 보석템들은 지금도 다양한 브랜드에서 화장품이나 액세서리 등으로 컬레버레이션 하고 있잖은가. 거기다 판매율도 몹시 높다. 여자라면 대체로 누구나(세상에 100퍼센트는 없으니, 대체로라는 단서를 붙여본다) 세일러문 굿즈와 화장품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왼쪽부터 목성의 주피터, 수성의 머큐리, 달의 세일러문, 금성의 비너스, 화성의 마스. 준주연들이 행성을 대표하는 데 반해 찐주연이 위성 대표인 건 지금도 의문이다.


가만 보면 이 만화는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가 제법 군데군데 분포되어 있다. 세대가 대물림될 정도로 방대한 볼륨 속에서 미성년자에게 보여주면 안 될 듯한 막장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름 심오한 세계관을 그리고 있다. 세상의 반의 반의 반도 모르던 꼬마들이 이 이야기를 보며 과연 뭔 소리인지 알아챘을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재미있고 정의롭다는 걸 모를 정도로 서사를 꼬아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기본 틀은 권성징악이며, 우리 편이 정의였다. 정의로운 소녀전사들은 신비로운 행성 이름을 가지고 훌륭한 작화에 힘입어 아름다움을 뽐냈고 끈끈한 우정도 과시했다. 그러니까 남녀노소 이 작품의 매력을 찾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 셈이다.


세일러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작가인 타케우치 나오코가 그의 반려자인 토가시 요시히로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덕심을 자극하는 포인트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는 끼리끼리라더니)


개인적으로 이 만화에서 놀랍고도 재미있던 점이라면, 기원이 타케토리 모노가타리라는 일본 구전동화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화에서조차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지 않은가. 거기다 오랫동안 이어왔던 구전동화에서 모티브를 얻어왔다, 라. 제법인걸. 덕분에 나도 새로운 판타지를 지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우리나라의 오랜 구전을 뒤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도 사족으로 덧붙여본다.


지구를 지켜준 어벤저스에게 감사하지만, 나아가 역시나 우주를 지켜주고 있는 이 소녀전사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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