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5세에 첫 해외여행
100세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반백살인 50은 여전히 ‘늦은 나이’로 취급된다.
50이라는 숫자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많은 가능성을 스스로 접어버린다.
1970년 생인 어머니는 1남 4녀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한 명 있긴 했지만, 그 시절 아들이 오죽 귀했으랴.
장남인 오빠는 온갖 서포트를 받으며 공부하였지만,
어머니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작은 몸으로 어린 동생들을 업고 다녀야 했다.
지금도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장난처럼 투정 부리는 에피소드가 있다.
달걀이 무척 귀하던 시절,
어느 날 어머니가 우연히 오빠의 도시락을 봤는데
딸들에게는 주지 않던 계란 프라이가 밥 밑에 깔려있었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서운했는지,
쉰이 넘은 지금도 간혹 할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신다.
어머니는 공부도 곧잘 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 수학을 잘해서 선생님들이 참 예뻐했단다.
그렇지만 역시나(?) 대학은 가지 못했다.
전형적인 서민 집안이었던 외가에서 오빠에 이어 엄마까지 대학을 보낼 여유는 없었다.
내가 학창 시절 내내 상위권을 유지했던 걸 보면 어머니 역시 유전적으로 뛰어났던 것 같다.
체육도 정말 잘했다고 한다.
뭐 하나 시키면 다 잘했다고 늘 말씀하시는데,
이는 누나와 나의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모든 어머니를 제쳐두고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이력만 봐도 허풍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뭐든 잘했던 어머니는 스물셋,
고졸 신분으로 첫 직장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주민등록상 나이가 두 살 어렸으니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셈이다.
그 이후 어머니의 인생은 순탄지 못했다.
회사원으로 노조에 가입하여 최선봉에 설 정도로 한 성격 했던 아버지는
회사의 강압적 조치에 분노해 자발적으로 회사를 나왔다.
누구나 하는 약속처럼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다며 청혼했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어머니는 옷가게를 시작했다.
이런 부분에선 팔랑귀인 아버지가 지인이 운영하는 걸 보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터라 장사를 할 줄도 모르는 자영업자가 망하는 건 당연했다.
결국 빚 하나 없이 자가에 살던 우리 집은 그때부터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원체 유복한 집안이 아니었던지라 빚까지 지니 가계부가 팍팍해졌다.
그럼에도 누나와 나에게 지원은 아끼지 않았어서
어릴 적 집이 부자가 아닌 건 알았지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으며 클 수 있었다.
특히, 누나보다는 공부를 잘했던 나에게 지원이 많았다.
재수 비용을 지원해 준 것도 그렇고 내가 이곳에 적었던 많은 여행지를
나는 스스로 마련하지 않고 모두 부모님에게 손 벌려 다녔다.
죄송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언젠가 내가 성공해서 갚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불편한 감정에서 해방시키며 나만을 위해 살다 보니
내가 취직했을 땐 벌써 어머니 연세가 55, 아버지는 60이 돼있었다.
나는 어느덧 나이가 들은 부모님에게 최고의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를 돌이켜 보니,
여행을 할 때 나는 가장 자유로웠고 살아있음을 느꼈었다.
내가 해외여행 이야기를 다녀와 이야기보따리를 풀면서 꼭 한 번 가보라 하면,
돈이 어딨 어서 그런데를 가냐고 하는 두 분이었다.
사실 아들이 부모님이 지원해 준 돈을 아끼며 여행 다니는 걸 보면,
그렇게 큰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아심에도 항상 시간과 돈을 핑계로 거부했다.
"첫 취직 했으니까 여름휴가로 해외여행 가자!"
어머니는 좋아하시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여러 이유를 핑계로 거절했다.
하지만, 같이 산 세월이 언 30년인데 속마음을 모를 수 있을까.
딱 봐도 이제 막 사회생활 시작한 아들의 피 같은 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이번에 안 가면 절대 안 데려가!"
나는 으름장으로 맞불을 놓았고 어머니는 못 이기는 척 수락하셨다.
아버지도 같이 가려 했지만, 직장문제로 함께하지 못했다.
나도 경제적인 면을 아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지라
여러 여행 후보지 중에 내가 가본 적 없으면서도 가장 싼 여행지를 골랐다.
그렇게 고른 곳이 후쿠오카, 한 여름에 후쿠오카로 여행을 갔다.
물론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닌지라 무조건적으로 아낄 수는 없었다.
근교 여행지로 방문하는 유후인에서는 료칸에 묵으면서 가이세키도 예약하였다.
난생처음 일본으로 떠나는 어머니는 여행 내내 들떠있었다.
더운 걸 알았음에도 상상 이상으로 더운 날씨에 나는 어머니의 눈치를 계속 보았지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신날 때 나오는 특유의 콧소리를 계속 내었다.
자유여행이지만 어머니와 같이 가는 여행이라 최대한 적게 걸으려 했다.
그러나 하카타 백화점에 들를 일이 많아 전철도 타지 못하고 걷는 일이 많았는데,
나중에 보니 편한 신발을 신고 온 어머니 발에 물집이 크게 잡혀있었다.
아들이 준비한 일정이라 아픈 내색 않고 묵묵히 걸은 것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왜 그때 아픈 거 얘기하지 않았냐 하니
아들이 준비한 일정이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처음 겪는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재밌었다고 한다.
특히 유후인에서 묵으면서 본 경치와 료칸, 가이세키를 많이 이야기했는데
여행 후 일본 칭찬을 그렇게 하던 어머니는 다음 해 삿포로로 다시 일본을 찾았다.
우리 가족 중에 유일하게 도전적인 내가 어머니에게 늦지 않았으니 다양한 걸 해보라 하면
어머니는 언제나 이 나이에 뭘 그런 걸 하냐면서 등을 돌리셨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마음 한편에 늘 품고 계셨지만,
오랜 세월 몸에 밴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
그런 어머니가 반백 살이 넘어 처음 떠난 해외여행에 완전히 매료되셨다.
이제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오히려 나보다 먼저 여행 계획을 세우신다.
급기야 아버지까지 끌어들여 내년 3월,
우리는 가족 모두가 처음으로 함께 대만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처음 '외국에 혼자 떨어지면 벌어지는 일' 브런치북을 연재 시작할 때는
나의 이야기로 많은 분들이 처음 하는 일에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뛰어들길 바랐다.
하지만, 나의 형편없는 글솜씨 때문인지 나의 바람이 널리 퍼지진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내 첫 브런치 북의 마지막은 누구보다 보수적이었던 어머니의 첫 일탈(?)인
여행 이야기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음식도 직접 먹어봐야 내 취향인지 알 수 있듯이,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조금 더 많은 경험을 해보며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