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도피 독일 유학생이 정착을 꿈꾸기까지의 일대기
아, 유럽.
고즈넉한 길거리와 오래된 교회가 들려주는 종소리.
가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장소에 향수를 느끼게 만드는 단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난 그저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무엇에 홀린 듯 독일행을 준비하던 내 머릿속엔 사실 뚜렷한 목표 같은 건 없었다.
기대 그리고 환상.
새로운 환경이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주리라고 생각했나 보다.
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맞긴 하다.
내 여권의 색깔도 달라졌고, 애 아빠걸 자랑하듯 튀어나온 배는
존재하지 않던 나의 '잘 나가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니 말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냐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이것저것 여러 추억들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할 것이다.
즉각 "당연히 우리 딸이 태어난 순간이지!"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아빠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반대의 질문에는 정말 빠르게 대답할 수 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하교 후 학원에 등원하기 전 아무도 없는 집
오후 세시 반, 천장에 새겨진 벽지의 문양들을 세면서
집으로 가면서 신나게 흔들어 댄 실내화 가방이 무색할 만큼 나는 항상 가라앉아 있었다.
삼십 분 뒤면 자전거를 타고 단과과외를 받으러 가야 하고
그 뒤에는 내가 바라지도 않던 클래식 기타를 배우러 가야 했던 나날들.
내가 하고 싶은 건 게임뿐. 사실, 그 외의 것을 해 볼 기회조차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학원을 가기 싫은 것도 나쁜 것이고, 방학 때 놀기만 하는 것도 나쁜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난 판검사가 돼야 한다고. 할머니는 매주 나를 위해 기도하신단다.
나를 위해서? 아니면 판검사가 나온 대단한 가족이 되길 원해서?
그 야심 찬 프로젝트는 이내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번째 적색신호를 보내왔다.
그렇게 똑똑하다던 아들, 손주가 겨우 반에서 15등이라니. 42명 중에 15등.
나는 혼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당당하게 시험 성적이 적힌 꼬리표를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중학교 첫여름 방학이 다가왔고, 난 강제로 필리핀 어학연수에 보내졌다.
당연, 친구들과 계획했던 계곡 여행이나 같이 영화를 보러 간다거나 하던 계획들은
내 아버지에겐 알바 아닌 시답잖은 계획들일 뿐이었다.
나는 분노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공포심이 더 컸기에.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내 여름방학은 박탈당했다.
하지만 또 웃긴 건, 제법 필리핀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다.
그때는 왜 좋았는지도 몰랐었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아버지의 통제가 없는 자유로운 삶이 참 쾌적하다는 걸.
처음 몸으로 느껴봤던 게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중학교 3학년.
부모님이 이혼이 슬픈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에 그 어떤 자식도 나보다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기뻤다.
살면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싫다"라고 말했고, 이에 카타르시스 마저 느꼈다.
당연히, 나는 엄마를 따라갔다.
그때부터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에 갈 때까지
아버지와 일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입영일이 점점 목전으로 다가오고
만에 하나 뭔가 잘못되어 내가 죽는다는 가정에 다다랐을 때
마음속, 혈연관계라는 일말의 미련 때문에
아버지에게 한 번 전화를 걸었다.
그게 날 독일로 이끌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어렸을 적, 나는 소심한 아이였다.
운이 좋게도, 초등학생 때 사귀어둔 동네 친구들이 전부 좋은 녀석들이라
그 뒤로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딱히 친구를 더 사귈 필요도 없었다.
숫기라곤 하나도 없고 여자아이들에겐 말도 한 번 붙이지 못하는 그런 아이였다.
학교 생활기록부엔 "소극적" 이라거나, "소심한" 따위의 표현을
선생님이 애써 친절하게 풀어쓴 문장들의 나열로 가득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런 줄 알았다.
그랬던 나를 바꿔놓은 건 게임, 엄마, 그리고 대학이다.
중학생 때부터 틈틈이 즐겨왔던 게임을 통해서
중고등학교에서도 만들기 힘들었던 진짜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게임 속 집단에 큰 소속감을 느꼈고, 서로 일상을 공유했으며,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다.
항상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었다.
엄마는 학교가 끝나면 게임에 매몰되어 있는 나에게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엄마랑 같이 온라인 게임을 즐기면서 관계가 더더욱 돈독해졌다.
이모와 그 아들, 거진 나의 친형제나 진배없는 사촌동생도 같이 게임을 즐기곤 했다.
우정도 사랑도 가족도, 게임이 없었다면 난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배울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학을 시각 디자인과로 진학한 게 계기였던 거 같다.
남자라곤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귀한 우리 과에서
그냥 매일매일 지내다 보니 딱히 여자애들과 이야기하는 게 긴장되거나 하는 일은 없어졌다.
종종 과제 관련해서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익숙해졌고,
사실 내 소심함은 후천적인 요인이 더 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아버지 앞에선 난 항상 틀려먹은 놈이었으니.
어김없이 나에게도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한편으로 두려워하던 군대가
마침내 내 손에 잡히는 형태로 우편함에 무심하게 들어있었다.
난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
새벽에 우리 생활관 우측 계단 쓰레기통 근처에서 목을 매달았던 전우도 있었다.
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름 열심히 일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웃긴 건, 나름 그 생활에서 즐거움과 충실함을 느꼈었다는 점이었고,
그토록 떠나고 싶던 부대를 나서자마자,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장소에 애틋한 감정마저 느꼈다.
군대에서 다들 하는 말들이 있다. "난 전역하면... 을 할 거야."
누군가에겐 진실된 목표였고,
나 같은 누군가에겐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보이기 위한 자기 최면에 가까운 말.
그렇게 나는 독일 유학을 목표한다고 수도 없이 설명했고,
두루뭉술하게 내뱉던 말들은 어느샌가 강박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렇게 전역 및 복학과 함께, 독일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군대에 들어가기 전, 난 연락을 끊었던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다.
혹여나 군대에서 죽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친자식, 최소한의 소식은 전하고 입대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독해보이던 사람도 제법 유해졌구나.
라는 착각을 했다.
아버지가 뒤에서 엄마를 어떻게 설득을 했는지 진실은 모른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아버지에게 가는 것이 엄마에게 경제적으로 덜 부담일 것이라고.
난 내심 서러웠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고
유학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거처를 아버지댁으로 옮겼다.
결과적으로 지금 내가 독일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 사건 덕이지만,
사실 그대로 엄마와 한국에서 살았다면 그것 역시 행복한 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독일 유학의 아이디어 자체도 아버지 작품이었고,
추측이지만 아버지가 내 꿈을 빌미로 우리 엄마에게 죄책감을 주며 압박한 것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그렇게 자의 같은 타의 혹은 강박으로 독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빨라졌고,
정리하지 못한 큰 문제가 날 점점 불안하게 만들던 나날이 이어졌다.
나의 첫 연애는 여러 면에서 평범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온라인으로 사람을 만나 사귀는 것이 평범했지만,
스마트폰도 SNS도 없던 그 당시엔 상당히 희귀하고 이상한 일로 여겨졌었다.
난 한 온라인 게임에서 처음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와 학창 시절 5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고, 매일매일 게임 속에서 일상을 공유하며 연인으로 지냈다.
그녀는 동갑이지만 연상 같은 사람이었다.
생각이 깊고, 글도 잘 쓰며, 여러모로 그녀 옆에선 항상 배울 게 많았다.
마침내 수능이 끝난 겨울. 우리는 처음으로 만났다.
매일매일 지하철 종점 첫차에 몸을 맡기고 다른 노선의 종점까지.. 두 시간여를 달려 하루 종일 같이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그렇게 좋았었다.
흔하디 흔한 이유로 이별을 하고, 다른 사람과 사귀고,
군대에 들어가기 몇 달인가 전에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재수 좋게도, 그녀가 사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 군 복무를 하게 되었고
남들이 다 위기라던 군생활도 큰 위기 없이 지나갔다.
다만, 난 독일에서 뭐라도 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그래서 헤어지려는 시도도 했었다. 그녀가 반대했다.
그저 멀리 간다고 해서, 단지 그런 이유로 일어나지도 않은 이별을 미리 당겨올 이유가 없다는 것.
내가 정말로 무얼 하고 싶은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녀를 두고 독일로 떠났다.
2014년 1월 4일.
인천공항에서 수하물 무게가 초과되어 급하게 화물박스에 구겨 넣은 박스 두 개와 캐리어 하나.
미리 준비한 심카드는 작동하질 않고
한 번 와 봤던 공항인데도 길은 마치 초행인듯한 기분.
알고 보니 지난번과 내린 터미널이 달랐더랬다.
카트도 없이 그 짐들을 끌고서 정류장까지 제법 땀을 많이 흘렸다.
열차는 다행스럽게 제시간에 출발해서 목적지인 뒤셀도르프에도 정확하게 도착했다.
만약, 독일 열차의 악명을 알고 계신 독자분이 계신다면, 내가 이걸 언급하는 이유를 잘 아실 것이다.
사실, 몇 개월 전에 독일에 와서 한 달 동안 어학코스를 방문했었다.
여름의 독일은 참 좋다. 탁 트인 하늘, 밤 아홉 시는 되어야 떨어지는 해.
덥다가도 그늘 아래 가면 금세 땀이 마르고,
이곳저곳 맥주를 들고 다니며 여유로운 한 때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라인강변.
평생 마주친 적 없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친구들과의 경험들.
사실, 그 몇 개월동안 독일이 너무너무 그리웠었다.
당시 홈스테이로 묶었던 클라우스 할아버지 댁에 다시 장기투숙 하기로 했기에,
공항에 마중 나온 아버지의 지인분의 도움을 받아 짐을 차에 싣고 이동했다.
아버지는 독일 뒤셀도르프에 연이 있으셨다.
당시 사업 아이템을 찾아내기 위해 유럽에서 발품을 팔다 수소문 끝에 도착하셨던 곳이 이곳이라고.
현지 한인 식당 주인의 중계로 만나게 된 이 지인분과 좋은 사업 파트너 관계가 되셨다고 한다.
때문에, 나는 도시를 정하는데 큰 고민이 없었다.
난 아버지 덕을 참 많이 봤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다.
그럼에도 내가 아버지와 연을 끊게 된 것은, 조금은 더 먼 훗날의 일이다.
이 글이 계속 이어진다면, 분명 그 전말을 소개할 기회가 올 것이다.
어찌 되었든 독일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C1 등급의 자격증을 취득해야 했으니,
최소 일 년에서 길면 이 년 동안은 이곳에서 지내게 될 터였다.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와이파이를 연결하자 이런저런 알림들이 쏟아졌다.
잘 도착했다는 카톡을 여기저기 돌린다.
늦은 밤인 독일에서 이제 아침을 맞이하는 한국으로.
몽실몽실한 겨울 침구 위에 누운 기분은 최고로 설레었다.
다시 독일에 왔다.
그리고, 내 인생의 다음 장을 시작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곧장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