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심야토론(2010. 7. 24)
학교체벌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훈육을 위한 사랑의 매인가? 감정의 발산을 위한 폭력인가? 이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매우 다를 수 있다. 교사와 학생의 생각도 다를 수 있다. 직접적인 가해자이며 피해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이 학교체벌이 사랑인가 폭력 인가 하는 논쟁을 떠나서 왜 이런 체벌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까 하는 원인부터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체벌이 필요한 이유는 교사의 훈육과 통제를 위한 방편인 경우가 많다. 한 명의 교사가 수십 명의 학생을 상대로 지도를 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변수가 발생하고, 이를 제지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공동체생활을 하는 학교 고유의 문화에서 기인한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물을 흐린다'는 속담이 있다. 한두 명으로 인하여 학습분위기가 저해되고, 여러 학생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그것은 교사의 직권으로 통제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말보다는 체벌이 훨씬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학업능력의 향상의 경우에는 이와는 문제가 다르다. 단순히 체벌로 인해 실력이 향상되지 않음을 물론이려니와 자기 학습주도권이 있는 학생에게 공부를 강제하는 비민주적인 행위로 비칠 수 있는 소지가 많다. 물론 지난 학창 시절의 경우를 되짚어보자면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도 많이 달라졌고, 교권도 이 전만 치는 못하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체벌은 폭력으로 비화되기도 하고, 체벌이 필요한 상황조차도 방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은 아쉬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체벌과 방임의 완충지대는 존재하지 않을까? 학교마다 실정은 다르겠지만 그린카드나 벌점카드 도입 등으로 이를 대체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제도만으로는 학교에서 양산되는 문제들을 다 수용할 수 없다.
서울시교육청에서는 학교체벌금지에 대한 지침을 하달했다. 어떤 경우라도 체벌은 비민주적인 폭력이라는 인식이 표출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이 완전할 수는 없다. 체벌에 대한 주도권이 사라진 교사는 학생 입장에서는 허수아비에 불과할 수도 있다. 물론 소수 학생의 견해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교권의 추락이 심화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무차별한 폭력과 감정적인 대응의 일환으로 발생한 체벌은 말 그대로 폭력일 뿐이다. 하지만 교권의 추락을 방지하고, 최소한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체벌은 제한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다. 무분별한 체벌의 남용은 오히려 교권을 추락시키고, 스승으로서 신뢰감도 얻을 수 없기에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아울러 폭력교사로 퇴출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부작용에 대한 대책마련에 절치부심할 필요도 없다. 교사의 체벌권은 어떻게 보면 상징적인 의미다. 일선 학교의 본부 격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청이 그런 체벌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고, 교사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훈육의 일환으로 체벌을 행사한다면 학생들도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기 어렵고, 수시로 발생하고 있는 학생들의 하극상도 줄어들 것이다. 학교는 학습의 장이기도 하지만 인성을 기르는 교육장이기도 하다. 스탠리 홀이 말한 것처럼 학생시절은 질풍노도의 시기이다. 아직 완전한 인격형성이 덜 된 만큼 인격도야에 힘쓸 시기이기도 하다. 이럴 때 그것을 바라 잡아줄 수 있는 것은 교사 이외에는 없다.
영화 <미스터 소크라테스>에서도 방황할 때 따끔한 매를 칠 스승만 있었더라면 이런 인생을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훈육교관의 넋두리가 나온다. 시대가 바뀌기는 했지만 아직 교사는 우리 사회에서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로 인식된다. 학생들의 인식이 이전만은 못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형성해 나가야 하는 것 또한 교사의 몫이자 교육을 이끌고 있는 정책입안자들의 몫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교사상에 대한 정립을 통하여 더 이상 교사가 단순한 직업인에 머무르지 않고, 학생들의 인격을 도야시키고, 학습을 향상할 수 있는 진정한 스승으로 거듭날 때 교육도 변화하는 시대의 패러다임을 좇아갈 수 있는 것이다. 민주적인 사회에서 체벌은 어찌 보면 야만적이고, 비민주적인 행위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무체벌을 강조하다 보면 교사는 사실상 학생들을 방임할 수밖에 없다. 이는 직무유기로 이어져 또 다른 폐해를 낳을 수 있으며, 학생들은 오히려 교사에 대한 신뢰가 더욱 떨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에 매를 댄 선생님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매는 사랑의 매였고, 관심의 매였다. 일부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자거나 잡담하는 것을 방치하고 혼자만 수업을 하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교사로서의 직분을 다하기보다는 학생에 대한 무관심과 방임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매를 든다는 것은 관심의 표현일 수가 있다. 가뜩이나 통신매체가 발달하고, 인터넷이 실생활로 자리 잡은 마당에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 매를 들지 않은 경우도 많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소신껏 매를 드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은 진정한 스승의 길을 가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학교체벌이라는 것이 사랑이냐, 폭력이냐 하는 것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인성적인 교육을 추구하는 학교에서 체벌로 인해 폭력을 답습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올 수 있다. 체벌을 하면서 감정적인 부분이 전혀 배제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한적인 체벌에 대한 방향으로 의견의 가닥을 잡은 이유는 체벌이 단순한 폭력의 개념이 아닌 주위를 환기시키고, 올바른 인성교육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임을 알기 때문이다. 제한적인 체벌을 허용한다고 해서 이전처럼 무분별한 체벌은 현 상황에서도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섣불리 체벌무위론으로 전면적인 체벌을 금지하기보다는 교육의 일환으로서 부분적으로 체벌을 허용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진정한 교육은 인성을 키우는 데 있다. 스승으로서 제자들이 잘못 가고 있는 길을 채근할 아무런 도구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들은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고, 방관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스승의 길을 가려는 대부분의 교사들에게 소수 교사의 폭력행위를 덮어 씌우려는 구실로 체벌의 부당함을 합리화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