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영우 / 사월의책

by 정작가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고찰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핵가족의 사회를 넘어 1인 가구가 보편화되어 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회 저변에 확대되는 이런 현상은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무너뜨리고, 점차 개인화되고 슬림화되어가는 프리즘 속에 우리를 가둔다. 이런 사회적인 변화에 주목하며 자칭 ‘싱글남 사회학자’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노명우 교수는 우리에게 낯선 주제이긴 하지만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문제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저자는 프롤로그, ‘혼자 사는 사람들의 자서전’에서 화려한 싱글도 행복한 결혼도 없다고 단언한다. 이런 단정의 근저에는 다양한 형태의 삶에 대한 과정적인 상황은 고려치 않고, 그저 표면적인 모습에 반응하는 이분법적인 판단의 오류를 직시하라는 저자의 충고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과연 혼자 살기의 통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저자가 주장하는 다섯 가지 통념은 다음과 같다.


- 1인 가구의 증가는 결혼을 늦추고 있는 젊은 세대의 증가 때문이다.

-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야말로 역시 1인 가구 증가의 주범이다.

- 1인 가구는 가족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 결혼을 하면 혼자 살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 혼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련되고 능력도 있는 화려한 싱글이다.


이 통념들을 살펴보면 수긍할만한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이것은 물론 생각하는 이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그렇더라도 보편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통념은 그리 억지스러운 것은 아니다. 단지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1인 가구 증가의 주범이 이런 통념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원인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저자는 우선 ‘우리만 있고 나는 없었던 시대’에서 ‘개인의 탄생’으로 일컬어지는 시대의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과연 ‘혼자 살면 반사회적일까?’하는 의문을 던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저자가 주창하는 이론은 소위 ‘테이블 이론’이다. 1인용 테이블과 4인용 테이블의 토폴로지는 과연 어떤 식으로 변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다. 한 가지를 얻게 되면 한 가지를 잃게 되는. 이를 테면 자유를 택할 것이냐 안정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것처럼 말이다. 보기에는 별로 대수로울 것 같지 않은 1인용 테이블과 4인용 테이블의 간극은 그야말로 ‘통과하기 쉽지 않은 절차’를 통해 카멜레온처럼 변신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게 된다. 그 절차는 바로 결혼이다.


이를테면, 이런 결혼이라는 절차에 의해 갈리는 운명의 행보는 그런 가치를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 1인용 테이블로 회귀하는 인간에게 더욱 가혹한 징벌의 세레나데를 들려주기 마련이다. 오히려 안식과 위로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고 있는 <섹스 앤 더 시티>나 <신사의 품격>에서 나오는 주인공처럼 과연 화려한 싱글이라는 신화는 존재하는 것일까?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그저 ‘화려한 싱글이라는 판타스마고리아, 즉 미디어가 창조한 상상력의 인물에 불과하다고.


‘고독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장에 들어서면 저자의 고독예찬론은 ‘역할이라는 가면을 쓴 인간’, ‘타자지향형 인간’이라는 유형의 인간형을 직조해 내고, ‘의도된 고독의 길을 걸었기에 족적을 남긴 사람들’로 그 범위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데카르트, 뉴턴, 로크, 파스칼, 스피노자, 칸트, 라이프니츠, 쇼펜하우어 등이 그들이라고 할지라도 과연 고독하면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 이건 좀 비약이 지나치다 싶은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역설적으로 조금만 더 그런 사례가 없을까 하고 궁구 하고픈 열망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인물로 저자는 루소와 톨스토이를 꼽는다.


루소는 《에밀》과 《사회계약론》이라는 두 명저를 발간하면서 도리어 사회에서 소외된 채, 말년에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라는 책을 채 완성하지도 못하고 떠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렇더라도 루소는 그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록하고 있다. 톨스토이 또한 가족을 떠나 성공한 작가가 주는 사회적인 열망을 뒤로한 채 자아의 관계밀도를 쌓는 극한의 선택인 고독을 택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비록 이런 위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고독을 택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이 선택한 길이 무모하다거나 허무한 길이었다고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동의해야 할 것이다.


홀로 선다는 것은 히키고모리족처럼 자발적인 고립을 자초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한 담론 또한 이런 식의 고립됨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 다양한 삶의 양태처럼 다양한 방식의 홀로 서기는 오히려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저자가 소개한 부국(富國)인 스웨덴의 사례는 차치하더라도 특히, ‘개인들의 연대’, ‘개인과 개인이 만드는 네트워크’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할 것이 분명하다.


끝으로, 저자가 인용한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를 재인용하는 것으로 다소 억지스러운 논고를 끝낼까 한다.


혼자 있는 능력은 귀중한 자원이다. 혼자 있을 때 사람들은 내면 가장 깊은 곳의 느낌과 접촉하고, 상실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정리하고 태도를 바꾼다.

- 앤서니 스토(2011) 『고독의 위로』, 책 읽는 수요일,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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