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이나리

by 정작가


<오른쪽>에 나오는 주인공은 그저 막연히 오른손잡이가 많다는 이유로 왼손잡이의 아들을 자꾸만 교정시키기 위해 행했던 폭력으로 인해 나이가 들어선 된서리를 맞는다. 얌전하던 아들이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요즘엔 영화건 소설이건 자극적인 주제가 많다. 워낙 사람들이 웬만한 자극에는 반응도 하지 않다 보니 갈수록 그 도가 심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이 소설도 그런 느낌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소설의 내용 또한 선혈이 낭자한 시체를 추슬러 운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최근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수족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 소설의 내용 또한 한마디로 시체 치우는 얘기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왼손잡이를 고치기 위해 아들에게 폭력을 자행했던 주인공은 아들의 가장 극악한 폭력인 살인을 목도하게 된다. 오른손잡이가 상징하는 것은 모르긴 몰라도 획일성, 보편성, 대중성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현대 사회에서 획일성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하게 마련이다. 마치 정치인들이 알면서도 이념 논쟁에 불을 붙이듯 그런 이분법적인 논리로는 복잡한 세상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수가 가는 길이 길이 아닐 수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원흉, 히틀러 또한 무자비한 광기로 독일 국민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극히 당연시 여기던 것들을 낯설게 볼 수 있는 눈을 틔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주인공처럼 무조건 오른쪽을 지향하는 보편성에 함몰되기보다 각자의 개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열린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다양한 성향을 인정하지 않고 내 것만 고집할 때 세상은 더 이상 그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마치 주인공 아들이 살인을 통해 자신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반항 의지를 키웠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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