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젤리히만 / 생각의 나무
일찍이 <히틀러-악의 탄생>이라는 영화를 통해 히틀러의 일대기를 살펴본 적이 있다. 과연 한 인간이 어떤 식으로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에 몰아넣고,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갔는지 궁금한 것이 그 이유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어느 정도 궁금증은 해소되었다. 그렇지만 영화가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시대적인 배경과 주변 상황에 대한 설명이 만족할 만큼 충족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 맞닥뜨린 것이 바로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라는 책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다시피 히틀러의 탄생은 개인적인 역량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시대상을 보면 독일에겐 그야말로 암울한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독일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내야 했다. 전쟁 배상금도 모자라 일부 영토를 빼앗길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국가의 정체성은 말이 아니었고, 국민들은 패배감에 빠져 있었다. 정치는 더 이상 국민을 위로해주지 못했고, 강력한 영웅의 등장만이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별 볼품없었던 히틀러는 탁월한 연설능력으로 그 자질을 인정받았고, 군중들의 관심과 애정을 먹으면서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이런 성장의 배경에는 소수의 추종자들이 늘 함께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추종자의 범위는 전 국민으로 확대되어 갔다. 집단애국이 탄생된 것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까지 탄탄대로를 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성장시절이 순탄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가 총통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기까지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쿠데타에 실패한 후 히틀러는 변칙보다는 원칙을 중시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부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회를 하더라도 완벽한 길이라면 그 길을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 그가 얻은 교훈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숨죽이고 있는 것이 탁월한 전략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내밀한 움직임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우매한 것은 대중이었고, 그의 측근들조차 이용된 후에는 철저히 제거되었다.
중요한 것은 히틀러의 성장과 동시에 국민들의 의식도 그와 합치되는 경향이 짙어졌다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그의 측근 중의 한 명은 그를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 표현할 정도였다. 이런 집단사상의 발현은 국가를 위기로 몰아갈 수밖에 없었다. 인류 최악의 만행이라고 일컬어지는 유태인 학살에서조차 독일 국민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개중에는 유태인에게 도움을 준 독일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광기는 독일 국민을 빗나간 애국심으로 무장시켰다. 전쟁은 예견된 일이었다. 개전 초기 독일은 승승장구했다. 히틀러에 대한 국민적인 신망은 더욱 커져갔다. 전선은 확대되었고, 그의 야망은 끝이 없었다. 역설적으로 이런 야욕은 자멸을 불러왔다. 히틀러의 죽음으로 광기는 사그라들었지만 독일 국민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책에서 밝힌 것처럼 히틀러의 선동 공약 중에 유일하게 지켜진 것은 유태인 학살뿐이다. 히틀러로 인해 독일은 강력한 국가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온 인류에 엄청난 빚을 남긴 채무국으로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집단적인 광기는 엄청난 후유증을 인류사에 남겨놓았다.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히틀러가 그를 추종하는 국민들과 어떤 식으로 결합하여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무모한 전쟁을 선동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파멸로 이끌었는지 상세하게 기술한 책이다. 이 책은 그동안 제2차 대전의 비극이 히틀러 개인의 광기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는 기존의 관점에서 진일보한 주장을 펼친다. 개인과 집단의 광기가 합치된 결과가 이런 비극을 초래한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히틀러는 어찌 보면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일지도 모른다. 극심한 경제공황의 시대를 살면서 대중들은 호기 있는 영웅의 탄생을 목마르게 고대하고 있었고, 그런 대중들의 욕망을 간파한 한 개인의 광기로 인해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중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를 추종하는 대중들 또한 그에 맞갖은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