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예술의전당 / 서울
리차드 글로스터는 일명 꼽추이자 절름발이다. 그런 신체적인 장애로 인해 그는 비록 요크 가라는 왕족 출신임에도 차별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그런 상황은 역설적으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분출되고, 비뚤어진 성격과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그런 리차드 글로스터에게 권력의 상징인 왕관은 반드시 탈취해야 할 목표일 수밖에 없다. 그의 악행은 그런 권력욕에서 비롯된다.
연극 <리차드 3세>는 10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한다는 황정민의 출연작이라는 얘기를 매스컴에서 접하면서 관람 기회를 갖게 된 작품이다. 황정민은 연극보다는 영화로 알려진 배우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를 보면 제법 흥행에 성공한 작품들이 많다. <베테랑>, <국제시장> 등은 천만 관객을 돌파한 대작들로 국민배우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 영향을 미친 작품들이다. 아울러 이 연극에 출연하는 정웅인, 김여진 또한 유명한 배우라서 더욱 관심이 고조되었던 연극이다.
한때 연극을 좋아해서 소극장에 자주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연극처럼 출연진들이 화려하고, 예술의전당과 같은 큰 공연장에서 접해보는 연극은 처음이라서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리차드 3세>는 올해 연극 중에서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혔던 작품이라 그런지 큰 고민하지 않고 바로 표를 예매하게 되었다. 연극 <리차드 3세>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희곡 중 가장 매력적인 악인 캐릭터로 꼽힌다는 리차드 글로스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다.
리차드 글로스터는 권력을 위해서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수양대군과 비슷한 악행을 저질렀던 실존했던 악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권력을 위해서는 형과 조카들은 물론 주변 인물들조차도 서슴지 않고 살인을 저질렀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 낸 최고의 악인이라는 타이틀은 그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잣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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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공연 예술이라면 흔히들 뮤지컬을 떠올린다. 그만큼 흥행성을 가진 장르가 뮤지컬이다. 하지만 연극 <리차드 3세>를 보면 연극과 뮤지컬이라는 구분이 모호해진다. 극 중 앤의 역할을 맡은 배우의 노래 이외엔 뮤지컬처럼 수시로 음악이 나오지 않지만 무대 배경, 스크린 영상, 효과음, 소품, 조명 등은 뮤지컬 수준에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북을 보면 이 연극의 공연제작사인 ㈜ 샘컴퍼니는 <해롤드 앤모드>, <로미오와 줄리엣>에 이어 이번 연극도 웰메이드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의 수작인 <리차드 3세>를 선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음악적인 요소가 적은 연극이라는 장르 특성상 뮤지컬처럼 화려한 율동이나 배우들의 노랫소리, 신나는 오케스트라의 향연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정극으로서 연극이 주는 진지함, 주옥같은 대사들은 뮤지컬이 주는 매력과는 차원이 다른 고품격 공연 예술의 가치를 일깨우는데 일조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배우에 맞게 주어진 명대사는 다시 들어도 좋을 만큼 셰익스피어의 예술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엘리자베스 왕비 역을 맡은 김여진의 대사는 일품이었다.
파괴여, 죽음이여, 학살이여! 내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갈 것이라면 차라리 어서 다가와라. 나, 어머니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버텨낼 테니.
자식들의 죽음을 앞둔 비통한 어머니의 심정을 표현한 이 대사는 악의 화신으로 전락한 리차드 글로스터를 향한 비분강개하는 왕비의 마음을 소스라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전장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고, 반쯤 미쳐버린 마가렛 왕비는 가끔씩 산발한 머리를 하고 나타나 마치 심령 들린 사람처럼 저주의 말을 퍼붓곤 한다.
그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통탄에 빠진 한 인간이 울부짖는 절규처럼 들리는 이 대사는 극 속에서 되뇌어지며 악을 행하는 무리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반복적인 울림을 준다. 연극 <리차드 3세>는 이처럼 원한 가득한 영혼들의 피맺힌 절규와 상처, 고통이 녹아있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무대 또한 영상 효과에 힘입어 심연을 알 수 없는 깊고 어두운 장면을 재연하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리차드 글로스터가 전장에서 수없이 많은 화살을 맞고 쓰러지면서 보여주었던 무대 효과는 더욱 빛을 발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과감한 시도를 통해 획기적인 장면을 연출한 무대디자이너인 정승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찌감치 뮤지컬 <모래시계>에서 시대 상황에 맞는 무대디자인을 통해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던 만큼 연극을 보면서도 그 장면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었다.
연극 <리차드 3세>는 비뚤어진 한 인간의 권력욕이 어떤 식으로 주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비극적인 결말의 단초를 제공하는지 또렷하게 보여주었던 작품이다. 권력에 기생하여 주군을 배반하고,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충심을 잃지 않고, 새로운 권력에 반기를 드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선택은 비록 운명의 화살을 비켜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반복되듯 정의는 횃불처럼 타올라 불의한 세력들을 몰아낼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