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꽃이 피던 날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 시리즈 중 <킹덤> 시리즈와 더불어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보여준 대표적인 드라마로 그 흥행 또한 세간에 화제가 되었을 만큼 엄청난 이슈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킹덤>이 조선 후기 역병을 계기로 공동체의 존속을 저해하는 좀비와의 사투를 그린 드라마라면, <오징어 게임>은 물신화된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과연 ‘공정 경쟁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극 처음에 등장하는 흑백 톤의 화면은 <오징어 게임> 주인공인 성기훈 역인 이정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아이들의 노는 장면을 토대로 게임의 룰을 설명하는 이 장면은 <오징어 게임>이 철저히 게임에 기반한 작품임을 드러내주는 상징적인 부분이다.
<오징어 게임>의 상징마크처럼 되어있는 ○, △, □는 이 게임에서 차용된 표식이다. 이 표식은 이 드라마에서 원형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다. 진행 요원들의 머리 중앙에 표시된 이 기호는 게임 참가자들보다 우위에 있는 그들의 계급 상황을 투영하는 상징으로 자리한다.
<오징어 게임>은 극 중 인물인 성기훈의 상황을 조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극이 전개되면, 성기훈은 이혼남에 수억 원의 빚을 진 대리기사라는 실체가 드러난다. 딸의 생일에 모친에게 몇만 원의 용돈을 타가야 할 만큼 그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다. 운 좋게 경마장에서 돈을 벌었지만 이마저도 소매치기에 뜯기고, 딱지남을 만나 딱지치기로 돈을 벌기도 하지만 그가 제시한 게임의 유혹에 결국은 넘어가고 만다. 현실 속 장면은 그가 전화를 받고, 승합차를 타는 데까지 유효하다. 이 장면에서는 한국 사회의 단면이 장면마다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혼 가정의 현실, 경마 도박장에 꿈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 인형을 뽑는 것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는 현실 상황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빈부격차와 개인의 노력으로 운명을 뒤바꿀 수 없는 사회 구조적인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성기훈이 약에 취해 잠든 뒤, 깨어나는 장면은 더욱 섬찟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누군가에게 모니터링당하고, 이를 지켜보는 시선의 대비는 정보를 소유하는 자와 정보에 종속된 이들이 계급관계를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그 비극성은 더욱 고조된다. <무궁화 꽃이 피던 날>에서 성기훈을 비롯한 게임 참가자들을 모니터링하는 진행 요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첨단 문명의 시대에 감시당하는 인간과 이를 지켜보는 권력의 모습이 명징하게 대비된다. 여기서 경쾌한 음악은 비극적인 현실을 더욱 고조시키는 장치로 활용된다. 영문도 모른 채 게임 참가자로 끌려온 이들이 각자의 침대에서 깨어나 모이는 장면은 마치 나치수용소에서 수형자들이 모이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획일화된 운동복과 왼쪽 가슴에 붙여진 번호 또한 더욱 그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게임 참가한 이들이 첫 번째 게임장으로 가는 상황을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시점에서 묘사한 장면에서는 마치 도구 가운데 하나로 전락해 버린 인간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그려내는 듯하다.
권력의 대비를 이루는 장면은 진행 요원들이 한 층위 높은 곳에서 게임 참가자들을 바라보며 게임의 룰을 설명하는 지점에서 극대화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는 숨긴 채 게임 참가자들을 내려다보며, 그들에게 게임의 내용을 설명하며 게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한다.
눈을 뜨게 된 성기훈이 보게 되는 현실은 게임 속에 참가하는 이들과 운명을 함께하는 상황임이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1 ~ 456으로 이어지는 게임 참가자의 일련번호는 그들이 한 운명체임을 예고한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진행요원은 세모와 네모의 상징기호를 이마 부분에 달고 있다. 이들의 정체는 은폐되고, 게임의 내용만 전달될 뿐이다.
이들은 6개의 게임에 참가하게 되고, 우승자는 거액의 상금을 취득하게 된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게임장의 위치가 드러난다. 그곳은 바로 섬 속에 건설된 미지의 공간이다. 그 누구도 구조할 수 없는 공간에서 목숨을 건 게임을 통해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직시하게 한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게임에 동원된 이들이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처럼 몰개성화된 사실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침대에 누워 생활한다. 이미 소지품을 빼앗기고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방식은 마치 다단계 마케팅에서 쓰이던 수법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대화 속에서도 성기훈이 딱지남에게 의문을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저씨, 이거 신종 피라미드 뭐 그런 거지?”
이 장면에서 거론되는 피라미드와 종교 관련 발언들은 한국 사회의 물신화된 경제 현실과 종교의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추락하고 있는 여실히 보여준다.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첫 화의 백미는 바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시연하고 있는 미지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 이들은 게임 룰에 따라 목숨을 건 사투를 건다. 게임으로 인해 학살의 서사가 이어지는 경우는 일본 영화인 <배틀로열> 등에서도 다루어졌던 서사지만 <오징어 게임>에서 그 잔혹성은 극에 달한다. 센서로 작동하는 거대한 인형은 그 자체로서 서늘한 공포를 자아낸다. 전자화된 기계가 센서의 작용으로 인간을 학살하는 장면은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계의 종속물이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첫 번째 게임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게 되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 사지를 넘나드는 게임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실을 알게 된 참가자들은 총탄에 쓰러지는 옆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는 상황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1번 참가자는 게임을 즐기며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게임 참가자 중 최고령으로 보이는 이 인물의 행보는 마치 게임 참가자로서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한 이미지를 남긴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경직된 표정으로 게임에 임하는 반면, 이 참가의 얼굴에서는 여유 있는 미소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는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대상을 물색하고, 게임을 종용하게끔 유혹한 이들의 행태가 과연 게임 참가자들의 자발성을 유효한 관점에서 옹호하게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극 중에서 실제로 이 게임을 창안한 이들의 실체 또한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게임 참가자들이 비극이 고조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죽음조차도 게임처럼 인식하게 하는 물신화된 자본주의 사회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저희를 믿고 모두 자발적으로 어떤 강압도 없이 이 게임에 자원하셨습니다. 지금 다시 선택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돌아가서 남은 인생을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쓰레기처럼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희가 드리는 마지막 기회를 잡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