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발전이 여러 직업을 대체할 거란 전망이 많다. 아직 현실에서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놀라운 발전의 속도로 볼 때 지금 존재하는 직업들이 전부 살아남기는 어려워 보인다. 기술의 진보에 더해 대중이 AI로의 대체를 원하는 직업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판사가 거론된다. 화제가 된 사건마다 내린 결정들이 번번이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이 원인일 것이다. 판사의 마음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법에 정해진 형량 상한선에 구속되는 직업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누명도 가미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더 낮출수야 있겠지만 더 심한 극형에 처할수는 없다. 죄형법정주의가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이 느끼는 정의에 대한 갈증의 원천은 사실 판사라기보다 법 자체에 가깝다.
나는 법을 각잡고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꽤 진폭이 큰 인생의 그래프를 그리며 겪은 일들로 말미암아 알음알음 익힐수 있었다. 그러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법이 골다공증 환자의 뼈처럼 생각보다 빈틈이 많고 꽤나 말랑하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내 경험에서 비롯된 의견이지만 누구라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법 앞에 서본 경험이 있다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엄벌주의보다 온정주의에 가까운 경향은 방어권을 보장함과 동시에 한 번의 기회를 더 부여함으로써 사회 구성원 1인의 변화를 기대하는 정서에 바탕할 것이다.
변화는 저지른 일에 대한 통렬한 후회에서 시작된다. '아차!' 정도로 피어난 결심은 3일을 채 넘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된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쯤 겪어서 잘 알고 있다. 반성문부터 깜지, 매질에 이르는 모든 벌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인정하게 만들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나타날 결과를 일러주는 단순한 방식의 반복 학습과도 같았다. 대개의 경우 내 죗값 치고는 너무 가혹하다는 분노와 반감, 다시는 저지르지 말아야 겠다는 회한, 안들킬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으로 나타났다. 체벌이 학생들을 교화로 이끄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었지만 모든 체벌의 시작은 잘못의 실토부터 시작하므로 적어도 잘못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다.
후회든 아쉬움이든 분노든간에 느낀 바가 있으려면 잘못에 대한 인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원리는 깨달았지만 그건 고작 학교에서만 통하는 공식이었다. 30년 넘게 겪은 이 사회는 도무지 명쾌한 시인이 없는데 그 일은 이른바 사회의 지도층이라 불리우는 계층에서 본보기를 보이고 있다.
불법적으로 뇌물을 수수했다는 의혹에 대해 입을 닫다가,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 비로소 '안 받았다고 한 적은 없다'고 말하는 일은 세대가 바뀌고 사람만 바뀔 뿐 어떤 관행처럼 자리잡았다. 법적인 용어들은 일상의 용어와 비슷한 듯 분명히 다른데 법률의 언어가 일상에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부인도 시인도 아닌 모호한 태도는 더욱 번지기 시작했다. 예컨대 법률상의 무죄는 이 사람이 결백함을 드러낸다기 보다 죄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는 정도의 부정문에 가깝다. innocent가 아닌 not guilty 인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영장이 나오지 않거나 검찰에 송치되지 않는 경우도 '혐의없음'이라는 명확한 설명이 없다면 죄를 증명할 충분한 근거가 없다 정도로 해석함이 적절하다. 죄의 여부를 따지는 일은 미처 시작하지 못한 셈인데 무죄나 불송치가 가진 언어의 모호함은 구태여 용서를 구할 이유를 없애고 도리어 당당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무죄와 불송치가 결정된 사람에게 정말 그 죄를 저지르지 않았냐고 물어본다면 십중팔구는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불송치 됐다고 항변할 뿐 시원스레 안 했다, 무고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음주 사고는 매번 심신이 미약해진 시기 벌어진 해프닝이고 과거의 범죄이력은 젊은 날의 실수로 포장된다. 60대에 바라본 본인의 40대는 당연히 젊겠지만, 실수와 실패가 어리다는 이유로 일정 용인되는 마지노선이 잘 쳐줘야 30대 초반까지라는 사실을 그 자신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궁색한 이유들이 잔뜩 붙어서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외치거나 마치 그런일이 없었다는 듯 말 한마디 없거나 둘 중 하나다. 뭐가 그렇게 극단적인가.
예전부터 사과는 함부로 하면 안되는 개념으로 여겨졌다. 민족이 가진 승부욕이 애먼 곳까지 침투한 탓인지 사과하는 일을 자존심이 상하는 패배로 여기는 경우도 여전히 많다. 물론 마음이 전혀 담기지 않은, 그러니까 진정한 사죄라기보다 미사여구처럼 쓰는 죄송함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나 정말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상황에서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든가 '당신도 잘못했다'는 식으로 국면 전환을 꾀하는 일은 지금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사과를 기피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과가 가진 '잘못의 시인'이라는 함의 때문일 것이다. 결국 사과를 꺼려하는 정서는 책임의 면피에서 기인하는 마음이다. 사과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굳이 사과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의 구조가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고 뻔뻔한 가해자를 보며 사과에 목말라하는 정서는 순환한다.
그래서,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 솜방망이 처벌이 변화를 이끌어낼거라는 기대는 과도한 순진함이자 일종의 배임이다.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데 왜 다음을 부여하는가. 내가 이건 잘못했지만 저것은 너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대신 너는 잘났냐고 되묻는 사회에서 무슨 합리성이 피어나겠는가. 자그마한 자신의 치부 하나도 드러낼 용기가 없는데 타인의 결함을 품을 여유는 어디서 솟겠는가. 사과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나올리 없다. 인정과 사과가 만연하기를 기대하는 바람들은 공허하고 정의로움은 여전히 요원할 수밖에 없다.
모 영화감독의 부고가 전해졌다. 집단 구타로 인한 사망이었다. 가해자들은 구속되지 않았고 반년이 다되도록 유족에게 연락이나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뒤이어 대학생 과외선생이 초등생이던 학생을 성추행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현행범으로 체포됐지만 수사과정에서 그는 초등생이 본인을 유혹했다고 진술했고 재판부는 범행을 인정했고 초범이라는 이유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