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Easy come, Easy go
1편에서 기술했듯 나는 간호사와 멀어지고 싶어 간호의 영역에 여전히 발 담그고 있는 조각경력의 간호사다. 이 문장은 꽤 모순적이지만 아주 유별나고 희박한 경우가 아니라는 점에서 간호사의 현실을 관통하는 문장이라 단언할 수 있다. 이번 편에서는 이 직업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몇 자 적고자 한다.
학부때를 돌이켜보면 수 많은 수업이 있었고 그때마다 교수들은 간호사라는 직업의 진로 다양성에 대해 예찬하곤 했다. 많은 곳에서 간호사를 필요로 하고 너희들은 그 일원이 되었으니 훌륭한 선택을 한 것이다, 뭐 그런정도의 하하호호로 시퀀스가 끝나곤 했는데 그 말들은 방어기제처럼 들렸다. 다양성은 일관성의 정 반대는 아닐지라도 수직선에서 반대 영역에 있을 것이 틀림없다. 대박집 사장이 쪽박집을 컨설팅하는 프로그램이 한 때 유행했는데, 대부분의 경우에서 공통된 지침은 메뉴를 줄이거나 단일메뉴를 지향하는 일이었다. 확실한 한 방이 없어 이리저리 방법을 모색한 결과가 난수표같은 메뉴판이었고 사실상 대박집의 '킥'을 전수하는게 프로그램의 골자였다. 그러니 진로의 다양성을 설파하는 일은 확실한 진로가 없다는 자기고백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그런 말들은 직관이라기보다 축적된 데이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귀납적으로 몇몇 고위 간부급 간호사를 제외하면 병원이라는 현장에 오래 머무는 간호사는 많지 않아왔던 모양이다.
나는 그 이유를 간호사의 '범용성'에서 찾을 수 있었다. 병원 내 직원들을 직군별로 분류했을 때 어느 병원에서나 간호사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다. 법적 요건과 의료기관 등급을 위해 머릿수를 맞추는 의미도 있겠지만 일단 채용해두면 어딘가에는 돌려서 쓸 다재다능함이 있는 덕분이라고 본다. 때문에 생각했던 업무와 다른, 묘한 교집합의 업무를 떠맡는 경우도 잦다. 대표적인 예시가 PA 문제다. PA 업무 전반은 수술의 보조나 증상에 따른 처방을 내는 전공의의 업무다. 간호사의 업무범위 외에 무언가를 담당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심전도를 찍거나 ABGA를 하거나, 심지어는 L-tube를 삽입하는 일도 보았다. 법적인 권한은 차치하더라도 적당한 권한과 지식이 만든 적당한 육각형 덕에 병원 내 대부분의 빈틈을 간호사는 메울 수 있다. 언제나, 어디에나 밑 빠진 독은 있기에 간호사에게 재취업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특성은 마치 장점처럼 여겨지는 듯 보인다.
상술한대로 다재다능은 애매함의 동어반복이다. '간호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흰 모자를 쓴 여성이 왼쪽 겨드랑이에 차트를 끼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 중지로 주사기를 쥔 모습을 떠올린다.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보는 시선과 달리 나는 그 이미지가 유스티티아의 양손처럼 이 직업을 정의하는 정체성이라고 느낀다. 간호사의 독보적인 영역, 그들이 누구보다 앞서있는 일은 차팅과 정맥주사임이 틀림없다. 현실에서 차팅과 정맥주사 위주의 업무를 수행하는 간호사의 수는 정해져있다. 그 두 가지 일과 멀어지는 순간 간호사는 '의료인 중 하나'로 집단화된다. 개별성을 잃고 의료인으로 거듭난 간호사는 더 이상 특별할 수가 없다. 간호사가 의료인으로 편입되는 일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내가 누군가를 쉽게 대체할 수 있다는 말은 나와 비슷한 누군가 역시 나를 쉽게 대체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다재다능한 채로 남아있는 것은 곧 그저 머무는 일에 가깝다. 간호사의 면허를 대며 자리한 일터지만 실상 간호사의 업무와 거리가 먼 일을 도맡다보면 이 커리어의 유효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미래에 대한 회의감에 쉽게 빠져든다. 일천한 경험과 인맥이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경력의 끝을 간호사로 생각하는 사람을 나는 주변에서 보지 못했다. 분명한 상한선과 높지 않은 연봉(업무의 강도와 견줄 때의 경우)에 대해서는 부연하지 않아도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
결국은 또 버티게 되는 것이다. 현실이 조금 아프게 다가오면 비로소 더 나은 자리를 찾아 쉽게 떠난다. 떠난 자리는 다시 다재다능한 누군가로 금세 채워진다. 재취업은 누군가 떠난 빈자리를 다시 메우는 일인 것이다.
탈임상에 대한 열망과 퍼즐처럼 조각난 경력란은 이 업계의 늘 그러함이다. 그 사태의 중심에는 쉽게 떠나고 쉽게 들어오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