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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y 21. 2019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1.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

장애인들은 어릴 때부터 더욱 '정상적'으로 보이기를 강요받는다. 뇌성마비를 가진 사람은 '조금 더 정상적으로' 걷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발목 인대를 교정하고 근육을 치료하는 수술과 재활훈련을 받고, 청각장애인의 경우 유년기부터 수화 대신 구화 훈련을 받으며 '평범하게' 보이기 위해 애쓴다고. 저자인 김원영은 말한다.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무엇이 '아닌 것'이라는 소극적 형태로는 그와 같은 스타일 만들기가 불가능하다.
-미혼은 결혼의 결여를 표현하지만 비혼은 적극적으로 규정된 삶의 스타일이 될 수 있다. '청각장애'는 청력의 부재를 의미하지만 '농'은 농은 농문화의 존재를 전제한다.

정상적이고 평범하게 보이기 위해서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 또한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의 수평적 교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정상이라고 여겨진 것들, 다른 성적 지향, 다른 삶의 모습을 탈피해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한 사람들은 이미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얼마 전, 예능프로그램에서 결혼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 "본인이 연애 세포가 죽었다거나, 비혼주의자가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상황상 아무도 결혼하자고 안 하니까 결혼을 안 했는데 여기에다가 멋있게 이름을 가져다 붙여야 하니까 본인 스스로 비혼주의자 이러는 것"이라 말해 논란이 된 바 있다. 한 중년 남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해도 충분히 불쾌한 의견을 상담이라는 꼴을 갖추고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점이 몹시 인상 깊다.
정상이라는 범주를 정해놓고 그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의 세상은 이렇게도 좁다.

2. 법 앞에서 실격당한 삶

저자는 국가인권위에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정신장애인들을 만난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많은 사건과 만남들 그리고 감정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법은 이 모든 개인의 서사를 간단히 무시하고 구체적인 개인을 묵살시키며 실격당한 삶으로 전락시킨다.
법의 무책임 앞에서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또한 자기의 삶에 대해 숱하게 이야기한다. 자기가 왜 이런 처지가 되어버렸으며, 얼마나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지 늘어놓고, 난 그 말을 단숨에 끊는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며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나의 업무범위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으면 타기관의 책임으로 돌린다.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해야 하는 법의 본질적 성격, 법을 적용할 때 안정성과 지속성, 예측 가능성을 유지해야 하는 관료 시스템의 한계를 모르지 않는다.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법은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주겠다고 나서면서도 사실상 그들을 그 보호의 '필요성' 안에 가둔 채 개개인의 저자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물론 나는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공무원도 아니고, 책 속에 나온 사례와는 매우 다른 경우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서사(self-narrative)는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3.4월 20일

이 책을 구입했던 날은, 우연히도 장애인의 날(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었다. 7장 '권리를 발명하다'에서는 2000년대를 장애인운동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하며 '이동권연대'가 수많은 시위와 헌법 소송을 통해 2002년 서울의 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2005년엔 '이동권'이 공식적인 법률 용어로 인정되기도 한다. 장애인들이 스스로 이동할 권리를 위해 집 밖으로 나와 투쟁하고 빗장을 걸어 잠근 법 속으로 진입한 것이다.
고백하자면 난 동시대를 살면서도 이토록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몰랐다. 책을 읽고 나서야 일상 속에서 한번 더 돌아보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다니던 식당 진입로를, 버스 안에 휠체어가 들어오면 접어야 하는 좌석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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