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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디언니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아무나 버틸 수 없는 세계.

by 캐디언니

1. 캐디 시작과 현실


ㅣ. 왜 캐디가 되었는가?


스물여섯, 아무것도 없던 나의 선택은 캐디였다.

스물여섯 살,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
4년제 대학에 입학했지만 휴복학을 반복하다 결국 돌아가지 못했고, 23살부터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두 해를 그렇게 보냈다.
그 사이 내 친구들은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신입 딱지를 떼고, 월급을 모아 해외여행까지 다녀왔다.
나는 늘 책상 앞에 앉아 있고, 통장은 비어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책 제목 하나가 내 머리에 남았다.
‘20대에는 통장을, 40대에는 인생을 채워라’
그 문장이 이상하게 마음을 때렸다.
그래서 생각했다.
‘경력이 없어도, 도덕적으로 문제없고,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때 마주친 것이 바로 캐디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 골프장 호황기였던 것 같다.
지역 교차로 광고지에 캐디 모집 공고가 났는데, 한 달 수익이 무려 400만 원이 넘는다고 했다.
기숙사 제공, 간식비 지원, 심지어 동아리 활동비도 준다고 했다.
처음엔 사기인가 싶었다.


그때는 ‘다음 카페’가 커뮤니티의 중심이던 시절이었다.
‘캐디’라고 검색해 봤고, 그렇게 **‘캐디세상’**이라는 커뮤니티를 알게 됐다.
그곳에서 우연히 읽은 한 편의 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디서든 이상한 사람은 있다. 대신, 그 고객을 또 볼 일 없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의외로 재미있다. 도전해 봐도 괜찮다.”

그 말이 용기가 되었다.
모든 직업군에 어려움은 있고, 성희롱이란 것도 특정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을 만났을 뿐’이라는 문장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그보다 몇 년 전, 나는 제주도에서 열릴 예정이던 LPGA 대회에 ‘진행캐디’ 아르바이트로 갈 뻔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박세리 선수가 국위선양을 하며 골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었고,
그 여파로 ‘캐디’라는 직업도 대중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911 테러가 터졌고, 대회는 취소되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네댓 해는 더 빨리 이 일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주변에서는 나를 말렸다.
“너처럼 느린 애가 어떻게 캐디를 해?”
“거긴 텃세 장난 아니라더라.”
그 말들이 무서웠다. 그래서 한 번도 도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제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고.
정말 돈만 보고,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할 때라고.

그리고 그 결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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