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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오후 Dec 25. 2017

일곱개의 모자로 남은 시간들

나는 오늘만큼 좋아집니다

일곱 개의 모자로 남은 시간들


오늘은 개인적으로 나름대로 역사적인 시간이다

2014년 12월 13일경,

가슴에 뭔가 만져진다는 철렁하는 소리를 듣고

검진에 검진을 거쳐

유방암 간전이 4기를 확진받은 날이

12월 26일, 오늘이  만 3년을 지나가는 날이다.


암을 경험한 사람들은 생일보다는 매년 정기검진일을 챙기며

무사히 통과하면 서로 자기일처럼 축하해진다.

좋은 기운 받아 자신도 정기검진을 가뿐히 넘어보겠다는 바람에서다.

처음부터 4기라고 알았던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러겠지만

검진 받을 때는 아니기를 바라고

확진을 받을 때는 초기여서 간단한 수술로 완치되길 바란다


나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하지만 외래 첫날 웬일인지 처음 예약한 유방외과가 아닌

종양내과쪽으로 진료를 보았다.


지금에야 익숙해졌지만 종양이란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위축되는 무서운 단어였다.

담당의사는 담담하게 치료과정을 이야기했다.

종양이 너무 크니 선항암으로 크기를 줄여 수술하면 좋다.

내가 뭘 어찌 할 수 있었겠나,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뒤돌아 나오면서 한마디 물었다.


-어떻게 이리 엄청난 병이 걸릴 때까지 증상이 없었을까요?

-덩어리가 증상입니다.


멋도 모르고 시작한 치료가 끝나고 1년여의 표준치료가 끝났을 때 든 생각은

처음부터 4기라고 말해줬더라면 난 그 자리에서 아마 사라졌을 것 같다.

앞으로의 치료과정을 인지하지도 않은 체 그냥 따라오라는 말에 꾸역꾸역 오늘까지 온 듯하다.


암은 소리소문없이 온다

통증도 없이.

통증이 있다면 이것이 너무 커져서 다른 장기를 압박해서 그 장기가 아프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탈모였다.

암은 정상세포보다 빨리 자라는 녀석이고

그 성질을 이용한 항암치료는 암세포뿐 아니라 빨리 자라는 모든 세포들도 같이 제거해 나간다니

제일 분명한 타겟이 머리카락이었다.

외모부터 암환자로 낙인 찍히는 탈모는 정말 내가 제일 견디기 힘든 난관이었다.


빠진 머리가 자연스럽게 자라려면 2년여 세월이 필요하니 정말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

나의 발병을 주위분들에게 알리기 싫었던 나로서는 탈모와 함께 사회와 단절상태가 되었다


당시는 일을 하던 상황이었고

첫 주사 후 2주 안에 머리가 빠질 거라고 예고되었던 터라

나는 티나지 않게 모든 것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십여년간 해오 던 일을 두주만에 마무리하려니 어거지도 쓰고

...

급히 가발을 맞췄지만 백여만원이 넘는 가발인데도 영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가발 위에 다시 모자를 얹어봤지만 그닥..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자를 잘 안 쓴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이따금 캡을 쓰기도 하고 노인분들이 좀 쓰고

내 또래 중년이 모자를 쓰는 경우는 드물어 마땅한 멋내기 모자도 찾기 힘들었다


가발이 어색해 모자까지 쓰고 나가노라면 모자 멋있다,

 한번 써보자고 하는 통에 또 질겁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나니 짧으나마 자연스럽게 머리가 자라고 몸도 일상도 제자리로 와있었다.


처음에 민머리가 되고는 겨울이어선지 집에서도 머리가 추워서 비니를 자면서까지 쓰고 잤다.

겨울 산책길은 어찌나 추운지 비니 위에 등산용 모자를 또 쓰는데

이 모자는 눈과 입만 밖으로 뚫려 있어 완전 보온이 된다.

민머리도 감쪽 같이 감추고.

여름에는 농사지을 때 쓰는 챙 넓은 모자를 쓰는데

모자 뒤에 후드가 달려 있어  목이 햇빛에 타는 것도 막아준다.

완전 탈모로 구레나룻과 뒷머리 한가닥도 없는 환자들 머리 가리기에 더이상 좋을 수 없다.


집에 있거나 혼자 운동하거나 할 때는 아무거로나 머리를 가려도 괜찮다.

나를 아는 지인들에게 나의 병을 알리지 않으려고 위장하는 게 힘들다.

가발은 평소 머리스타일로 맞췃으니 괜찮을거 같았는데

본인이 어색해 하니, 특히 정수리가 너무도 부자연스러워 ㅠ

모자로 한 번 더 카바.

이때는 좀 비싼 걸로라도 자연스러움을 연출하기로

우리 나라에서 중년부인들이 모자를 잘 안 쓰는 관계로 무척 힘들었다


뒤지고뒤져 모 해외브랜드로 여름용과 겨울용으로 카바했는데 비교적 성공적이다

눈치챈 사람이 없으니


또 도리구찌 스탈도 있다.

이건 유난히 앞머리가 잘 안 자라기에 앞머리 커버용으로

지금도 애정한다.

젊어 보이기도하고 심하면 패션 센스가 있다는 말을 듣기도


겨울용 삐에로 모자도 빼놓을 수 없다.

패션센스라고는 1도 없는 아들과 등산용품에서 고른 털모자인데

나름 흰색과 주황 조합의 모자는 두고두고 삐에로 스탈이라는 악명이 붙었다.

이 모자의 장점은 내가 이 모자를 쓰고 두번쯤 나타나면

세번째는 그쪽에서 먼저 알아본다는 거다.


이 모자로 인해 알게 된 카페 직원과는 지금도 친분을 유지.

바야흐로 지금이 그 시즌이다.


딸애가 내게 쓴경 쓴 제1품목도 모자.

작년부터 지금까지 즐겨쓰고 다니는 베레모풍의 남색 모자는 나의 스타일로 굳어졌다.

겨울철에는 모자가 따뜻해 모자없이는 외출하기 힘들 정도.


추리고 나니 일곱 개지만

한때는 모자만 검색하고 산 시절이 있다.

보기에 괜찮아 샀지만 쓰지도 못하고 버린 모자도 부지기수.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다 지나갑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지금 건강하신 분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세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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