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denzah May 30. 2017

답 없는 인생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인문학 습관』을 읽고

 2014년 여름, 입대하기 1년 전의 이야기이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 맞이한 방학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 나는 무작정 나 홀로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하고서 경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난생처음 떠나는 외톨이 여행. 군 복무 중인 고교 동창 절친을 만나며 겸사겸사 경주의 문화 유적과 도시 풍경을 즐긴다는 큰 계획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연휴마다 가던 가족 여행, 학교에서 보내주던 수학여행에만 익숙하던 나는 계획에 따르는 것에만 익숙했지 나의 여정을 손수 계획하고 실행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계획을 세우고 내게 주어진 24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아쉬운 마음 없이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를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용기를 내서 부딪쳤던 경주 여행은 설렘과 뿌듯함으로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어릴 적 갔던 불국사에서 그 세련됨과 웅장함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보고 싶었던 친구도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그러는 사이 이런저런 생각의 정리도 할 수 있었다. 물론, 계획했던 모든 일정을 다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직접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한 감동의 체험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귀중하고 기특한 시간이었다.

경주 황룡사지, 코스모스 밭, 2014

 『인문학 습관』을 읽으며 어렴풋이 떠올렸던 지난여름의 여행기는 여행이 갖고 있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이제까지 여행이란 결국 선택의 연속이라고 피상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단지 선택의 집합체로 여기는 건 여행에 대한 단편적인 접근에 불과하다. 어떤 선택에 도달하기까지의 고민, 그 선택에 대한 성찰이 어쩌면 선택 그 자체보다도 더 무거운 의미를 지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여행과 인생은 참 닮았다.


 지금은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요 새로움의 시대이다. 매 순간 우리는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것들이 사라지고 또 탄생하는 장면을 목도하기도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틀렸던 것이 오늘은 갑자기 진리가 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종종, 정답을 제시하길 종용받을 때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정답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우리는 “진짜배기” 정답을 찾아 쉼 없이 방황한다. 정답을 골라놓고도, 이게 정말 정답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 주저한다.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국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인생이라는 여행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니까.


 저자는 말한다. “계속해서 나아가며 질문하라. 끊임없이 ‘왜?’라고 물어라.” 세상에 꼭 정해진 정답이 없다면, 결국 “나만의 정답”이란 나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서 정답에 가까워져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정답들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내공을 쌓는다. 그렇기에 정답이 바뀌더라도 괜찮다. 정답은 또 찾아내면 그만이다. 결국 정답 찾기의 본질은 질문 하기인 것이다.



 우리는 질문이라는 행위 자체가 서툴다. 나도 그렇다. 우리는 웃어른을 공경하고 그들의 말씀에 순응하는 것이 옳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사회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튀지 않고 평범하게 지내는 것이 미덕이라고 눈치껏 배웠다. 우리는 이러한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 불과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러한 틀 속에서 문제없이 잘 살고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열렬히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화들이 내 안에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아등바등 애써서 명문대에 진학한 선배들은 취업난이라며 울상이었고, 먹고 살기 팍팍하다는 뉴스는 잊을 만하면 흘러나왔다. 학교에서는 명문대에 진학하면 미래가 보장되는 양 우리를 다그쳤지만 선생들이 가르치는 것들은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들과 무관하게 느껴졌다. 나는 서서히 교실에서 겉돌기 시작했다. 성적은 바닥까지 떨어졌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긴 방황의 시작이었다. 그렇다고 나만의 정답이 구체적으로 있던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정답이 내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주변의 어른들이 내놓은 정답은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이었고, 나의 방황과 고민은 그저 잠시 궤도에서 벗어난 일탈로만 여겨졌다. 어서 정신 차리고 다시 수험 공부에 매진해주길 바라는 주변의 기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헷갈려하던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 기존의 정답에 문제가 있는데 대안이 없는 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또 다른 정답을 찾아보려는 의지도, 노력도 없었다.


 저자는 말한다. “문제에 직면한 하수는 무작정 답을 찾으려 애쓴다.” 당시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같이 남이 골라준 정답이 아니라, 문제에 대해 탐구하고 질문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었다. 저자는 당시의 나 같은 사람을 두고 “누군가 대신 답을 찾아주길 바라며 문제 해결을 남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부끄럽지만, 그때의 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말이다. 눈앞의 상황을 외면하고, 그저 사회 탓, 주위 환경 탓하며 정작 내 안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해결의 실마리는 항상 근처에 있었다. 단지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을 들이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부딪쳐야 했다. 질문을 두려워하던 나를 깨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했다. 더 이상 제자리에 머물러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필요성을 느낀 것은 졸업식을 앞둔 겨울이었다. 비록 입시는 실패했지만, 방황을 끝마치고 거머쥔 목적의식은 뚜렷했고 의지는 강렬했다. 재수를 결심했다. 뒤쳐진 성적을 따라잡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끝내 기대 이상의 수능 성적이 나왔다. 나의 바람대로, 문과 출신임에도 공대에 진학하여 꿈에 그리던 컴퓨터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질문이 반드시 어떤 정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끝없는 질문에도 결국에는 정답을 찾지 못하고 주저앉게 된 나의 모습. 내가 그렇게 될까봐 예전에는 그것이 너무나 불안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답 그 자체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질문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질문은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고, 또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오롯이 느끼며 견뎌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내가 던진 질문이 정답에 닿아 울리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이해했으니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 질문에 대한, 더 나아가 나 스스로에 대한 신뢰였다. 잘 하고 있다는 자신감과 스스로에 대한 격려,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아 나는 지치지 않고 질문을 계속 던지며 차분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질문이 정답에 닿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져 버린다고 한들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정답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였는지, 그 정답에 가까워지기 위해 나는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이다. 비록 어제까지 품었던 정답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지만, 괜찮다. 정답을 향해 나아가는 그 순간순간, 흔들리지 않는 내공이 생기고, 나의 정체성이 녹아있는 철학이 쌓여 간다. 이것이야말로 저자가 강조하는 인문학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언가다. 그대, 지금 무엇을 극복하고 있는가.
- 니체


 고민도 방황도 온전히 선택의 결과이다. 그것을 극복해내는 것 또한 스스로의 몫이다.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 애썼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성찰해본다. 나의 인생이 쓰라린 성장통을 이겨내고 굳건하게 자리 잡아가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는 것도 뿌듯한 일이다. 앞으로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일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질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용기 있는 내가 되자고, 『인문학 습관』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짐해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