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한 주제로 2600장을 쓰고 잃은 것들
사리가 생겼어요. 이건 얻은 건가?
다니엘 래드클리프(해리포터 역)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일로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는 막을 내렸다.
시리즈 첫 편을 크랭크인하고서 10년 만이었다. 그새 훌쩍 큰 래드클리프와 루퍼트 그린트, 엠마 왓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촬영장 밖에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즐거웠다, 고생 참 많았다…. 그간 겪은 우여곡절을 곱씹으며 위로했다. 이들 셋의 포옹에는 후회가 없었다. 긴 시간, 그저 최선을 다했다는 시원섭섭함만 묻어났다. 알렉 벤자민의 Older를 함께 듣던 나는 이들의 이별 장면에 조금 울었다.
나 또한 최근 프로젝트 <후암동 미술관> 시즌 1을 마쳤다.
시리즈 첫 편을 올리고서 딱 1년 만이었다. 작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에 맞춰 200자 원고지 40~80매 분량 글을 썼다. 그해 4월 23일부터 올해 4월 15일까지 토요일은 52번 돌아왔다. 그래서 글도 52편을 쓰고 올렸다. 슬플 때도, 아플 때도 썼다. 비행기와 기차, 휴가지에서도 타자기를 두들겼다. 누가 몽둥이를 들고 시킨 일이 아닌데도 집요하게 끄적였다. 쌓은 글을 몽땅 더해보니 200자 원고지로 2600매 정도였다. 가벼운 단행본 한 권 분량을 600매 안팎으로 볼 때, 책 4권 분량을 쓴 격이다. 이러한 기사 덩어리의 네이버 뉴스 기준 누적 조회수로 600만뷰 이상에 올랐다.
이제 잠깐 멈추고 휴식기를 가지려고 한다. 나도 그 시기에 맞춰 포옹했다. 껴안는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해리포터와 달리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이 글은 지난 1년간의 기록이다.
취재 기자로서 지난 3·9 대선까지 4번의 선거에서 뛰었다. 기자 생활의 꽃은 삼라만상을 모두 볼 수 있는 선거로 꼽힌다. 하지만 그런 꼴을 4차례나 보고 있자니 꽃도 시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사이 많이 배웠다. 무엇보다도 인문학적 깨달음이 가장 컸다. 젊은 시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딱 하나가 아쉬웠다.
공들여 쓴 대부분 기사의 생명력은 하루였다. 12시간, 6시간, 심지어 10분, 1분짜리도 있었다. 매 순간 긴박하게 돌아가는 정치 현장 내 숙명이었다. 밤새 수십통 전화를 돌려 쓴 기사가 겨우 하루짜리라니…. 이 자체도 의미 있고 모두 다 기록으로 남기도 하겠지만, 약간의 허무함은 어쩔 수 없었다.
기억한다.
누군가는 그렇게 사회부, 정치부에서 굴렀으면 이젠 더 고상한(?) 곳에 가는 게 낫다며 진심 어린 조언을 했다. 누군가는 정치부에서 벗어난 네가 왜 엉뚱한 부서에 손들고 가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도 했다. 왜, 뭐가 어때서. 내가 온라인 뉴스팀에 손 든 이유는 분명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간 없던 새로운 걸 쓰고 싶었다. 하루짜리 기사가 아닌 1년, 10년짜리 기사. 억지로 분량을 채우고 줄여야 하는 기사가 아닌 내 방식대로 실컷, 아예 질려서 속이 울렁거릴 만큼 긴 기사.
<후암동 미술관>을 그런 기사의 마중물로 만들고 싶었다.
후암동 미술관은 쉽게 나올 수 없는 기사 연재물이었다. 아마도, 모든 언론 통틀어 그간 없던 시도였다. 시의성은 없고, 분량만 지겹도록 길고, 기사체도 아닌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문학체의 무언가였다.
문학투를 택한 이유는 간결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이상문학상 10년치를 쌓아놓고 보는 게 나였다. 미련하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1번부터 하나씩 씹어먹던 게 나였다. 그때는 그게 재밌었다. 이제는 어설프게 흉내라도 내서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 싶었다. 사실, 미술 평론가의 말을 빌리지 않고 일개 기자가 미술 해설 기사를 쓰겠다고 하는 일 자체가 기가 찰 일이었다. 정리하자면 내가 낸 기획물은 기사의 핵심 요소가 모두 빠진 기사였다. 회사의 배려가 없었다면 서랍장 속에서 빛을 보지 못했을 터였다.
첫 기사는 2022년 4월 23일에 올라갔다.
고백하자면 겁이 났다. 선례가 없었던 기사기에 독자에게 어떤 반응이 올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전날 밤은 잠을 설쳤다. 이게 무슨 기사냐는 악플이 달리는 꿈을 꿨다. '소설은 일기장에', '재수 없게 아는 척만 한다'는 투의 이메일을 받는 꿈도 찾아왔다.
기사 하나 갖고 뭘 그렇게 오버해?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올린 기사는 내게 의미가 컸다. 나는 기자가 된 후부터 이런 실험을 꿈꿔왔다. 주제(예술) 또한 10년 넘게 관심을 둔 분야였다. 이 모든 걸 응축해 지난 1주일간 매달린 건이었다. 범인(凡人)의 심장을 안고서 이런저런 모험 내지 도전을 잔뜩 넣은 셈이다. 독자의 반응이 어떤지에 따라 지난 세월의 모든 노력이 허무하게 끝날 수 있었다.
두려움을 억지로 밀어내고 댓글을 봤다.
감사한 일이었다. 안도했다. 깊이 숨을 내쉬었다. 첫 기사의 조회수는 거의 20만뷰였다. 그간 희귀했던 분야, 여태 찾을 수 없었던 형식의 기사로는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였다.
이제 1주일에 한 편씩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시간표는 이랬다. 일요일은 다룰 화가와 미술사조에 대한 자료 수집과 정리를 했다. 월~목요일은 하루에 2단락씩 글을 썼다. 금요일은 탈고와 그림 찾기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해 토요일에 올라가는 식이었다. 하루에 3시간 정도씩, 기사 한 편을 위해 쏟는 시간은 15시간 전후였다. 따뜻한 커피와 함께 고상하게 그림이나 보며 글을 쓰지 않았다. 출근부터 퇴근까지는 이슈 추적 등 주어진 일을 했다. 문화부가 아닌 디지털 팀에 왔기에, 일적으로 보면 이슈 기사 작성이 더 중요했다.
이 기사를 쓰려면 물리적으로 이틀 정도 시간을 통으로 빼야 한다. 이는 주객전도의 느낌으로 변질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지적하겠지만, 당시에는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앞으로는...몸이 따라줄 수 있을지.)
그래서 거의 모든 글은 퇴근하고 썼다.
오후 5시에 퇴근하면, 저녁 식사와 잠깐의 운동 뒤 오후 7~8시부터 10~11시까지 매달리는 식이었다. 맨날 스스로 야근하는 애가 나였다. 하지만 나 말고는 원망할 이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었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외려 회사가 적당히 쉬엄쉬엄하라, 숨 돌릴 시간을 주겠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한 달, 6개월, 1년.
1년간 이렇게 살아봤다. 업무 시간에는 글을 썼다. 업무 외 시간에는 글을 지었다. 잘 읽히면 기쁜 마음으로 썼고, 안 읽히면 쓰라린 기분으로 썼다. 100만큼 투입하면 최소한 100만큼의 결과는 나오기를 바랐다. 그만큼 나오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적어도 멈추지는 않았다. 시작하면 끝을 봐야 했다. 무슨 일이 있든 1년간은 쓰기로 마음을 굳혔기에 흔들릴 일도 없었다.
그동안 내 삶은 쉽지 않았다.
몸은 비루해졌다. 마음속은 전쟁이었다. 종일 기사 생각이었다. 내내 예술 책을 읽고, 예술 글을 쓰고, 예술 이야기를 했다. 카라바조의 작업실에 갇혀 있다거나, 잭슨 폴록이 양동이를 든 채 쫓아오는 악몽(?)에도 적잖게 시달렸다. 1년 사이 예술가 50여명을 다뤘다. 동서양을 아울렀다. 700년 전 사람부터 15년 전 사람까지 있다. 한 예술가에 대해 90% 이상을 쓰다 보면, 다음에 써야 할 예술가가 틀림없이 떠올랐다. 이 덕에 소재 고갈 염려는 없었다. 지금도 다루고 싶은 예술가는 차고 넘친다. 고맙고도 감사한 일이다.
최선을 다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꽤 많은 걸 잃었다. 먼저 약간의 건강을 놓쳤다. 40편쯤 쓸 때부터 오른팔이 저릿했다. 심상치 않아 병원에 갔다. 팔에 석회가 생겼다고 했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다. 팔 안에 있어서는 안 될 돌이 생겼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냥 사리(舍利)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도 했다.
문득 수험생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토할 정도로 수학 문제를 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며칠 뒤였다. 지겹도록 본 수학 문제에 욕지기를 느꼈고, 정말로 토했다. 이게 되네?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박고서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리다. 사리가 생길 만큼 쓰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어느새 사리가 뼈에 달라붙을 정도로 글을 쓴 셈이다. 지난 1월부터 충격파 치료를 받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이었다. 처음 충격파 치료를 받고서 며칠간은 코피를 흘렸다. 이제 약을 먹으면 괜찮은 정도로 왔지만, 팔 통증은 현재 진행형이다.
허리도 약해졌다.
아픔이 심할 때는 의자에 서너 시간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지난달에 새 의자를 샀다. 그러니 좀 나아지는 듯해 아직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나름 피트니스를 강도 높게 하는 편인데, 그래도 몸은 1년을 버티지 못했다. 하긴, 어떤 날에는 하루 15~16시간씩 앉아서 타자만 두드렸다. 물론 틈틈이 스트레칭을 했었다면, 지금 내 상태는 꽤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간도 많이 빼앗겼다.
기본적으로 1주일에 1편씩은 꼭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시한에 쫓기는 건 굉장히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기자라는 직업이 그렇듯, 마감 초과는 곧 죽음이었다. 하지만 이번 기사들은 일주일씩을 매달리는 데도 겨우 버저비터로 마무리하는 게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밥 먹고 일하고, 밥 먹고 글을 썼다.
잠깐의 운동 시간을 빼고 남는 시간 전부를 투자했다.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했다. 재차 말하지만, 절대로 회사가 시켜서 그런 게 아니다. 겨울쯤부터는 이러다가 어디 홀리겠다 싶어 토요일은 쉬었다. 하도 머릿속에 온갖 그림, 문장이 둥둥 떠다니는 통에 쉬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다 쓴 글을 토요일에는 기사로 올리고, 일요일에는 그 기사를 브런치에 게시했다. 1년 내내.
브런치 팀이 내 글을 픽해준 적이 있었을까. 내가 알기로는 없다. 1년 내내. 그간 조회수가 급증한 적이 없었으니 맞을 터였다. 그렇다고 내가 우리네 브런치 팀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듯한 부부 이야기, 퇴사 이야기, 음식 이야기를 쓸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이 문장을 쓰는 이유가 있다. 브런치 기준으로 이런 '터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번 글들은 모두 의미가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지난 1년은 내게 의미가 큰 한 해였다. 얻은 게 더 많은 시간들이었다. 그건….(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