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금붕어 편]
"이보게…. 자네가 좀 더 참으면 안 되겠는가."
1902년, 한 사내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를 다독였다. 클림트는 화폭 가득 나체 여인과 금빛 금붕어를 그리고 있었다. 말없이 작업에만 몰두하는 클림트는 분명 분노로 가득한 듯보였다. 그의 붓질은 화폭을 뚫을 듯 맹렬했다. 물감 또한 캔버스를 푹 적실 듯 진하게 흩뿌렸다. "자네가 지금 얼마나 실망스러운 마음인지는 잘 알지만, 이런 그림에 제목까지 그렇게 달겠다고 하면…. 후환이 걱정돼서 하는 말일세." 사내의 말에 클림트는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친구. 충고는 고맙네. 다만, 이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그런 뒤 이런 말을 했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클림트는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걸까.
얼마 전 세상 빛을 본 아기가 입을 벌린 채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는다.
그 밑에서는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는다. 또, 그 아래를 보면 앙상한 노인이 죽음에 앞서 머리를 쥐어뜯는다. 출생의 순간과 결실의 경험, 그리고 소멸의 운명…. 화폭에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생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명계의 관장자 같은 존재는 이 장면이 익숙한 듯 눈을 감고 있다. 탄생에 대한 일말의 관심도, 죽음에 대한 한 톨 동정심도 없는 모습이다. 이것은 클림트가 1899년께 선보인 그림 〈철학〉이었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생로병사의 흐름을 담은 작품이었다. 5년 전 오스트리아 빈 대학이 철학과 의학, 법학 등 학부 회화를 주제로 그림을 주문하자 먼저 보여준 작업물이었다. 클림트 나름의 야심작이었지만, 이를 미리 본 정부와 대학, 언론은 눈살만 찌푸렸다. 우아한 철학자의 모습을 기대한 이들은 이 저열한 누드화가 무엇이냐며 다그쳤다. 나랏돈을 받고 창작 활동을 하기는커녕 성적 판타지만 충족시켰다는 식의 조롱이 들끓었다.
문제는 이 논란이 끝 아닌 시작이었다는 점이었다.
클림트가 1901년께 내놓은 〈의학〉 작업물도 이들 모두에게 충격을 안겼다. 화폭에는 보건의 여신 히기에이아가 의학을 상징하는 흰 뱀과 함께 서 있었다. 그 뒤로는 늙고 병든 인간들이 죽어가거나, 이미 죽은 채 뒤엉켜 있었다. 나풀거리며 떠다니는 여인 또한 맥없이 종말의 블랙홀에 빨려가는 모습이었다. 의술이 아무리 발전한들 죽음만은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표현한 그림이었다. 〈의학〉은 〈철학〉과 똑같은 비난을 받았다. 왜 웅장하고 위엄있게 그리지 않고 질 낮은 포르노를 내보이느냐는 것이었다. 파문은 잠잠해질 틈이 없었다. 클림트가 1903년께 들고온 세 번째 작업물 〈법학〉 또한 문제작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에는 법과 진리, 정의를 상징하는 나체의 세 여인이 죄인으로 끌려온 노인을 둘러싼 장면이었다. 명령을 받은 괴물 문어가 노인을 덮쳐 벌을 주는 구도였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사실 이를 관장하는 진짜 세 여신은 저 멀리 떨어진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노인은 가짜 무리에게 부당한 처벌을 받는 셈이었다. 판결 중 상당수는 이렇듯 부조리한 상황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걸 말하는 작품이었다.
"클림트는 우리의 우려를 무시한 채 학문을 성적으로 능욕했다. 그것도 세 번이나."
클림트가 수년에 걸쳐 그리며 완성도를 높여간 〈철학〉, 〈의학〉, 〈법학〉을 향한 빈 대학 측의 최종 입장은 이런 식이었다. 꿋꿋이 자기만의 작품관을 펼친 클림트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빈 대학은 문제작 세 점을 천으로 꽁꽁 가렸다. 교육부는 이 그림을 차라리 미술관으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미술관들 또한 언론과 여론의 눈치를 보며 난색을 보였다. 클림트가 생을 갈아 넣은 걸작은 이처럼 짐짝만도 못한 취급을 받아야 했다. 클림트는 결국 받은 의뢰비를 돌려줬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작품들은 돌려받았다. 사실상 굴욕적인 환불 처리였다. 하지만 클림트는 이런 수모를 겪고도 자기 세계를 뭉갤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는 공공기관의 의뢰 따위 절대로 받지 않겠다며 외려 발끈했다.
시간을 되돌려 클림트가 친구에게 다독임을 받던 때로 가보자.
1902년께 클림트는 이미 학부 회화 작업 탓에 욕을 먹고 있었다. 이런 비판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는 이전에도 특유의 요염한 작품으로 조롱을 받아왔다. 클림트는 그럼에도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뜻을 또 다른 그림을 표현하는 중이었다. 이 무렵 클림트의 친구가 그 그림의 제목과 내용을 보고 기겁해 자제시키려고 나선 것이었다. 클림트가 이 무렵에 완성한 그림은 〈금붕어〉다. 나체의 세 여인이 등장하는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붉은색 긴 생머리의 여인은 씩 웃으며 무닝(mooning·도발과 항의의 목적으로 옷을 벗어 볼기를 드러내는 행위)을 하고 있다. 여인들 틈에서는 영혼 없는 눈빛의 금붕어가 휩쓸리듯 떠다니고 있다. 클림트는 자신을 무닝하는 여인, 딴지 거는 사람들은 금붕어에 비유한 것이었다. 원래는 〈나의 평론가들에게〉라는 다소 발칙한 이름을 달고자 했다. 그의 친구 등 여러 지인이 "제발 좀 참자"며 기를 쓰고 만류해 결국 제목을 바꿨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애초 클림트는 대체 뭘 믿고 저 혼자 정부와 대학, 언론과 그토록 맹렬히 맞섰던 것일까. 보통 화가라면 진작부터 돈과 권력에 눌려 굴복했을 텐데, 그는 왜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을까.
클림트는 믿는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는 스스로에 강한 확신이 가졌다. 자기가 하는 게 늘 옳다고 봤고, 자기가 가는 길이 항상 정답이라고 여겼다. 그렇기에 당장의 면박과 핀잔 따위 더 큰 도발로 대응할 수 있었다. 세상의 틀에 자기를 맞추지 않고, 자기의 틀에 세상을 꿰맞추려고 배짱을 부릴 수 있었다. 신기한 건, 결과적으로는 그가 모두 승리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클림트는 사실 백조 같은 존재였다. 그는 매번 당당해지기 위해 혼을 바쳐 공부하는 사내였다. 자신감을 충전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는 화가였다. 겉으로는 우아하지만 물 밑에선 부단히 발을 놀리는 백조처럼, 뒤에서는 생을 갈아 넣으며 실험을 이어가는 독종이었다. 그게 언제나 꿋꿋할 수 있는 그의 비밀이었다.
클림트는 1862년 빈 근처의 바움가르텐에서 출생했다.
클림트의 유년 시절은 우울했다. 귀금속 세공사인 아버지가 이끈 그의 집안은 꽤 부유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몇 번의 부침을 겪은 뒤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였지만 빵 한 조각이 없었다." 클림트도 이렇게 회상할 정도였다. 클림트는 빨리 기술이나 배우려고 했다. 푼돈도 괜찮으니 일단 아무 데나 취직할 생각이었다. 평범한 일꾼으로 일생을 마칠 요량이었다. 그런 클림트는 우연히 기회를 잡았다.
발단은 클림트가 낙서처럼 남긴 데생이었다.
클림트와 가까운 친척이 여기에서 잠재력을 봤다. 클림트는 그의 도움으로 1876년, 빈 장식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의 삶이 처음 유채색으로 물든 순간이었다. 클림트는 이때부터 그림에 목숨을 걸기로 했다. 구명조끼가 된 예술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클림트는 의지를 다지는 데 그치지 않았다. 행동으로 보였다. 클림트는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 회화부터 당장의 아카데미 양식까지 그가 접할 수 있는 모든 미술 분야를 익혔다. 그는 1883년에 이미 완전체가 된 채 졸업했다. 빈의 문제아로 찍히기 전 클림트는 잘나가는 상업 화가로 명성을 쌓고 있었다. 클림트는 각별한 관계였던 동생 에른스트와 공방을 차렸다. 그가 빈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린다는 소문이 돌자 문의가 밀려왔다. 클림트는 기대에 응했다. 클림트의 이 무렵 대표작은 부르크 극장의 주문을 받고 그린 〈옛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이었다. 화려한 색감과 입체감 있는 구도, 인물 하나하나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모두를 경탄케 했다. 고작 스물여섯 살짜리의 그림으로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클림트는 이 작품 덕에 황제의 서명이 쓰인 금십자 공로상을 받았다. 이대로만 가면 돈과 명예 모두 거머쥘 게 분명했다.
그런 그의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1892년, 클림트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사망했다. 같은 해, 동생 에른스트도 영영 눈을 감았다. 심근경색이었다. 클림트는 졸지에 혈육을 둘 잃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는 이들의 허무한 죽음에 동요했다. 클림트는 그간 승승장구했던 자기 삶도 돌아봤다. 그는 스스로가 초심을 잃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예술을 목적이 아닌, 부와 인기를 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하고 있었다고 봤다. 클림트는 재차 각성의 순간을 맞았다.
그는 3년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주문도 받지 않았다.
성공이 확실한 상업 화가의 길을 미련 없이 버렸다. 그동안 서유럽에서 불어오는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아방가르드 화풍을 연구했다. 당시 변방으로 홀대받던 중국 등 동양 미술 양식까지 체화했다. 클림트는 잠깐의 부와 인기보다 더 높은 가치를 꿈꾸기로 했다. 그것은 예술의 진보였다. 그는 아예 예술의 새로운 판을 짜보기로 결심했다. 이제 클림트가 쥐고 있는 건 순수한 열정밖에 없었다.
1897년, 클림트는 빈 분리파를 꾸렸다.
이 조직은 뻣뻣한 전통 회화를 지향하는 빈 미술가협회와 분리되는 것을 지향했다. 회화의 발전은 금기와 엄숙주의를 깨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일반 남녀의 누드화 등 보다 솔직한 회화를 내놓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들의 정신을 요약하는 표어였다. 여기에는 파리의 발칙한 예술가들보다 더 수준 높은 결과물을 내보자는 포부도 담겨 있었다. 클림트는 초대 회장으로 이 모임을 이끌었다.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 그의 뜻을 따른 또 다른 문제아들도 빈 분리파의 정신을 옹호했다. 그런데, 사건은 얼마 안 돼 발생했다.
"황제가 직접 행차하신다고 하는데요?"
1898년, 3월. 빈 분리파 내부가 술렁였다. 이들은 심기일전해 첫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날 행사에 황제가 참석한다는 정부의 뜻밖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일은 이때부터 꼬였다. 클림트가 그린 홍보 포스터가 문제였다. 클림트는 신화 속 영웅 테세우스를 빈 분리파의 일원으로 그렸다. 그에게 제압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옛 예술가 집단으로 표현했다. 클림트는 여기다 테세우스의 성기를 대놓고 그렸는데, 정부 측은 그 부분이 콕 집어 황제가 보기에 외설스럽다고 지적했다. 결국 민감한 부분은 가려져야 했다. "우리가 빈 분리파를 도와주리다." 개회식 날 정부 쪽 인사가 클림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만,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그가 단 단서는 간결하고, 선명했다. 그는 클림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절한 선? 성기를 가려야 한 포스터 건으로 감정 상한 클림트가 보인 건 옅은 코웃음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붙어보자. 클림트의 속마음이었다. 빈 분리파의 첫 전시회는 화제 몰이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성 예술을 옹호한 이들은 도발적인 그림을 이어가는 클림트를 벼르고 있었다. 이들이 꼬투리를 잡은 대표 사례가 이른바 빈 대학에서 빚어진 학부 회화 스캔들이었다. 정부와 언론 모두 벌거벗은 인간이 가득한 〈철학〉, 〈의학〉, 〈법학〉의 밑그림 단계부터 거듭 비난을 쏟아낸 것이었다.
그런데, 클림트는 이쯤 물러서지 않고 더 큰 논란을 일으켰다.
클림트는 1902년, 제14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벽화 〈베토벤 프리즈〉를 공개했다. 천재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 영감을 받고 그린 작품이었다. 클림트는 한 영웅이 악마의 손짓, 달콤한 여인들의 유혹을 뿌리치는 서사를 그렸다. 끝내 진짜 사랑을 만나 구원에 이른다는 이야기로 마지막 붓 터치를 했다. 하이라이트는 서로가 진정한 짝임을 아는 남녀가 으스러질 듯 끌어안는 장면이었다.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긴 채 사랑의 맹세를 하는 둘, 이를 축복하며 〈합창 교향곡〉의 〈환희의 송가〉를 부르는 여인들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이 그림은 세 벽면에 그려진 길이 34m의 대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림 속 지나치게 관능적인 묘사가 발목을 잡고 말았다.
"이 정도는…. 성도착증 환자 수준이 아닌가."
기성 예술계는 물론, 빈 분리파에 그나마 호의적이었던 대중마저 탄식하며 알몸의 향연을 외면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클림트를 감옥에 잡아넣어야 한다는 말까지 빗발쳤다. 빈 분리파는 이번 일로 민심을 잃었다. 1905년, 만신창이가 된 클림트는 결국 빈 분리파에서 탈퇴해야 했다. 그는 그제야 바짝 세운 꼬리를 내렸을까. 아니었다. 혈혈단신이 된 그는 더욱 매섭게 자기만의 작품관을 펼쳐갔다. 클림트가 볼 때 빈에서 자기만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이는 없었다. 자기만큼 치열하게 골몰하는 이 또한 없었다.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 자기가 가는 길이 예술의 진보에 이른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는, 끝내 자기가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는 잠깐 두문불출의 시간을 가지는 듯했다.
그리고 1908년, 마침내 그림 한 점을 선보였다. 그것은 누구도 본 적 없던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품이었다. 한 쌍의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입을 맞추려고 한다. 굵은 목의 남성이 여성의 얼굴을 박력 있게 기울인다. 가녀린 어깨선의 여성은 눈을 감은 채 등을 세우고 있다. 잔뜩 긴장한 듯 손과 발 모두 뻣뻣해진 모습이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눈부신 금빛 아우라다. 남성은 직사각형 무늬가 빼곡한 황금 옷을, 여성은 다채로운 원형 무늬가 가득 채워진 황금 옷을 입고 있다. 모자이크 타일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패턴들은 화려함을 넘어 신성한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반짝이는 금가루가 밤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깔린 배경, 금색과 보라색 꽃, 녹색 풀이 어우러진 공간 또한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현혹적이다.
모든 속박과 족쇄를 벗어던진 클림트는 심기일전을 거듭해 이 그림, 〈키스〉를 작업했다.
고대 이집트 미술의 평면적 묘사부터 20세기 들어 각광받는 장식적 표현 기법, 금세공사 아버지에 대한 추억부터 평생을 연구한 관능적인 남녀의 상 등 살면서 긁어모은 예술적 자산을 폭발시킨 작품이었다. 이 또한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다는 식의 비판이 있긴 했다. 하지만 클림트 반대론자들 대부분도 〈키스〉만큼은 넋을 놓고 바라봤다. 쓴소리를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웠고, 흠집을 내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렇게나 까다롭게 굴던 정부가 클림트의 〈키스〉를 사들였다.
그림을 볼 줄 아는 모든 이는 본능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클림트의 이 작품 한 점덕에 빈은 비로소 파리와 어깨를 견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걸. 그렇게 다들 클림트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처럼 분위기가 뒤집혔지만, 클림트는 언제나처럼 여전했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걸 오래전부터 예상한 것처럼 그랬다. 클림트는 매번 긴 로브를 입고 샌들을 신은 채 캔버스 앞만 서성였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림만 그리며 실험과 연구를 지속했다. 뒤늦게 영광을 쥔 클림트는 1918년 1월에 갑작스러운 뇌출혈을 겪었다. 그리고 다음 달 합병증으로 숨을 거뒀다. 당시 클림트는 쉰여섯 살이었다. 길고 긴 수난, 그럼에도 빛바래지 않은 탁월한 재능과 뚝심을 볼 때 너무도 아까운 나이였다. 살아생전 클림트는 수수께끼의 화가로 불리기도 했다. 클림트는 늘 말이 없었다. 외설 논란으로 질타를 받을 때도 아픈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클림트는 그저 자기 자신만 믿고 묵묵히 나아갔다. 그는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클림트가 세상과 타협해 이들 틈에 섞였으면 어땠을까. 그 순간은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잠깐 반짝하고 사라진 수많은 상업 화가 중 한 명이 됐을지도 모른다.
〈참고 자료〉
구스타프 클림트, 패트릭 베이드, 북커스
구스타프 클림트 : 정적의 조화, 박홍규, 가산출판사
클림트를 해부하다, 유임주, 한겨레출판사
◈이번 글은 어떠셨는지요. 혹시 저의 본진 구독자가 되어주실... 생각이 있으실지요.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관련 안내 페이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구독 버튼은 앞으로의 여러 창작 활동에도 큰 힘이 됩니다.
늘, 매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