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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Dec 01. 2024

제가 개차반인 건 알지만…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어요

[카라바조-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편]

  

카라바조, '성모의 죽음'(일부 확대), 1601~1606, 캔버스에 유채, 369x245cm, 루브르 박물관
오타비오 레오니, '카라바조 초상화'

사람을 죽여버렸다

"저리 비켜!"


1606년, 로마의 테니스 시합장. 칼을 든 사내가 사람들을 거칠게 밀쳤다. 그는 싸움 소리를 듣고 몰린 이들을 향해 위협적인 손동작을 취하기도 했다. "이 자식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씩씩대는 그는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는 상대를 향해 도발했다. 그의 부추김에 상대 또한 다시 맞붙으려는 듯 턱을 들었지만, 이내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잠깐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 경련을 멈췄다. "저 사람, 설마 죽은 것 아니야?" 구경꾼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커졌다. "어…어이. 수작 부리지 마." 사내는 쓰러진 상대 앞에서 주춤하다 쪼그려 앉았다. "네가, 그런다고, 응?" 칼을 내려놓은 그는 손가락으로 상대의 어깨를 한 번, 두 번 쳤다. 그런데, 상대의 머리는 그대로 힘없이 땅에 처박혔다. 주변에는 연못이 생기는 듯 무언가 고이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빨간 액체였다. …내가 사람을 죽인 거야? 사내는 이제야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카라바조,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시작은 돈을 건 테니스 내기였다.


사내는 상대가 점수를 낼 때마다 보란 듯 씩 웃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사내는 계속해 판돈을 올렸는데, 돌아오는 건 연패뿐이었다. 돈도 탈탈 털리고, 그사이 조롱 섞인 타박까지 듣자 머리 끝까지 약이 올랐다. 다혈질의 사내는 울컥했다. 습관처럼 차고 다닌 칼을 빼들곤 돈을 돌려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상대도 성깔이 있기로는 만만찮은 사람이었다. 둘 중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흉기를 든 두 사람의 결투는 그렇게 벌어졌다.


어느덧 서로는 진심으로 맞붙고 있었다.


그렇게 온 기물을 때려부수며 싸우는 통에 사람들도 몰린 것이었다. 이 와중에 분노로 이성을 잃은 사내가 상대의 급소를 칼로 그었고, 그 결과 이런 변고가 생긴 것이었다.

카라바조, 'Narcissuss'

"아, 아니…. 나도 이럴 생각은…."


사내는 그제야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슬금슬금 물러섰다. 고개를 뻣뻣하게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그를 향해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사내는 이제 명백한 살인자였다. 그런 자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 비켜봐!" 정신이 든 사내는 인파를 가르며 마구 뛰었다. 그렇게 살해 현장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그가 어디로 도주하는지는 피 묻은 발자국이 성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버러지 같은 자식 같으니!" "언젠가는 저럴 줄 알았어." 구경꾼들 틈에서는 이런 말도 나왔다.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누군가는 가슴팍에 성호를 그었다. 남성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가래침을 탁 뱉는 이도 있었다. 깡패, 망나니, 막돼먹은 놈….그게 도망친 사내의 평소 별명이었다. 독보적인 한 '재능'이 없다면, 이미 진작에 마을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를 자였다. 흉악 범죄자가 된 그의 이름은 카라바조였다.


父母 모두 잃고…대도시서 운을 시험하다  

카라바조, 'Boy Bitten by a Lizard'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돌아보면 이들 중 상당수가 인격자는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단순한 시기와 질투는 물론, 외도와 폭행 등 사회적 지탄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의 문제적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카라바조였다. 카라바조는 1571년에 출생했다. 카라바조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다. 여기서 '다 카라바조'는 당시 밀라노 동쪽 마을 카라바조(Caravaggio)에서 태어났다는 뜻을 갖는다. 이 때문에 그 또한 동명의 카라바조 출신으로 여겨져 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가 밀라노 출신이었다는 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카라바조의 아버지는 석공 내지 건축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에 대해선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편이다. 이들은 얼마간은 밀라노에서 살았다. 하지만 1576년, 카라바조가 다섯 살이 된 그해 밀라노에 페스트가 상륙했다. 병마를 피해 온 가족이 피신한 곳이 카라바조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 형제 일부는 결국 숨지고 말았다.

카라바조, 'Young Sick Bacchus'

카라바조는 1584년, 열세 살 소년의 몸으로 밀라노에 돌아왔다.


그는 티치아노 베셀리오의 제자였던 시모네 페테르차노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라파엘로 산치오 등 르네상스 거장, 이들 이후 세대인 매너리즘 화풍의 장인들 작품을 모사했다. 그때부터 이미 성질머리가 나빴던 모양인지, 스승과 틈나면 충돌을 빚었다고 한다. 카라바조는 1590년에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해준 어머니도 잃었다. 카라바조는 이제 고아였다. 밀라노에서 좋은 추억 하나 빚지 못한 그는 미련없이 짐을 쌌다. 카라바조가 밟은 땅은 당시 문화 예술의 중심지, 로마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기 운과 재능을 시험해보기로 결심했다.

카라바조, '카드놀이 사기꾼', 1595, 캔버스에 유채, 94.2x130.9cm, 킴벨 아트뮤지엄

카라바조는 빈털터리였다.


카라바조는 공방과 종교 시설 등에서 기거했다. 그러나 가장 속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은 골목길과 싸구려 식당 등 도시의 가장 낮은 곳들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술꾼과 도박꾼, 집시와 좀도둑 등과 어울렸다. 허구한 날 이들과 술을 들이켰다. 술버릇이 고약했던 그는 거나하게 취할 때면 꼭 문제를 일으켰다. 말다툼에 휘말리는 건 으레 있는 일이었다. 폭행, 나아가 아예 패거리 싸움에도 제멋대로 끼어들곤 했다.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 와중에도 예술만큼은 놓지 않았다. 이 시기에 카라바조가 그린 대표작은 〈카드놀이 사기꾼〉이었다. 그림 내용은 단순했다. 소년 둘이 포커의 원조 격인 프리메로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뒤에 선 나이 든 남성이 수상해보인다. 이 남성은 왼쪽 소년이 쥔 패를 슬쩍 훔쳐본다. 곧장 오른쪽 소년에게 손가락 사인을 보여준다. 이를 확인한 오른쪽 소년은 손을 등 뒤로 보내 숨겨둔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이들 둘은 왼쪽 소년을 구워삶기로 한 사기꾼 일당인 셈이다. 하지만 그림 형식만큼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카라바조의 선과 색은 명징했고, 거기서 빚어지는 인물과 소품은 하나 같이 명쾌했다. 조명 밑에서 펼쳐지는 대중 연극의 극적 장면을 보는 듯도 했다. 당시 로마 미술계에서는 대상의 형태를 대놓고 왜곡하는 매너리즘 회화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 난해한 상징, 복잡한 구도 등도 이 기법의 핵심 특징이었다.

카라바조, 'Martha and Mary Magdalene'

그러니까, 이런 분위기에서 카라바조는 낯선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는 전통적 회화에 대한 낮은 관심과 이해도, 특유의 반항심 등이 이유로 거론되곤 한다. 결과적으로 그가 개척한 이 화풍은 훗날 미술사의 중요한 축이 되는 바로크 회화로 칭해진다. 하지만 카라바조가 이러한 바로크 기법의 선구자로 칭해지는 건 먼 미래 일이었다. 당장의 그는 사람들 틈에서는 문제아, 예술계에서는 대세를 못 따르는 주변인 취급을 받았다. 그 시절 꽤 소란스러웠던 별난 화가로 잊혀도 이상할 게 없는 삶이었다.


악마의 재능, 이보다 더한 악마의 인성  

카라바조, 'Amor vincit omnia'

그런 카라바조에게 귀인이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이었다. 당시 로마 내 손꼽히는 유력 가문, 메디치가(家)의 대변인 격이었던 인물이었다. 남다른 안목을 품은 추기경은 카라바조의 〈카드놀이 사기꾼〉에서 심상찮은 느낌을 받았고, 이에 후원자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 추기경은 부랑자와 같던 카라바조에게 남부럽지 않은 숙소와 음식을 제공했다. 두둑한 계약금과 함께 그림을 주문했고, 돈 많은 미술품 수집가 모임에도 초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라바조가 술과 화에 취해 벌이는 사건사고를 웬만해선 다 덮어줬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더욱 자유분방해졌다. 든든한 뒷배가 생긴 만큼 더더욱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추기경 또한 이 혈기왕성한 화가의 새로운 시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기조였다. 카라바조는 특히나 확연한 명암 대비를 통한 극적 효과 창출에 천착(穿鑿)했다. 그의 그림은 더 강렬해졌다. 그렇게 해 단아한 르네상스 화풍, 왜곡과 변형의 매너리즘 화풍과 명확한 차별점을 보였다.

카라바조, '바쿠스', 1598, 캔버스에 유채, 95x85cm, 우피치 미술관

이 시기 카라바조가 추기경에게 보인 그림 중 대표작은 〈바쿠스〉였다.


술의 신 바쿠스는 뒤로 장막이 깔린 무대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선은 오롯이 그에게 쏠린다. 여태 이렇게까지 음란한 눈빛을 가진 바쿠스는 없었다. 게슴츠레한 표정의 바쿠스가 포도주를 가득 채운 잔을 든 채 감상자를 보고 있다. 얼굴이 붉고, 포도주병에 거품이 남아있는 걸 볼 때 자신은 이미 몇 모금을 들이켠 게 분명하다. 바쿠스는 옷을 여민 끈을 언제든 풀 준비를 하고 있다. 푹 익은 과일은 그 자체로 먹음직스럽지만, 신선함이 오래 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리 와. 모든 게 상하기 전에 어서 즐기자." 바쿠스는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술꾼 카라바조가 자신을 바쿠스로 둔 채 거울을 보며 이 그림을 그렸다는 설이 있다.

카라바조, '메두사', 1597~1598, 60x55cm, 우피치 미술관

카라바조의 〈메두사〉도 이 무렵에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다. 메두사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원래는 윤기나는 머리칼을 가진 절세미인이었지만, 여신 아테나의 미움을 받아 불행한 운명에 처한다. 자랑이던 머리카락은 하나하나 실뱀으로 바뀌었다. 멧돼지의 어금니 같은 이가 돋아나 외모도 흉측해졌다. 가장 큰 재앙은 눈이었다. 이제 누구든 그녀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딱딱한 돌로 변해버렸다. 영웅 페르세우스가 그런 메두사의 목을 무참히 벤다. 아테나가 그녀의 머리를 취했다. 그녀가 종종 들고 다닌 방패 아이기스에 이를 쑥 넣어버렸다. 카라바조는 〈메두사〉를 통해 메두사의 머리가 들어간 방패를 그렸다. 그림 속 메두사는 여전히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뒤엉킨 뱀 또한 주위를 살피며 호전적 자세를 취한다. 잘린 그녀의 목에서는 여전히 새빨간 액체가 흐르고 있다. 그 시절로는 누구든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충격적 작품이었다.

카라바조, 'The Holy Family with Saint John the Baptist'

그런데, 카라바조의 이처럼 대담한 기법은 1600년에 들어 점점 주목받았다.


추기경의 눈썰미가 이번에도 적중한 셈이었다. 그것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었다. 당시 북유럽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가톨릭의 본고장인 로마는 이러한 분위기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개혁이란 이름 아래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게 탐탁지 않은 것이었다. 로마 종교계는 대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강력한 선전물을 필요로 했다. 아울러 개혁 세력 또한 허례허식의 옛 그림 아닌 새로운 형태의 장식물을 찾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카라바조의 개성 강한 그림은 어느 진영에도 어울릴 수 있는 것이었다.



  

카라바조, '성모의 죽음', 1601~1606, 캔버스에 유채, 369x245cm, 루브르 박물관
카라바조, '성모의 죽음'(일부 확대), 1601~1606, 캔버스에 유채, 369x245cm, 루브르 박물관

하지만 카라바조는 그런 평가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그 또한 기본적으로는 주문자의 입맛에 맞게 그림을 그려주긴 했다. 이런 작품들은 확실히 인기가 있었다. 다만 카라바조는 이들의 말만 온전히 따르며 그림을 작업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반항아인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보였다. 카라바조는 1603년, 종교계를 향해 희대의 논란작을 내놓았다. 제목은 〈성모의 죽음〉이었다. 이 그림 또한 영화 내지 연극의 한 장면을 보듯 압도적 몰입감을 준다. 화폭에선 붉은색 옷을 입은 채 죽어있는 여성이 성모인 게 확실해 보였다. 성모가 너무도 '인간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성모는 팔을 벌린 채 사실상 널브러져 있다. 두툼한 턱과 목, 겹겹이 겹친 주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굵은 몸, 튼튼한 발목은 결코 신성해보이지 않았다. 이를 놓고 카라바조가 익사한 매춘부를 모델로 삼았다는 소문도 퍼질 정도였다. 당시 성모의 죽음이라면 고된 생을 마친 성모가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까지 그리는 게 정석이었다. 카라바조는 이 관행을 대담하게 깬 것이었다. 성스러움은커녕 충격과 경악만 안긴 격이었다. 이 그림은 원래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 로마 교회에 걸릴 예정이었지만, 쏟아지는 비난에 결국 없던 일이 됐다. 다만 카라바조 특유의 강렬함이 잘 녹아든 만큼 얼마 안 돼 새 주인을 찾았다. 카라바조는 이런 식으로 어떻게든 그림을 팔긴 했다. 주문도 끊이질 않았다. 한창때 카라바조의 연봉은 요즘 시대 대학교수 연봉의 4배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 그가 가진 독보적 재능은 그림 실력이었다. 이제는 됨됨이는 별로지만 그림 실력만은 출중한, 그런 특이한 장인으로 살아도 이상할 게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찰나일 뿐이었다.


폭행·모욕·난동…답도 없던 행보  

카라바조,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또 그놈이야? 이번에는 또 무슨 사고를 쳤는가?"

"그게…. 접시로 웨이터 얼굴을 박살 냈다고 합니다."

"하, 참!"


1604년, 4월. 카라바조는 식당 점원을 폭행한 혐의로 붙잡혔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점원 얼굴에 아티초크 튀김이 담긴 접시를 내던진 것이었다. 당시 카라바조는 로마 수사당국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문제는 그놈의 개차반 같은 성격이었다. 성공하면 할수록 망나니 같은 태도는 더 악화하기만 했다.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599년경, 캔버스에 유채, 145x195cm, 로마 국립 고전회화관
카라바조, '세례 요한의 참수', 1608, 캔버스에 유채, 361x520cm, 몰타 성 요한 대성당

카라바조의 잔혹한 성향과 취향은 그의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피비린내나는 참수 장면 그리기를 유난히도 좋아했다. 목이 잘린 메두사를 그린 건 약과였다. 적장(敵將)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한 후 목을 베는 과부 유디트, 헤롯 왕을 홀린 살로메의 청에 의해 목이 날아간 세례 요한 등도 거리낌 없이 그렸다. 심지어 이 모든 그림이 훗날 그의 대표작에 오를 정도로 정성껏 작업했다. 특히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금발 미녀(유디트)의 우락부락한 장군(홀로페르네스) 암살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세기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카라바조, 'The Seven Works of Mercy'

카라바조는 외출을 할때면 늘 허리춤에 칼을 찼다.


전장에 임하듯 늘 비장하게 거리로 나섰다. 그런 그는 튀김을 먹다 접시를 내던진 일 말고도 쉴 새 없이 사고를 쳤다. 폭행 혐의, 경관 모욕 혐의, 불법 무기 소지 혐의 등의 딱지가 자꾸 붙었다. 방세를 자꾸 미뤄서, 여자 모델의 약혼자와 시비가 붙어서, 뜬금없이 몽둥이를 마구 휘둘러서(술에 취했던 것으로 추정),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흉기에 찔린 채 발견돼서(?) 등으로도 구설에 올라야 했다. 그는 6년간 감옥에만 6차례 갇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도 추기경 등 든든한 믿는 구석의 도움으로 큰 고생 없이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1606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카라바조는 끝끝내 선을 넘고 말았다. 카라바조는 한 지인과 돈을 걸고 테니스 경기를 했다. 상대는 그 못지않게 한 성깔한 라노치오 톰마소니라는 사내였다. 카라바조는 시합이 잘 풀리지 않자 늘 그랬듯 억지를 부렸고, 그러다 이 자를 죽이게 된 것이었다. 내기가 아닌 치정, 정치적 분쟁 등 문제로 다투다 상대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 뒤에 있는 유디트', 1598~1610년경, 캔버스에 유채, 144x173.5cm, 개인소장

추기경과 고위 성직자들도 살인만큼은 없던 일로 해줄 수 없었다.


숨진 톰마소니의 집안이 꽤 잘나가는 가문이었기에 더더욱 덮어주기가 힘들었다는 설도 있다. 도망친 카라바조는 곧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그는 불안감에 이 절차를 견디지 못했다. 카라바조는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또 도주했다. 결국 그는 로마에서 당시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목에는 현상금까지 걸렸다. 카라바조는 몸담았던 도시에서 벗어난 채 정처 없이 내달렸다. 살인자이자 도망자가 된 젊은 화가는 그제야 그간 벌인 못돼먹은 행태를 후회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기사 지위 얻었지만…또 물거품으로  

카라바조, '기둥에 묶인 예수', 1607, 캔버스에 유채, 135.5x175.4cm, 루앙 시립 미술관

다만, 로마의 스타 화가로 군림했던 카라바조는 곳곳에서 그의 추종자를 만날 수 있었다.


카라바조는 어딜 가도 환대를 받았다. 섭섭지 않은 보수로 그림을 의뢰하는 이가 줄을 섰다. 그의 작은 스케치 한 점을 얻을 요량으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사람 또한 많았다. 탈주자가 된 카라바조의 말년 대표작으로는 〈기둥에 묶인 예수〉가 꼽힌다. 카라바조는 그가 빛과 어둠을 한층 더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는 걸 이 그림으로 증명했다. 옛 작품과 비교하면 화폭 속 빛은 더 밝아졌고, 어둠은 더 진해졌다. 이렇듯 붓질은 한층 더 과감해졌지만, 부담스러운 느낌 없이 오직 몰입감만 더해질 뿐이다. 아울러 예수의 촉촉한 눈빛에서 느낄 수 있듯, 그는 그림에 강렬함과 함께 깊이감을 넣는 방식 또한 완벽하게 터득했다. 이로써 눈에 각인되는 작품 수준을 넘어, 마음속에 각인되는 작품을 빚는 경지까지 도달했다는 걸 내보였다. 카라바조가 예수의 우수에 찬 표정과 상처 없는 몸을 통해 자신의 억울함을 표했다는 말도 있다. 물론, 그랬다고 한들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입장이겠지만.


나폴리에서 잠시 숨을 돌린 카라바조는 1607년에 몰타섬으로 갔다. 사고를 친 뒤 1년여만이었다.


카라바조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죄를 말끔히 지울 수 있는 사면권을 얻는 일이었다.


중세 십자군 시대 이후부터 몰타섬은 기사 작위의 남성들이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카라바조, 'Calling of Saint Matthew'

카라바조는 이곳에서 불체포 특권이 있는 기사 신분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 다음 떳떳이 교황에게 완전한 사면권을 요청할 요량이었다. 원래 기사의 십자가는 귀족만이 받을 수 있었지만, 이 기회의 섬은 특별한 업적 내지 공헌만 있다면 귀족이 아니어도 그 상징물을 수여했다. 일반인이라면 감히 시도도 못할 만큼 심사 기준이 높은 게 문제이긴 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뜻을 이룰 자신이 있었다. 몰타섬에 자리 잡은 그는 종교시설을 장식할 그림과 기사단장의 초상화 등 모든 작업에 성심성의껏 임했다. 작업하는 족족 세기의 명작이 탄생하니, 그게 바로 업적이자 공헌이었다.


카라바조는 고생 끝에 1년여만에 기사 작위를 얻었다.


드디어 보통의 삶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기쁨은 잠시였다. 카라바조는 여전히 구제 불능이었다. 그놈의 못된 성질이 재차 발목을 잡아 끌어내렸다. 그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다시 사고를 쳤다. 이번에는 몰타 기사단 일원과 술을 마시다 시비가 붙었다. 결국 칼싸움을 또 했고, 이번에는 상대에게 중상을 입혔다. 여기서도 감옥에 갇힐 뻔한 그는 다시 먼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힘들게 따낸 기사 신분은 도로 빼앗겼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뒤늦은 깨달음, 초라한 최후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10, 캔버스에 유채, 125x101cm, 보르게세 미술관

제발…. 제발 좀 정신 차려라.


카라바조가 혼잣말을 했다. 이 말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하는 질타였다. 카라바조는 할 수만 있다면 자기 멱살을 휘감고 싶었다. 그만큼 자신에게 질렸다. 대체 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울컥하는지, 술만 마시면 왜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을 참을 수 없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부랑자가 된 그는 다시 야산과 습지를 떠돌았다. 때때로 후회와 자기혐오 따위 감정이 차오르면 머리를 그대로 땅에 찧었다. 그러고는 짐승처럼 흐느꼈다. 카라바조는 이 무렵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을 그렸다. 다윗과 골리앗은 성경 속 등장인물이다. 양치기 소년 다윗과 거인 장군 골리앗은 전장에서 일대일로 맞붙는다. 다윗은 시냇가에 있던 조약돌, 완전무장을 한 골리앗은 긴 칼을 든 채 대치한다. 결과는 뻔해보였다. 모두가 골리앗의 승리를 점쳤다. 이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다윗이 휙 던진 조약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정통으로 때렸다. 골리앗은 그대로 머리뼈가 박살 난 채 즉사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저벅저벅 걸어온 다윗은 골리앗의 목을 무 자르듯 숭덩 벤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딱 그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의기양양해도 이상할 게 없는 다윗의 얼굴이 썩 좋지 않다. 난데없이 일격을 당한 골리앗의 표정 또한 당연히 충격과 공포에 젖어있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일부 확대), 1610, 캔버스에 유채, 125x101cm, 보르게세 미술관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일부 확대), 1610, 캔버스에 유채, 125x101cm, 보르게세 미술관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일부 확대), 1610, 캔버스에 유채, 125x101cm, 보르게세 미술관

사실, 카라바조는 다윗을 과거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 골리앗을 교만과 분노로 가득한 지금의 자신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바람,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의 추하고 못된 모습 따위 당장 끊어내겠다는 마음에서 참회하듯 작업한 작품이었다. 다윗이 쥔 칼에는 'H-AS-OS'란 글자가 새겨졌다. 그것은 라틴어 'HumilitAS Occidit Superbiam'의 약자로 추정되고 있다. 그 뜻은, '겸손이 교만을 이긴다.' 카라바조가 진작 달고 다녔어야 했을 말이었다.

카라바조, 'The Inspiration of Saint Matthew'

몰타섬에서 도주한 카라바조는 일단 시칠리아 땅을 밟았다. 그곳에 있는 옛 친구 집에 잠시 머물렀다.


계속 거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카라바조는 다시 나폴리로 향했다. 카라바조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쪽잠을 자는 순간에도 신발을 벗지 못할 정도였다. 카라바조는 1609년, 결국 나폴리 근처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 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다쳤다. 부상이 어찌나 심했는지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 지경이었다. 카라바조는 그래도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품은 그림에 대한 독보적인 재능을 여전히 믿었다. 카라바조는 교황의 사면을 기대하며 다시 로마로 향했다. 피로와 화병, 불안과 편집증에 시달린 그는 결국 목적지로 가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1610년, 서른아홉 살 때였다. 결정적 사인은 이질과 말라리아 등 질병 혹은 납 중독, 아울러 암살 등도 거론된다. 카라바조는 그의 명예롭지 않은 여러 일화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했다. 이들을 지칭하는 말로 이른바 카라바지스트라는 용어도 생겼을 정도였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부터 렘브란트 반 레인, 디에고 벨라스케스 등 한 시대와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 또한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자인했다. 지금도 카라바조는 위대한 거장 중 독보적 수준의 악마적 기질과 재능을 함께 가졌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카라바조, 'Saint Jerome'

<참고 자료>

불멸의 화가 카라바조, 고종희, 한길사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 그리고 죽음, 고일석, 좋은땅

카라바조, 질 랑베르, 마로니에북스

카라바조 작품에 나타난 죽음의 모티프에 관한 연구(A Study of the Motif of Death in the Works of Caravaggio), 이지현, 한국미술치료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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