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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창근 Jun 03. 2019

데자뷔, 도플갱어 그리고 대만

                                                                                        

데자뷔, 도플갱어 그리고 대만


최창근


한국의 ‘도플갱어’ 같은 존재이자 데자뷔를 일으키게 하는 대만을 고찰하면 한국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볼 수 있다. 
한국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반사경 같은 나라가 바로 대만이다. 
우리가 ‘눈에서 잠시 멀어진’ 대만을, 타이베이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데자뷔(Déjà Vu)와 도플갱어(Doppelgänger) 대만을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두 단어가 떠오른다. 
대만에서의 유학 시절, 그들이 당면한 현실을 보며 어디선가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듯한 기분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아마도 그건 대만과 한국 두 나라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문가들의 시각도 다르지 않다.  다수 비교 정치학자들은 ‘지구상의 가장 유사한 나라’의 사례로 남·북한이 아닌, 한국과 대만을 든다. 
대만은 한국과 ‘닮은 듯 다른, 다른 듯 닮은 나라다. 


1992년 8월 24일, 한국 정부는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수교하고,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와는 공식 결별했다. 그로부터 26년, 대만은 많은 한국인에게 ‘잊힌 이웃’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한국과 대만은 가깝다. 
두 나라는 서로가 6~7번째로 비중이 큰 무역 대상국이다. 

한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는 중국(중화인민공화 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만(중화민국)과의 공식 외교 관계가 끊어 졌다. 다만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두 나라는 단교 전보다 훨씬 더 긴밀해졌다. 게다가 대만을 휩쓸고 있는 한류(韓流) 열풍에 힘입어 한국을 찾는 대만 관광객 수는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대만 다시 보기’ 바람을 타고 대만을 찾는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작년 한 해 대만을 찾은 한국인은 100만 명이 넘는다.



한국과 대만은 섬나라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만은 ‘자연적’ 섬나라, 휴전선으로 북단이 막힌 한국은 ‘인공적’ 섬나라다. 둘 다 국토 면적은 좁고 부존자원은 부족하다. 기댈 수 있는 것은 인적자원 뿐이다. 
역사 궤적도 닮았다. 한국은 36년, 대만은 50년 일제 식민 지배를 받았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갈려 내전을 치렀고 분단과 대립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강의 기적’, ‘대만의 기적’이라 칭하는 고도 경제성 장을 이뤄 ‘아시아의 작은 용’으로 불렸다. 오랜 권위주의 통치기를 거쳐 민주화가 이뤄졌다. 그리고 ‘헌팅턴 테스트’로 일컫는 두 차례 의 정권 교체 테스트Two Turnover Test도 비슷한 시기에 통과해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은 후기 개발도 상국의 대표 성공 사례로 찬사를 받았다. 

한국과 닮은 나라 대만도 국제사회에서 처지는 천양지차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중견국가M(iddle Power)로서 지위를 탄탄히 다져가고 있다. 
반면 대만은 국민·영토·주권이라는 국가 3요소를 다 갖추었음에도 나라로서 대접받지 못하는 기구한 처지다. ‘대만 의 공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 R.O.C’이지만 국제 무대에서 사용하지 못한다. 올림픽 등 국제 행사에서는 ‘중화타이베이中華臺北, Chinese Taipei’라는 명칭만 허용된다. 

1912년 1월 1일, 쑨원(孫文)은 새로운 중국, 중화민국 건국을 선언했다. 1925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중화민국은 분열되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은 전쟁과 합작을 반복하며 치열하게 싸웠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협상을 벌여 향후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했다. 서로 간 이념 차이, 오랜 내전으로 인한 감정의 골이 깊은 탓에 결과는 실패였다.  1946년 재개된 국공내전 최종 승리는 중국공산당에게 돌아갔다. 1949년 12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천도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은 ‘중화민국은 이미 멸망한 것’으로 간주했다. 대만으로 쫓겨난 장제스는 절치부심하며 재기를 도모했다. 미국을 위시한 자유세계 국가들도 대만 편에 섰다. 1945 년 창설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도 유지했다. 


대만의 국제적 고립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부터다. 1971년 헨리 키신저가 비밀리에 중국을 찾은 후로 미·중 데탕트가 시작 되었다. 그해 10월 ‘대만의 중화민국’은 창설 멤버로 참여한 유엔에서 퇴출되었다.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도 중국으로 넘어갔다. 이를 기점으로 전 세계 대다수 국가가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1972년 일본, 1979년 미국마저 대만을 버리고 중국을 택했다.  이후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고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20개국 선에 그친다.  최근 유럽 유일 수교국인 바티칸마저 중국 손을 잡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대만은 작지만 강한 나라다. 남한 면적 3분의 1 정도인 36,193km²에 인구는 2,355만 명이지만 2017년 기준 경제 규모 세계 22위, 1인당 GDP는 24,028달러로 세계 37위다. 외환 보유고는 약 4,200억 달러로 중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스위스에 이은 세계 5위로 3,600억 달러 선인 한국보다 많다. 1인당 구매력 평가(PPP) 기준 소득은 49,827달러로 세계 18위, 42,629로 27위인 일본, 39,387달러 29위인 한국을 앞선다. 
타이베이 상공에 우뚝 솟은 타이베이 101빌딩은 경제 번영을 상징하는 금자탑이다. 


대만의 문화 부문 소프트 파워도 무시할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 전통의 번체繁體 한자 사용이다. 글씨뿐 아니라 어법이나 표현 면에서도 고문古文에 충실하다. 표현이 격식있고 세련되며, 어휘도 풍부하다. 대만에서 사용하는 중국어에는 아취(雅趣)가 있다. 이는 간체(簡體) 한자로, 오늘날 다수 중국인이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번체와 고문에 익숙하지 않아 자신들의 조상이 남긴 글들 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는 문화 단절 현상을 겪는 것과 비교된다. 번체자를 고집하는 대만은 중화 문화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자부심을 지녔다. 우수한 교육제도도 빠뜨릴 수 없다. 1968년 9년 무상 의무교육 실시 후 2014년 고등학교까지 12년으로 연장 실시했다. 모두 한국보다 20년 앞선다. 


“베이징 고궁(故宮)박물원에는 박물(博物)이 없고,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는 박물이 없다."

양안 분단 후 베이징과 타이베이로 나뉜 고궁박물원을 두고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1965년 타이베이에 개관한 고궁박물 원에는 송-원-명-청 4대 왕조 궁정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수량으 로는 전체 유물의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질적으로 가장 빼어난 작품만 엄선해 선보이는 것이다. 
중화문화의 정수를 맛보려면 베이징이 아닌 타이베이로 가야 한다. 국립고궁박물원은 영국 대영박 물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미국 스미소니언자연사박물관, 러시 아 에르미타주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5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대만은 출판 대국이다. 인구 대비 신간 도서 출간 비율이 579명당 1권, 325명당 1권인 영국에 이은 세계 2위다.  독서 인구가 많다는 방증이다. 독서 인프라도 탄탄하다. 대학·공공도서관은 지역사회와 지적 자산을 공유하고 있다. 크고 작은 서점들도 지식 살롱 역할을 한다. 대만 최대 서점 체인인 청핀서점(誠品書店)은 아시아 정상의 자리에 서 있다. 


“아름다운 섬이여!”라는 뜻의 포모사(Formosa, 美麗島)는 대만의 미칭(美稱)이다. 명실상부하게 대만은 아름답다. 기암괴석이 가득한 예류(野柳), KBS 드라마 <온 에어On Air>촬영지인 르웨탄(日月潭), 동남아시아 최고봉 위산(玉山)이 자리한 아리산(阿里山), 대만 원주민의 비애가 서린 타이루거(太魯閣) 협곡,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펑후澎湖제도 등 대만 섬은 자연이 선물한 볼거리로 넘쳐난다. 자연환경보다 아름다운 것은 대만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방인에게도 미소로 다가선다. 


친절한 대만 사람들은 여유도 넘친다. 한국이 살아가는 삶의 템포가 ‘프레스토(Presto)’라면 대만은 ‘라르고(Largo)’다.  한국 사람에게는 느려 보이지만 무엇을 하든 확실히 하는 것을 추구한다. 
‘만만디(漫漫的)’를 영어로 옮기자면 단순히 ‘느리게)Slowly)’가 아니라 ‘확실히)Surely)’가 더해져서 ‘Slowly but Surely’라고 해야 의미가 정확해 진다. 


하지만 대만은 그들만의 속도로 지속 가능한 행복을 찾는다. 

후기 개발도상국의 모범생으로 꼽히는 대만은 경제성장 이후 삶이 풍요로워졌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우리네 속담처럼 경제적 풍요 덕분에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가진 자의 여유’다. 대만 사람들은 느릿함 속에서 작지만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자유’는 대만을 상징하는 또 다른 키워드다. 대만은 1949 년부터 1987년까지 38년 계엄령이 지속되었다. 계엄령하에서 정 치적으로는 오랜 권위주의 체제를 겪었지만 민주공화정 체제를 유지해 온 것만은 변함없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2000년대 들어서는 아시아의 모범 민주국가로 거듭났다. 대만은 중화권에서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자유를 동시에 누리는 유일한 국가다. 


개인의 삶도 자유롭다. 내실을 추구하는 대만 사람들은 허례허식 에 신경 쓰지 않는다. 행동도 옷차림도 자유분방하다. 개인의 삶을 중요시하는 만큼 상대방도 존중하고 배려한다. 다른 사람의 종교 나 이념을 존중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는 정치·사회 변화에도 반영 되고 있다. 2011년 공산주의 정당 설립을 불허하던 인민단체법이 개정되면서 공산당도 합법화했다. 2017년에는 아시아의 첫 동성 혼 합법 국가가 되었다.

‘비오는 날의 수채화’.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 풍경을 보면 이 노래가 떠오른다. 채도가 낮은 파스텔 톤의 수채화 같은 색을 띤 도시 가 타이베이다. 내실 있다고는 하지만 소박한 타이베이 사람들의 터전, 타이베이는 수수하다. 낡고 오래된 건물로 가득하다. 그나마 상당수는 칠이 벗겨지거나, 이끼가 끼었다. 도시 곳곳에는 금방이 라도 쓰러질 듯한 낡은 집들도 있다. 우기(雨期)인 겨울이면  도시의 명도(明度)는 더 낮아진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타이베이가 지닌 매력은 은은함이다. 보고 또 봐도 싫증나지 않는다. 낡고 오래됨이 전하는 편 안한 매력도 빠뜨릴 수 없다. 채도(彩度) 낮은 색상이 자신을 숨기고 다른 색감을 살려주는 역할을 하듯, 타이베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고 사람들 저마다의 색을 빛나게 만들어준다. 이런 타이베이의 또 다른 매력은 다채로움이다. 동서양이 만나고, 오래된 것과 새로운 곳이 공존하는 도시. 이곳에서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다.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한국인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준다. 


한국의 ‘도플갱어’ 같은 존재이자 데자뷔를 일으키게 하는 대만을 고찰하면 한국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볼 수 있다. 한국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반사경 같은 나라가 바로 대만이 다. 우리가 ‘눈에서 잠시 멀어진’ 대만을, 타이베이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다. 

<나우매거진> Vol. 2.  프롤로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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