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도 발리 여행
신나다 못해 고된 하루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은 때때로 아쉽다. 평균치보다 많이 즐거운 탓일까.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좀 더 걷기로 했다. 습도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길가에 늘어선 가게 구경이나 할까 했다.
차도엔 어김 없이 사람을 보지 않는 차들이 앞다퉈 지나갔고, 오픈된 채로 노래방 기계가 설치된 술집에서는 노란 머리를 한 백인들이 정신 없이 레이디 가가의 파파라치를 불렀다. 그 일대는 차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 소리를 더불어 두 여자의 음정 박자 맞지 않는 노래 소리로 가득 찼다. 친구들은 그들을 가리키며 웃었고, 난 사실 어젯밤 열심히 찾아뒀던 맛집이 어디있는지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근처에 있으면 친구들을 데리고 내일 점심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아무리 살펴도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 중 하나가 이제는 다리가 아프다며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다른 친구들도 내심 다리가 아팠는지 모두들 그 의견에 동의했다. 아직 기운이 남았던 나만 골목 안으로 들어가 안 본 길로 돌아가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여행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는 게 좋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길은 이어지니까.
나 혼자만의 생각이긴 하지만, 난 길을 곧잘 찾는 편이었다. 블록별로 잘 구별되어진 도시에서 나고 자라기도 했고, 대부분 낯선 길로 나서기 전 구글맵으로 모양을 익혀둔다. 때문에 길의 모양과 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방향을 보면 어림짐작으로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설픈 경험 속에 그 어림짐작은 꽤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느낌만 잘 살린다면 길 찾기에 능통한 친구들을 제외하곤 길 잘 찾는 사람 축에 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은 뭐가 문제였는지. 맛집에 한 눈을 팔아 길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 여자들의 파파라치 노래에 정신을 빼앗겨 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길을 잃었다.
친구들은 내 덕분에 골목을 돌고 돌았다. 슬슬 나조차도 다리가 아파왔다.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기엔 내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고, 게다가 너무 멀리 와버렸다. 중간에 숙소로 향하는 골목이 하나 더 있을 거란 내 생각관 다르게 발리의 골목은 제멋대로라고 칭하기도 부끄럽게 개미굴마냥 뻗어 있었다. 이 골목길을 걸을 수 있게 정하면 그건 갈 수 있는 길이라는 식이었다. 사람 둘이 겨우 다닐만한 좁은 골목길엔 차가 들어오고, 그 양 옆으로는 장사꾼들이 아기자기하지만 발리 골목길 어디에나 늘려 있는 그런 기념품을 팔았다.
물론 그런 요란거리를 구경할 정신이 없던 난 겨우 갓구글맵 덕분에 숙소보다 훨씬 더 걸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갈 수 있기만 하면 길이 되는 희안한 덴파사르에서 왜 하필이면 숙소로 가는 골목길은 없었을까? 도대체 왜 그렇게나 긴 길의 중간에 통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두지 않았을까? 비효율과 느긋함이 일상이다 싶은 인도네시아에서 문득문득 느껴지는 이런 형태의 의문감도 잠시. 그것이 의도였든 의도가 아니었든 우리는 너무 많이 걸었고, 나는 얼른 지친 일행을 숙소로 인도해야 했다. 나는 바쁘게 머리를 써서 구글맵 속 지도와 내가 서있는 지도를 동시화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골목 꺽어서 쭉 가면 바로 우리 숙소야."
골목을 꺽고 나서 그 말을 했으면 좋았을 걸. 내 해맑은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물벼락이 쏟아졌다. 누가 보면 일부러 물방울을 준비해뒀다가 준비 땅, 하고 출발시킨 것처럼 일제히 쏟아졌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면서 뛰었다. 갑작스런 비에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겨우 비를 피할만한 지붕이 있는 가게 밑에 옹기종기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자 그저 입만 쩌억 벌어졌다. 슬쩍 봐도 빗방울이 아닌 물줄기다 싶은 물들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인도네시아에 약 3개월 살았지만, 그런 비는 발리에 와서야 처음 봤다. 가히 폭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차들은 엉금엉금 기어 움직이고, 우산을 쓰고 걷던 사람들도 안 되겠는지 처마 밑으로 비를 피했다. 비가 내리는 걸 인지하자마자 지붕 밑으로 피한 거 같은데, 우리 옷은 잔뜩 젖어 있었다. 그 길의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비를 바라 보았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면을.
저 멀리서 아까의 파파라치를 떠올리게 하는 노란 머리 두명이 지붕 밑으로 피신을 왔다. 옷에 잔뜩 뿌려진 빗방울을 손으로 털어내지만 소용 없다. 이미 옷은 축축히 젖었고 그나마 말라있던 손바닥마져도 이제는 젖어버렸다. 눈이 마주치자 어이 없어하며 서로 웃었다. 비가 내리는 밖으로 손바닥을 내밀어보자 수돗꼭지를 튼 거처럼 세차게 물줄기가 손바닥을 훑었다. 맞은 편 바의 주인은 우릴 보고 웃으면서 들어와서 맥주를 마시고 가라고 손짓했다. 살짝 솔깃했지만 그 잠깐 사이 꽤 젖어 버려서 제안은 거절한다. 금방 그치겠거니, 열대성 기후의 소나기겠거니, 우린 해변 바로 옆에 있다는 걸 망각하고 지붕 끝에 한참을 서있었다.
비는 그치지 않고, 대신 아까보다는 적게 온다. 조금만 참으면 그칠 거 같은데 친구 하나가 이대로 숙소에 뛰어 가잔다. 자신은 너무 피곤하고, 빨리 가서 씻어야 된단다. 우산이 있긴 있다. 사람은 다섯인데 우산은 하나다. 동요 속에 나오는 동생 별명들같다.
"이 정도 비는 맞을 수 있을 거야."
친구 하나는 그렇게 말하고 듬직하게 앞을 나섰다.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될대로 되라는 생각과 함께 빗줄기로 뛰어 들었다. 옆에 함께 있던 노란 머리들은 이미 가게로 들어가 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 역시 흘깃 그들을 보며 처마 밑을 나섰다. 우산은 우산 주인과 우산 주인 옆에 있는 친구가 차지했다. 나머지는 무작정 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 그렇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끔 비가 오는 날엔 집에 가면서 내리는 비를 맞곤 하는데, 이렇게 대놓고 비를 맞아본 건 처음이었다. 것도 다른 사람과.
생각보다 먼 길을 걸어온 탓에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싹 다 젖었다. 물론 속옷까지 싹 다 젖어버렸다. 온 몸의 끝자락에서 물방울이 톡톡 떨어진다. 머리카락, 소매 끝, 운동화 끈까지. 먼저 출발한 덕분에 먼저 도착한 친구는 다른 친구와 함께 화장실에 들어갔다. 끼어 들어갈 수 없는 나머지는 방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우리가 숙소에 거의 도착하자 비는 그쳤다. 폭우는 물웅덩이만 잔뜩 남겼다. 모기의 나라답다. 엄청난 폭우는 물웅덩이와 함께 장면 하나를 남겼다. 깔깔 거리며 같이 비를 맞는 시간 같은 이상한 추억의 장면이었다.
얘기만 봐선 우리가 체육복에 츄리닝을 입은 거 같지만, 우린 발랄한 체크무늬 치마에 샤랄라한 동남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분홍색 체크무늬 치마 끝으로 물방울이 똑똑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똑. 똑. 똑. 이 사실은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