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자가 혼자 여행을 하는 이유

혼자 떠나는 2박 3일의 제주여행.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by 김진욱

2026년 3월 13일 오전 9시 현재 내 앞에 펼쳐진 상황이 꿈만 같다. 파도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바다 내음이 콧가를 스쳐 지나갈 정도로 가까운 곳에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기업 CEO가 사용할만한 쾌적하고 고급스러운 스위트룸 소파에 몸을 젖힌 채 통창 너머 푸른 바다를 바라본다. 아일랜드식 테이블 위에는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기 위한 노트북 하나 놓여 있고 노트북 옆에는 태블릿 PC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를 위해 클래식 기타를 연주한다. 연주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객실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곳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환상의 섬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금호리조트 스위트프리미어룸이다.

오랫동안 꿈꿔온 시간이다. 당초 이번 제주여행은 결혼 28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야심 차게 준비한 프로젝트다. 2개월 전부터 호텔, 항공, 렌트, 음식점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ISTJ 성격인 나는 여행에서 즐기는 시간보다 여행을 준비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만족감을 느낀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의 일정으로 함께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예약을 취소하자니 비용 손실이 상당하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처럼 아내의 동행일정을 취소하고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아내의 쿨한 재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중년의 남자가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낯선 모습이다. 58세 중년의 남자가 캐리어 하나 들고 김포공항에서 체크인하고 제주에 도착해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까지는 잘 넘어갔다. 그런데 렌터카 회사에서 제2운전자를 등록하라 해서 "혼자 왔다"고 하니 슬그머니 쳐다본다. 숙소인 금호리조트제주 프런트에서도 직원이 "혼자 오셨느냐?"라고 물어보며 숙소키를 2개 주는데 느낌이 세하다. 직원에게 건네받은 키를 들고 배정받은 5층 숙소문을 열으니 숙소 통창 너머로 바다가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 있다.. 이 순간 제주여행의 모든 것을 얻었다.

잠시 짐을 정리하고 소파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 마음속의 무슨 동기가 이번 여행을 가능하게 했을까? 첫째, 점점 늦어지는 승진에 대한 부끄러움과 나이 들수록 소멸되는 자신감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들었다. 2017년 5월 사무관으로 승진했으니 벌써 사무관 10년 차이다. 소속된 기관에서는 평균적으로 사무관(팀장)에서 서기관(과장) 승진 소요기간이 9년-10년이다. 숫자만 볼 때는 결코 늦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사무관 동기들은 30% 이상 서기관으로 승진하였다, 그중 일부는 조직의 핵심보직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나만 무인도 섬에 버려진 패배자 낙오자처럼 초라해지며 급속하게 자신감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국 주무팀장 근무 2년. 과거에는 특별한 범죄나 과오가 없으면 경력으로 승진해 나가는 자리이다. 더욱이 현재 담당하는 업무는 민선 8기 공약사항, 도정 핵심과제가 가득한데도 승진에서 밀리는 것을 보면 고구마 10개 먹고 물 안 마신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퇴직시점도 가까워 오고 지금 당장 서기관(과장)으로 승진한다고 해도 일할 수 있는 기간은 고작 1년이다. 이 같은 절박함 때문인지 승진생각만 하면 가슴 통증이 밀려온다


두 번째, 준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공포감으로 엄습해 온다. 현재의 법령으로는 내가 퇴직하는 시점은 2028년 6월이다. 공무원에서 민간인으로 해방되는 날이다. 물론 기쁘고 즐거워해야 할 날이다. 그동안 30년 동인 국가와 특별권력관계로 국민의 기본권 행사조차 자유롭게 행사하지 못하였으니 정년퇴직은 당연히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1차원적인 생각이다. 2028년 6월 퇴직하면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철저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1997년 6월 공직에 입직한 나는 박근혜 정부 시절 공무원연금법 개정으로 63세부터 연금을 지급받는다. 60세에 퇴직하는데 연금은 63세부터 받는 아이러니 한 상황이다. 2년여 기간은 고용도 퇴직연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생각하니 걱정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현재 정년연장에 대한 정치권의 입법노력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언제 결론이 날지? 68년생인 나에게도 정년연장의 달콤한 열매를 먹을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셋째, 딸의 결혼과 아들의 진로이다. 딸은 올해 28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국가자격증을 취득하며 수원시 소재 병원에서 착실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딸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커서 이것저것 푸시를 많이 했는데 결국은 무용지물이다. 딸은 현재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간 괜스레 딸에게 부담감을 주어 힘들게 하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도 스며든다.


1년 전 교회에서 동갑내기 남자친구를 만나 2년여 기간 알콩달콩 사랑을 하는 모습이 아직은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남자친구와 식사를 한번 한 적이 있는데 최근 히트한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 등장하는 순애보적 사랑을 하는 '양관식'처럼 다정다감한 친구이다. 아직은 결혼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 두 사람모두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어 보인다. 결혼을 할 거면 가급적 퇴직 전에 했으면 좋으련만 인륜지대사인 결혼을 목전의 이익을 생각하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솔직히, 아빠로서 조급함은 감출 수 없는 노릇이다.


아들의 병역문제가 해결된 것은 큰 성과이다.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았지만 본인이 자원입대하여 현재, 현역으로 경기북부지역에서 소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무뚝뚝한 성격에 평소 대화가 없지만 추측컨대 아들 역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나처럼 많아 보인다. 현실에 맞게 탄력적으로 결정하라는 아버지의 처세주의와 이상적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아들의 이상주의가 종종 충돌하지만 나는 아들의 결정을 존중할 생각이다. 결국, 아들이 살아가야 할 인생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버지는 아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서 아들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부이다


글을 쓰다 보니 머릿속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고민들이 하나 둘 정리가 되는 듯하다. 바닷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쓰레기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듯 그간 나를 힘들게 한 고민의 정체들이 보인다. 특히 지난해 11월부터 현재까지는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자주 찾아왔다. 지인들을 만나고 술잔을 부딪히고 동네 한 바퀴 걷고, 땀 흘리며 운동해도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그럴 때는 일찍 잠자리에 들지만 새벽에 여러 번 깨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많다. 이번 제주여행을 부부여행에서 나 혼자 솔로 여행으로 급하게 변경한 이유이다


제주에서 첫날을 보냈다. 58세 중년의 남자 혼자 하는 여행이라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먹고 싶은 것도 없다. 가족들과 여행을 하면 사우나, 호텔조식 코스는 필수인데 모두 생략한다. 눈치 보지 않고 푹신한 침대에서 늦잠 자고 핸드폰 보며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바나나우유로 아침 한 끼 때우며, 숙소 소파에 앉아서 제주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호사를 상상이나 했던가?

이번 제주여행은 내가 그동안 수고하고 고생한 나 자신에게 선물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중년의 남자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가오는 떨어지지만 실속은 100% 챙긴 가성비 좋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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