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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Jan 23. 2020

인스타의 여행 사진보다도 우리 집 베개가 더 소중해

자기 변별, 나만의 행복을 찾는 실마리

  지금은 무슨 음식이든 없어서 못 먹지만 어릴 적엔 편식이 심했다. 특히 김치를 전혀 먹지 못했다. 집에서야 김치에 젓가락을 대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문제는 학교에서였다. 다니던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뀔 때 쯤 급식을 시작했는데, 자율 배식이 아닌 정량 배식이었다. 급식 당번들은 마지막에 남은 음식들로 자율 배식을 했기 때문에 늘 맛없는 반찬은 많이 퍼주고 그날의 메인은 조금만 줬다 (얼핏 부당해 보일 수 있으나 모두가 돌아가며 당번을 하기 때문에, 다들 자신이 배식할 때를 기다리며 이를 묵인했다.). 김치는 당연히 늘 많이 퍼주는 반찬이었다.


  당시는 1년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 8조원, 자동차로는 몇 대 같은 표어를 통해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를 대대적으로 홍보 (아직도 기억날 정도다) 하던 시기였다. 잔반통 옆에서 선생님이 식사를 하시며 아이들이 남긴 반찬을 검사하고, 다 먹지 않으면 다시 다 먹고 오도록 돌려보냈다. 고역이었다. 도저히 김치를 먹지 못하겠어서 맨손으로 남은 걸 쥐어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화장실에 버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피시방에 들렀다. 컵라면을 시켰는데 늘 나오던 단무지가 아닌 김치가 나왔다. 친구들은 좋아했지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궁금증은 오기로 이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맛 이길래? 억지로 한 점 집어서 라면 면발 속에 숨긴 뒤, 후 불고는 후루룩 들이키듯 한입 먹어 보았다. 그런데 오.. 신세계였다. 탱탱하고 쫄깃한 면발, 그 속에서 다른 종류의 짭짤한 감칠맛이 어우러졌다. 청량한 김치의 식감을 뜨끈하고 얼큰한 라면 국물로 마무리 하니, 10여년을 먹어 온 라면의 진면목을 처음으로 비로소 느끼는 듯 했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내가 싫었던 건 김치가 아니었구나. 김치란 당연히 누구나 좋아해야 한다는 생각, 주어진 김치는 반드시 다 먹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싫었던 거구나. 싫은 것을 억지로 해 내도록 하는 것, 그 자체가 싫었던 거구나.


  단순히 라면과 김치라는 강력한 조합으로 인해 편식이 사라진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 뒤로는 김치를 곧잘 먹었다. 대신 억지로 먹지는 않기 위해 배식을 받을 땐 조금만 달라고 용기 내어 말했다. 물론 지금은 김치와 김치 요리 없는 삶을 상상하기 힘들다. 내 마음, 내 감정의 실체를 정확히 알 지 못했더라면, 아마 김치가 주는 행복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갔을 것이다. 


  우리 마음에는 하루에도 수만, 수백만의 생각과 감정이 찾아온다. 그런 생각과 감정은 저절로 들기도 하고 어떤 경험을 통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헷갈린다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어떤 프로젝트, 결혼 같이 오랫동안 기대하고 바랐던 일을 이뤘는데 막상 그리 감격스럽지 않다거나, 큰 돈과 시간을 들여 멀리 여행을 떠났는데 생각처럼 감흥이 많지 않다고 느낀다. 누군가를 깊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다거나, 다른 사람의 선망이 되는 일을 하면서도 가슴은 전혀 뛰지 않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이 드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싫어하는 게 맞다 고 알려진 것들을 싫어하며, 맞고 틀림으로 나눌 수 없는 것들을 옳고 그름으로 나누고, 옳은 것을 추종하고 그른 것을 혐오한다. 


  이를 일상어로 풀어 이야기하면, 우리는 취향에 맞지만 유행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끼는 것들을 부끄러워한다. 주류, 소위 인싸의 감성을 동경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조롱하며, SNS에 올릴 만한 그럴듯한 것들만을 추구한다. 집이 내게 얼마나 아늑하고 안식을 주는가 보다는, 직장 동료들과 비교해 그 시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고민한다. 의미 있다고, 좋다고, 멋지다고 알려진 것들을 나의 가치관 위에 덧씌운다.


  그러다 보면 문득 진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었지 하는 의문이 찾아온다. 내가 기쁜 건 언제이고 슬픈 건 언제이며, 지금 마음속을 찾아오는 이 감정의 정체와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어 혼란스러워 질 수 있다. 그 혼란스러운 공허함에는 타인의 가치관, 그럴듯한 책의 문구, 부모와 선배의 가르침만이 떠돌게 된다.


  스스로의 마음속에 드는 생각, 감정의 상태, 이유, 근원, 실체를 잘 구분하고 파악하는 과정을 자기 변별 (self discrimination) 이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수십억의 사람 중 똑같은 삶을 사는 이는 단 한명도 없다. 그렇기에 제각각의 취향, 선호, 가치관, 행복의 모습 역시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겐 큰 부를 쌓는 것이 삶의 의미인 반면, 가족이 전부인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남들이 흔히 하지 못하는 경험을 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큰 즐거움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조그만 노트북으로 철지난 영화며 드라마를 하염없이 보는 것이 가장 특별한 일인 사람도 있다. 


  돈을 그리 많이 벌고 싶지 않다면 당신이 자본주의 부적응자라서가 아니라, 당신의 행복에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SNS의 멋진 여행지, 화려한 외모의 사람들의 사진을 보며 그다지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당신이 인싸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냥 당신은 집에 있는 게 좋아서 일지도 모른다. 유명 돈까스집 앞에서 새벽부터 텐트를 치고 기다리며 새롭고 흥미로운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따뜻한 집에서 정육점 돈까스를 튀겨 그 맛집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며 먹는 게 최고인 사람도 있다. 


  취향에 옳고 그름이란 없다. 중요한 건 맞고 틀림, 해야됨과 하지 않아야 됨 이라는 가림막들을 마음에서 걷어내고, 진정으로 내가 느끼는 감정의 실체는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 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 지를 깨닫는 것, 즉 나의 감정을 잘 변별하는 것이다. 자기 변별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을 향하는 실마리이며, 나 자신을 이를 향해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이 막막한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해야 할 것 같은 대로, 좋아 보여야 할 것 같은 대로가 아닌, 진짜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 지를 떠올리다 보면 연기처럼 모호한 행복이 구체적인 포근함으로 내 곁을 찾을 것이다.


  어차피 타인의 돈을 벌어 먹고살아야 하는 우리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타인의 삶을 위해 보내야 한다. 그러니 금쪽같은 일과 후, 나만의 시간만큼은 나만의 취향, 선호, 나만의 감성으로,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 보내면 어떨까 한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그래서 더 소중한 행복의 원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가만히 상상해 본다. 음, 오늘의 나의 행복은 인스타그램 한 켠을 장식할 만한 어마어마한 여행지로 떠날 휴가 계획을 짜는 것이 아니라, 퇴근 후 어서 집에 돌아와 허둥지둥 잠옷으로 갈아입고, 수면등을 켜고, 전기장판의 온도를 26도로 맞추고, 이불을 덮은 채, 직장에서 내내 그리워하던 아끼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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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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