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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Apr 19. 2020

스키를 들고 리프트에 오르는 것은 돌아오기 위한 걸까.

갖춘 것 하나 없는 삶, 완성하기 위한 이 아니라 그려가는.



 ‘당신이 스키를 타러 간다고 가정해 봅시다. 언덕 꼭대기까지 가는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이제 막 언덕 아래로 스키를 타고 내려가려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당신이 어디로 가려는지 묻습니다. “아래쪽 끝에 있는 산장까지 가려 합니다.” 라고 당신은 대답합니다. 그는 “제가 도와드릴게요.” 라고 말하며 바로 당신을 잡아 헬리콥터 안에 태우고는 아래쪽 산장까지 데려다주고 바로 사라져 버립니다. 당신이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언덕 꼭대기까지 다시 리프트를 타고 가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려 하는데, 또다시 그 남자가 당신을 잡아 헬리콥터에 태우고는 저 아래 산장까지 데려다 줍니다. 당신은 꽤 화가 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아마도, “이봐요, 나는 스키를 타고 싶다고요!” 라고 말할 겁니다.’


  (Steven C. Hayes, 수용과 참여의 심리치료 제 2판, p.430 中)


  이십대 후반, 친구들과의 술자리 대화주제는 늘 직장 험담으로 시작해 연애와 결혼 고민으로 이어졌었다. 하루는 지역의 대단한 재력가 집안과 혼인을 맺어 병원 개원에 큰 도움을 받게 된 선배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는 곧 결혼의 조건이 무엇인가로 이어졌다. 서로 잘 맞고 좋아하는 게 중요하다, 아니 결혼은 현실이다, 돈이 최고다 ... 선배에 대한 부러움과 질시, 지금 만나는 이성과 결혼할 지 말지에 대한 고민, 모든 결혼 상태는 이혼하기 전 상태라는 비혼주의 선언까지... 한창 진행된 술판의 어지러움처럼 이야기가 뒤섞여 갈 때쯤, 한 친구가 모든 판을 정리했다.


  “야, 너네는 왜 현실적인 조건이 좋으면 잘 안 맞을 거라 생각 하냐, 그거랑 잘 맞고 안 맞고는 상관없는 거 아니냐? 크크. 그리고 우리가 좋은 차를 사려고 하는 건 거기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타고 싶어서 그런 건데, 서로 안 좋으면 차가 어떻고 집이 어딘지가 뭐가 중요하냐?”


  술자리가 파하고, 다음날이 되어 숙취가 한바탕 머리와 몸을 휩쓸고 난 뒤에도 마지막 그 말은 머릿속에 맴돌았다. 곱씹을수록 참 맞는 말이다. 비싼 차는 비싼 차일 뿐, 이를 구매할 때 뒷자석에 행복을 옵션으로 넣어주진 않는다. 


  혹자는 좋은 차는 승차감 자체가 다르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구는 그러한 차를 운용한다는 경제력을 과시할 때의 즐거움, 소위 하차감을 즐긴다고도 한다. 취향과 가치관에 옳고 그름은 없다. 중요한 것은 차의 가격이 값비싸다는 것 그 자체로 행복은 아니라는 점이다. 승차감이든 하차감이든, 혹은 연인과의 드라이브 이든 나만의 의미가 더해질 때 좋은 차로 비로소 행복과 이어진다. 핵심은 ‘의미가 더해질 때’ 행복이라는 부분이다.


  오늘의 삶이 버거울 때, 편안함과 즐거움이 요원할 때 우리의 마음은 지금의 부족함을 짚어낸다. 나만의 삶의 의미 같은 뜬구름 대신, 돈, 지위, 사랑, 관계 ... ‘어떻게든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어 보이는’ 것 들 중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린다. 저것을 채워야 해, 지금 내게 없는 저것이 내 삶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토록 멀어 보이는 행복이 비로소 내 마음에 피어날 거야, 라는 생각이 스스로를 사로잡는다. 그런데 과연 돈을 벌면, 좋은 차를 타면, 이상형과 연애를 하면, 고민되는 관계가 비로소 풀리면, 행복이 찾아올까?


  이대로 가다간 죽을 때까진 행복은 없겠구나, 아마 그 생각을 했던 건 인턴을 겨우 마치고도 레지던트로 2~3년을 쥐어 짜지던 어느 날로 기억한다. 대학생이 되면 행복 시작이라 믿고 학창시절을, 의사만 되면 꽃길이 열릴 거라 대학 시절을, 던트가 되어 삶의 방향이 정해지면 마음이 평온해 질 것이라 생각하며 인턴 생활을 견뎠더니, 이제는 전문의가 되면.. 이라며 익숙한 주문을 외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만 되면’ 이란 주문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도 지치고 말았다. 예견된 미래의 성과를 이루기 위해 오늘을 견디는 것, 이것 말고는 행복에 대한 공식이 없던 나는 혼란했다.


  요즘 시국에 언급하기는 좀 그렇지만 오래 전부터 일식 라면을 좋아했다. 던트 2년차 여름 즈음으로 기억한다. 바다가 보이는 동네에 위치한, 전부터 입소문이 자자하던 라멘집을 찾았다. 정성들여 우린 육수와, 불향과 감칠맛이 그득하지만 짜지 않은 차슈가 일품이었다. 면과 차슈를 집어 같이 한 입, 깊은 국물을 한 술, 후루룩 후루룩 들이키기에 아까울 정도라 차근차근 맛을 느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지금 힘들다고 해서, 이뤄야 할 목표가 있다고 해서 이 맛에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 죽을 것처럼 힘들긴 한데, 지금 눈앞의 라면이 이렇게 멋진 건 그거랑 상관없지 않나?’


  그래서 그냥 기쁘기로 했다. 일주일 내내 병원에 갇혀 있거나 말거나 야밤에 친한 안과형네 의국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들이키며 영양가라곤 하나도 없는 이야기를 떠들었다. 모처럼 퇴근 날이면, 어차피 해는 져 버렸고 문을 연 음식점이라곤 없으니 근처 바닷가로 갔다. 지금은 너무 유명해져 줄 설 엄두도 안 날 정도지만, 그 때는 손님도 없이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토스트 집이 있었다. 토스트 하나,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들고서는, 달빛이 파도에 부서지는 장면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거짓말처럼 시작한 연애에 흠뻑 빠지기도 하고, 너무도 식상하게 헤어진 후엔 홀로된 홀가분함으로 달맞이고개를 올랐다.


  고단하고 행복했다. 때론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면서, 즐거웠다. 힘들지 ‘만’ 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고, 고단함은 행복을 위해 이겨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내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 내가 원하는 미래에 함께 존재하는 부분일 따름이었다. 


  미래에 지금의 내가 바라는 결과들이 원하는 대로 고스란히 주어질지, 그렇지 않을 지 역시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저 지금 내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힘들면 힘들고, 그리고 행복한 건 행복한 거다. 몇십 분을 교수님께 혼이 나도 치킨은 맛있는 거다.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지만 바다는 아름다운 거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은 모자이크처럼 기쁨과 슬픔이 얽혀있다. 음영을 표현하려면 검은색 조각도 필수다.


  글을 쓰는 와중에 옛날 생각이 난다. 어릴 적 돈이 없어서 치즈 돈까스가 너무 먹고 싶어도 늘 참았다. 이제는 500원, 1000원 정도 비싼 메뉴는 그럭저럭 편히 주문한다. 그때는 불행하고 이제는 비로소 행복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서관을 간답시고 만화책을 챙겨 하루 종일 만화를 보고는, 밥 때가 되어서 친구들과 같이 김밥의 극락으로 몰려가 메뉴를 고민할 때, 그냥 그 때도 행복이었다. 치즈가 가득한 돈까스를 먹는 지금 역시 감사하다. 어쩌면 행복은 결핍과 충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감히 삶의 고통과 행복은 상관없다, 라 오만하게 단정 지으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글은 단지 무언가를 채워야만 한다는 생각에 묻혀 인식되지 않고 흘러가는 행복에 대한 것이며,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과 나아가는 자체가 인생이라 생각하는 삶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 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자기 자신만의 행복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큰 구도부터 디테일까지 각자의 취향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삶이 끝나기 전엔 이 그림에 완성은 없다. 죽음은 마지막 서명이 될 것이고, 그때서야 이 그림은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완성작을 감상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그려가는 즐거움이다.  


  스키를 들고 리프트에 오르는 것은 헬리콥터를 타고 산장으로 돌아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키를 타는 그 상쾌함을 직접 느끼고 싶어서이다. 근사한 집과 그럴듯한 차를 마련하고 아이를 훌륭히 키워냈다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삶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삶이다. 어서 죽음에 도달하고 싶어 살아가는 삶은 없다. 그러나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혹은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어야지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차라리 죽음이 나을 정도의 압박감으로 우리를 옥죈다. 더 이상 그 생각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마음먹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아내의 직장에는 부유한 사람이 많다. 부촌에 위치한 상사의 집에 다녀와선 맘에 쏙 드는 고가의 가구 사진을 보여주는 아내에게 “내가 알부잣집 막내아들이었으면 신혼 때부터 그런 좋은 동네 큰 집에서 손에 물 안 묻히고 편히 살았을 텐데.” 평범한 집 장남의 자격지심으로 한마디 툭 던져 보았다. “처음부터 그러면 좋은 줄도 모를 걸? 쌓아가야 재미지.” 아내가 받아친다. 뭐야, 신포도 정신승리 아니야? 같이 웃는다.


  정신승리면 어떤가. 정신승리가 실제로는 패배한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대체 누구에게 졌다는 말인가. ‘더 그럴 듯 해져야 비로소 행복의 자격이 생긴다.’ 라는 정신에게 승리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마음이 한 결 가벼워지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 삶은 그려가는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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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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