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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May 03. 2020

하면 된다 와 한다 의 차이.

얼마든지 냉소해도 괜찮아. 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나는 왜 쓰는가.’ 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참석하신 분들은 대부분 내가 이뤄낸 것들, 예컨대 여러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를 한다거나 출간을 진행하는 것들이 쓰는 이유라 생각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이뤄 냈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 애초에 그런 것들 때문에 썼던 건 아니고 몇 년 간은 이렇다 할 성과라 말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그 기간을 어떻게 버티며 계속 썼는지.’ 를 궁금해 하시는 눈치였다. 


  성과만이 노력의 의미였다면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을 그토록 오랫동안 힘들게 (아무도 알아주진 않았지만, 혼자서는 꽤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었다.) 이어오고 있던 중이었다. 누구든, 아니 스스로도 한 번 쯤 의구심을 가질 만한 ‘성과가 전무한 일을 계속하는 이유’ 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며, 나는 살아가는 맛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얻었다.


  기억에 남았던 아픔들이란 대부분은 의도했던 바가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순간들, 다시 말해 좌절의 기억들이다. 사업이 생각했던 대로 잘 풀리지 않았을 수도 있고, 면접이나 시험 결과가 좋지 못해 원하던 대학이나 직장에 가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호감이 있는 이성이나 친구와 원만한 관계를 만들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주 오랜 과거까지 거슬러 오르면 부모의 따뜻한 관심을 원했으나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이 깊은 상처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마음은 기쁨을 구하는 것 보다 슬픔을 피하는 데 더욱 익숙하다. 행복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되는 사치로 인식하는 반면, 아픔은 어떻게든 반드시 제거해야 할 문제로 간주한다. 좌절은 살아가면서 느끼는 여러 슬픔들 중에서도 꽤나 묵직한 아픔이다. 그러한 아픔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시도를 그만두기로 한다. 어떻게 해서도 웃어주지 않는 부모에게 아이는 애교를 포기하고 마음을 닫는다. 원치 않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아 좌절하는 대신, 애초에 원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좌절을 피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냉소다. 엄밀히 말하면 냉소를 통해 시도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시도 자체가 없으면 당연히 좌절도 없다. ‘저런 것 해봐야 뭐해.’, ‘저건 해봤자 내가 생각하는 건 이뤄지지도 않아.’ 라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더 나아가 ‘저런 걸 해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배부른 사치야.’ 라 폄하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웃음의 근간에는 ‘모든 노력이란 어떤 결과를 위한 것이며, 그 결과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좌절이다.’ 라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우리가 우리 나름의 행복으로 향하는 것을 종종 막는다. 

그러한 전제가 무조건 틀렸다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한 달 생활비와 월세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분명 취업 성공, 사업 번창과 같은 결과들이다. 


  단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어차피 해도 ‘되지 않을 것이기에’ 하지 않기로 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글을 써 오는 수 년 남짓을 돌아보면 기념비로 삼을 만한 순간들도 물론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내 글을 읽기 위해 블로그를 들렀던 때나 출간계약을 했던 때, 출간일이 다가오며 인쇄된 책 표지를 처음으로 받아들었던 지난 주... 그러나 그 순간들만이 기쁘고 그 과정은 너무 고통스러웠다거나, 그러한 성과를 얻었기에 비로소 그 과정들이 의미를 찾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결실들이 있으면 좋겠다 바랐던 적은 많지만, 그럴듯한 성과들이 전혀 없었던 긴 시간 동안 좌절감을 느꼈던 것도 아니다.


  그런 성과와 관계없이 쓰는 그 시간들이 좋았다. 삶을 곰곰이 돌아보고, 내가 위안을 얻었던 어렴풋함 들을 서툰 단어로 조개껍질 엮듯 엮는 그 시간들 자체가 뭉클했다. 이 과정이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지를 떠나, 길을 걷다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급히 휴대폰 메모장에 적는 내 모습 자체가 좋았다. 


  러브 액츄얼리의 콜린 퍼스처럼 햇살이 따스하고 호수가 보이는 휴양지에서 한 달 이고 두 달이고 틀어박혀 에세이와 소설을 마음껏 써 보고 싶은 것이 꿈꾸던 작가의 모습이라면, 침대로만 파고들고 싶은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감기는 눈꺼풀과 싸우며 아껴낸 삼십 분, 한 시간 동안 직업과 연관된 마음 이야기를 겨우 한 문단 써 내는 것이 현실 속 나의 모습이었다. 일을 하고도 남는 시간에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시간을 죽이는 소일거리로 글을 써내는 우아함은 없었다. 진료 중간 틈틈이 한 문장, 아이를 겨우 재우고 난 후 나의 잠이 몰려오기 직전에 한 문단 씩 쌓아가는 고단한 과정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어떠한 성과가 주어질 땐 물론 분명 기쁘지만 그 찰나의 성과를 좆느라 힘든 시간들을 참아내며 살아가고 있던 건 아니었다. ‘어차피 뭔가가 될 것도 아닌데 해서 뭐해.’ 라는 힐난 속에 휴대 전화와 티비를 보며 흘릴 시간을 아끼고 아껴 내가 생각하는 삶의 의미를 위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 자체가 기쁘다. 일주일에 한 문장이라도 마음에 드는 글귀 하나가 늘어나는 그 느낌, 아니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 나아지는 길이라 믿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 자체에서 살아가는 맛이 났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내 모습이 배부른 소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을 다독이는 것은 나의 직업이고, 이를 위해서 나 스스로 공부하며 감명 받았던 것들을 최대한 적확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허울 좋은 취미가 아니라, 나의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나는 내 삶과 동떨어진 유희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비록 남들은 몰라줄 지라도, 나 스스로에게는 어떠한 일보다 큰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우리를 옥죄는 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시도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결실로 맺어져야 한다는 강박이다. 그렇지 않으면 좌절이라는 생각, 해야 한다가 아니라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행하는 것을 두렵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시도 대신 냉소를 택하게 한다.


  그런 것 해봐야 무슨 대단한 좋은 일이 있겠어 라는 말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으며, ‘대단한 좋은 일’ 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물론 높겠다. 그래서 ‘하면 된다.’ 라는 말이 100% 진실이 아니라는 데는 매우 공감한다. 한다고 해서 원하는 것들이 무엇이든 다 이뤄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 현실의 벽은 높고,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자체가 사치일 때도 분명히 있는 것이 삶이다. 


  그러나 하루를 적어도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삶, 더욱 내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그 느낌 자체가 우리의 삶의 의미를 준다. 일 년 365일 중, 우리가 간절했던 무언가에 도달하는 순간, 어떠한 성과에 다다르는 나날은 겨우 10여일 가량이다. 그 10일 중에서도 성취의 기쁨을 느끼는 시간은 불과 수 시간이 전부이다. 그 짧은 시간들만을 삶의 의미의 전부라 생각하며 살아갈 것인지, 성과와 관계없는 대부분의 시간들을 무엇으로 채울 지 고민하며 살아갈 것인지, 한 번 쯤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다.


  냉소의 늪은 닿지 못하면 좌절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벗어날 수 있다.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뿐인 삶에서 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저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힐난과 폄하는 가장 택하기 편하고 또 언제든지 고를 수 있는 선택지이다. 그래서 만약 굳이 냉소를 해야 한다면 제일 뒤로 미루면 어떨까.


  ‘하면 된다.’ 와 ‘한다.’ 는 다르다. 되는 것만이 의미가 있고, 되는 것만을 해야 한다 라는 생각은 되지 않는 것을 왜 해? 라는 비웃음으로 이어져 스스로를 어떠한 것도 시도하지 않는 채로 머물게 한다. 반면 그저 하는 것에 의미를 찾고 그것을 해 나가는 삶은, 물론 된다면 나쁠 것이야 없겠지만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가는 맛이 난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될 것을 기대하며 쓰진 않는다. 그냥 쓴다. 하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한다. 하고 있는 그 하루가 좋아서. 그런 하루가 쌓여가는 삶이, 내가 원하는 삶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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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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