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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수미 Jul 26. 2024

애 낳을 결심①

"낳기만 하면 엄마가 다 키워줄게." 결혼 3년 차를 넘기기 시작할 무렵부터 엄마는 애달아하기 시작했다. 너는 잘 자고 잘 먹고 별로 울지도 않고 얼마나 순했는지 아니? 너만 같으면 엄마는 열 명도 키울 수 있어. 낳기만 해라. 낳고 너 하고 싶은 일 다 해라. 낳으면 엄마가 키워줄게. 엄마의 레퍼토리는 매번 똑같았고, 나는 그때마다 단호하게 말을 끊고 화제를 돌렸다. 생각 없으니까 그만하셔. 눈을 부릅뜨고 매몰차게 말을 했다. '절대 안 낳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었지만 기울기로 따지자면 '굳이 낳아야 할까?'의 마음이 80%에 가까웠다. 낳을지 말지에 대한 판단은 가임기의 끝물에, 40살 정도 되었을 때 생각해 볼 참이었다.


애를 낳는 건 아주 어릴 때부터 상상 속 나의 미래에 없는 모습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할지는 몰라도 나는 무조건 '많이 돌아다니고, 매우 바쁜' 사람이기를 원했다. 외교관, 여행가, 탐험가, 여행작가, 기자,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등등 내가 상상한 나의 수많은 직업들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육아에 매진하는 삶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글쟁이여도 영감을 찾아 몇 개월씩 거주지를 옮겨 다니며 사는 모습만을 상상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나는 자주 되뇌었다. 내 힘으로 돈을 벌고 내 능력으로 여기저기서 불려 다니면서 바쁘게 살 거야.


엄마는 재주가 많았다. 그림을 잘 그렸고 책을 좋아했고 손이 야무져서 뜨개질 요리 등등 손대는 것마다 척척 잘 해냈다. 하지만 엄마는 불행해 보였다. 요즘 MBTI 식 표현을 빌리자면 극 F인 성향이라, 극 T인 아빠와 맞지 않았다. 아빠는 지극히 성실하고 고지식한, 아주 보통의 한국 남성이었다.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고등학생쯤 됐을 때부터 나는 엄마에게 "그냥 이혼하는 게 어때?"라고 물었다. "너희가 성인이 되면 모를까"였던 답변은 "너희가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을 하고 나면"으로 바뀐 이후에도 갖가지 이유가 들러붙었다. 엄마는 언젠가 "차라리 너희 아빠가 나를 때리거나, 바람을 피우면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아마도 명백한 유책 사유가 없는 배우자를 두고 단순히 성격차이를 이유로 '이혼녀'가 될 용기가, 평생을 가정주부로만 살아온 당신이 막상 직업을 구하고 홀로서기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는 "너희 때문에 산다"고 자주 말했다.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우리를 낳아 키울 때였다고 했다. 엄마는 진심이었겠지만, 내게는 일종의 죄책감을 심어줬다. 마치 '우리 때문에' 자신의 불행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로 들렸었다. 아이 셋을 낳아 미처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는 전래동화의 선녀처럼. 그러니, 아이를 낳는 것은 나에게 공포였다. 엄마처럼 아이를 낳은 게 나의 행복치의 '맥스'가 되면 어떡하지? 내가 모르는 더 좋은 행복이 있을 수 있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봐온 숱한 워킹맘들의 모습은 나의 공포심을 더욱 증폭시킨 측면이 있다. 그녀들은 정말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동시에 괴로워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육아휴직은커녕 평일에 일찍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원시간에 맞춰 친정엄마(또는 시어머니, 육아도우미)와 번갈아가며 시간을 조율하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건 모두 그녀들만의 몫이었다. 나는 아직 못 해본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은데 육아를 하면서 병행할 수 있을까? 남편은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지만 그걸 감안해서 긍정 회로를 최대치로 돌려봐도 우리 두 사람의 평소 업무시간을 생각하면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임신은 가임기의 '끝물'에 생각해 보자. 그전에 이룰 수 있는 업무적 성취는 최대한 다 이뤄보자. 남들은 자주 내게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냥 '일이 재밌어서'라고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마음이 급했다. 엎어놓은 모래시계처럼 남은 시간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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