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마음먹고 지른, 윤병락 작가님의 사과 그림 이야기다. 우리집은 동향이다. 아침과 오전에는 거실 창으로 햇살이 아름답게 내리쬐지만 정오 이후로는 햇살이 잘 들지 않는다. 수시로 벽에 걸어둔 그림을 성물화 보듯이 올려다보며, 이슬 맺힌 사과 위에 표현된 햇살을 만끽한다. 괜히 숨도 크게 들이쉬어본다.
나중에 취직하면 원화를 사서 집에 걸어두는 사람이 되어야지. 취준생 시절의 나는 혼자 다짐하곤 했었다. 사치를 부려도 우아하게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취직을 하고 나니 돈 기백만원을 선뜻 그림 구매에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투자할 수 있는 안목은 없으니 '묻는 셈' 치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사는 건데, 얼마 안 가 질릴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늘 '버리기 편한' 수준의 액자를 사서 걸어두었었다.
그런데 작년에 안면마비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매일 내가 보는 풍경의 가치를 높이고싶었다. 10만원대의 프린트물은 화질이 거칠다. 눈도 마음도 편안한 그림을 걸어두고 싶었다. 여전히 원화를 살 용기는 없었기 때문에, 유명한 작가의 고화질 프린트 액자를 사기로 마음먹고 부지런히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입찰 시작가 고작 60만원에 나온, 보호필름도 떼지 않은 새 작품 컨디션의 사과 그림을.
워낙 유명한 작가님이지만 전시회를 직접 가본적은 없다. 고화질 프린트액자만 봤을 뿐이다. 5년 청와대 출입 당시, 점심 약속이 없는 어느 날씨 좋은 봄날이었다. 혼자서 간단히 먹고 들어가는 길에 갤러리(정확히는 프린트베이커리) 유리벽 안으로 거대한 사과더미가 걸려있는게 눈에 띄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유명한 윤병락 작가님의 사과 그림. 사과 표면에 맺힌 물방울과 반짝임들은, 마치 햇살이 어두운 실내 안까지 직접 비치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미디어를 통해서 볼 때면 한낱 사과에 왜 다들 열광하나 싶었지만 막상 보니 갖고싶었다.
그런데 옆에 붙은 가격표가...이상했다. 숫자가 길었다. 원화가 아닌데도 이 금액이 맞나? 0이 하나 더 붙은 건 아닐까 싶어서 몇번을 다시 읽어봤었다. 눈 꽉 감고 미친척하고 살까 상상도 해보았다. 하지만 폭 2m에 달하는 그 그림은 우리집 거실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가득 채워서 기이해보일 것이 분명했다. ('돈이 없어서서가 아니라 크기가 너무 커서' 라고 합리화를 했었었다.) 그래서 평수를 넓혀 이사를 와서 제일 먼저 검색해본 것도 그 작품이었다. 가격은...놀랍게도 처음 본 가격의 세 배가 넘는 900만원대였다. 더이상 찍어내지 않는지 그나마도 품절 표시가 붙어있었다.
그때 본 작품의 절반 크기 그림이, 경매 시작가 60만원에 올라왔을 때 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세 명 정도의 경쟁자가 있었는데, 더 이상은 비딩하지 않으리 했던 120만원에 다행히 낙찰이 되었다. 작품을 픽업하러 가는 길에 남편에게 괜히 이런저런 설명을 더했다. 낙찰받은 가격은 정가의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이고, 그의 작품이 얼마나 인기가 있으며, 내가 봤던 얼마짜리가 지금 얼마에 거래되고 있는지 등등등. 그림에 아무 관심이 없는 남편은 "어차피 팔 게 아니잖아?" 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혹시 언젠가 또 마음이 바뀌고 급전이 필요할지 모르니, 박스도 고이 잘 보관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