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프리모 레비
P 머리말 : 우리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다른 사람들을 거기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되기 전부터, 그리고 그 후까지도 우리들 사이에서 다른 기본적인 욕구들과 경합을 벌일 정도로 즉각적이고 강렬한 충동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써졌습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먼저 내적 해방을 위해서 써진 것이다.
여러분은 책을 읽으실 때 머리말부터 시작해서 책이 끝나고 역자의 해설까지 다 읽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잘 읽지 않는 편이지만 책이 재밌고 더 알고 싶어 진다면 머리말을 읽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가의 책은 늘 감정적으로 고통스럽게 읽어야만 하지만 책을 열어 처음부터 읽게 만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야만 했을지, 또 어떤 이야기이길래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픈 욕구가 다른 기본적인 욕구들과 경쟁할 정도로 강렬했던 것일지 이 책을 읽고 나면 머리를 끄덕이게 됩니다.
가끔 감옥에 갇힌 이들이 쓴 책들이 있습니다. 김영하 작가님은 사색하기 좋은 공간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했던 적도 있는데 신체의 자유를 잃은 인간으로서의 본능을 억제당한 이들이 적어 내려간 글은 아무래도 무겁기 마련입니다. 물리적 장벽이 명확한 만큼 사유는 담장을 넘어 이리저리 오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유는 담장을 넘었나 싶은 순간에 어느덧 감방 안으로 돌아와 그들이 처한 상황의 통제 속에 머무릅니다. 프리모 레비의 글은 감옥에 갇힌 사람의 글과 일견 유사하지만 더 극단적으로 보입니다. 아예 인간임을 부정당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극한에서 쓴 기록인 이 책은 사실 굉장히 무겁습니다.
인간임을 부정당한 사람들에게 생물학적 감각은 죽음과 삶의 경계는 얼마나 사소하며 또한 얼마나 유동적인지 알게 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강제노동을 하면서 용케 살아남기까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적은 에세이인 이 책은 극한에 놓인 인간을 다루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극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이들이 동물 취급을 받으며 날마다 모든 순간 생사의 기로에 놓입니다. 가스실로 끌려가거나 병에 걸려 죽은 사람에게 죽음은 종말이고 극적인 사건입니다. 그 사건에까지 이르지 않은 수감자들에게 그곳에서의 삶은 날마다 되풀이되는 지옥이었으나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이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시간의 연속인 모습만 보입니다. 오늘의 더위 혹은 추위, 맑은 날 또는 흐린 날, 배고픔과 목마름, 너덜너덜한 옷과 고통스러운 나무 신발, 어깨를 짓누르는 침묵 등, 그 안에서의 일상이 되어버립니다.
이 책은 수용소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인간임을 부정당하고 동물 취급을 받습니다. 동물적 감각에 의지해 버텨야 하는 동시에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곳에서 그는 여러 종류의 인간을 보고 인간의 본질은 어떻게 부정당하는지를 기록하고 인간의 본질을 묻습니다.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독일인들에게 사적으로 앙갚음을 해본 적도 없고 그런 생각도 가져본 적 없다고 말하는데 그건 절대 용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수용소에서 벌어진 죄악은 그 어떤 위로의 기도로도, 그 어떤 용서로도, 죄인들의 그 어떤 속죄로도, 간단히 말해 인간의 능력 안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절대 씻을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책에 증오도 원한도 복수심도 드러나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레비의 답변이 말미에 실려 있습니다.
P : 내가 보기에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없었으며, 접근할 수도 없었다. 나치스 체제는 용의주도하게도 노예와 주인이 최소한의 접촉만 하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당시 독일의 보통 사람들은 실상을 잘 몰랐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일이 그 정도 규모로 일어나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독일인들은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레비는 말합니다. 수용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곳이 단순한 요양원이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