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창백한 불꽃 - 블라드미르 나보코프 [문학동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를 보고 충격에 빠졌건 기억이 납니다. 경찰서를 나온 케빈 스페이시가 보여준 반전과도 같은 상황 때문인데 그 이후로 반전이 있는 현실이나 영화를 보면 <유주얼 서스펙트>의 결말을 보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왜 충격이었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영화의 내용이 순전히 거짓임을 알게 되는 충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반전이 있는 게임과 같은 책이 있습니다.
저명한 시인이던 존 셰이드가 999행의 미완의 시 <창백한 불꽃>을 남긴 채 살해당하였습니다. 그와 막역한 사이이자 이웃이었던 동료 교수 킨보트는 색인카드 80장에 흩어진 유고를 취합해 주석을 달아 출간합니다. 킨보트의 주석은 실로 가관이었습니다. 그는 장황한 주석과 미주를 달았는데 주된 내용은 셰이드의 이 시에서 영감을 얻고 시를 써 내려간 이유가 바로 젬블라라는 국가가 있고 젬블라의 왕을 시해하려는 인물인 그라두스가 등장하며 그들 간의 쫓고 쫓기는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석은 매우 길어지게 되고 한 편의 소설이 되어버렸습니다. 킨보트라는 작자가 셰이드의 유명세를 이용해서 기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작품을 발표한 것입니다. 그리고 킨보트는 주석을 시보다 먼저 읽기를 제안합니다. 여러분은 킨보트가 말하는데로 주석을 읽으시겠습니까 아님 시만 잀으시겠습니까 아님 시와 주석을 번갈아 보며 읽으시겠습니까? 나보코프가 설계한 미로에 기꺼이 빠질지 선택해야만 합니다.
오로지 원고만으로 말할 수 있는 상태에서 존 셰이드의 부인인 시빌 셰이드는 이 원고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 원고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자신 뿐이라고 단언합니다. 독자는 찰스 킨 보트를 믿는 것밖에 방법이 없지만 존 셰이드가 얼마나 굉장한 시인 일지도 잘 모르지만, 찰스 킨보트의 안내를 믿고서 더듬더듬 존 셰이드의 시 속으로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는 게임이 시작됩니다. 999행의 아름답지만 걷기 편하진 않은 언어들 사이를 간신히 헤치고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어리둥절의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앞 장과 주석을 왔다갔다 하며 혼란을 느꼈다가 풀었다가 하면서 천천히 읽게 되었습니다.
나보코프에게 농락을 당하는 거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이 책을 놓지 못한 거는 시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도무지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이 젬블라 왕족의 이야기도 섬뜩하고 아름답고 읽는 내내 사함을 매료시킵니다. 왕과 왕의 주변에 있는 잘생긴 남성들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성적 흐름들, 노시인의 부인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면서 노시인에 대한 기이한 집착을 보이는 찰스 킨보트의 모습 또한 재밌습니다. 이 책은 결국 선택지도 없고 결말이 여러 개도 아니지만 어드벤처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을 선사합니다. 서사 속에 있는 요소들 중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고 텍스트들과 계속 줄다리기를 해야만 하는 책입니다.
P 50 : 삼단논법: 다른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
P 51 : 인생은 어둠 속에서 갈겨쓴 메시지다.
P 89 :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 시에 붙인 주석 같은 것.
이 책은 1962년에 출간하였습니다. 출간 직후 뉴욕 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보면 러시아 귀족 집안 출신이면서 소비에트에 적대행위를 한 부친을 둔 자신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는 의무였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 이 책이 나오고 독자들에게 책이 너무 난해하다며 독자를 혐오하고 무시하는 거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나보코프 본인은 이런 구성을 호프만슈탈의 희곡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염두에 두었으며 원래는 호프만슈탈처럼 극중극의 형태를 구상했고 아예 처음부터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본인이 꼭 써야만 했던 자기 숙제, 쿠데타가 일어나 결국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추락하고 마는 젬블라 왕국의 폐왕 “카를 크사베리 프세슬라프” 이야기를 어떻게 작중 미국의 위대한 현대시인 존 셰이드와 그의 가정사에 엮어 넣을 것인가만 고민을 하였고 그 해결을 위해 부득이하게 머리말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주석을 달게 되는 형식의 이러한 책에 나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