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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술사 Jan 20. 2020

에스프레소 블렌딩,
결국에는 그것만 남아요

-24색 크레파스를 가졌지만 한 가지 색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당신에게-

카페는 그 가게만의 색깔이 있어야 한다.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어떤 빛깔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색이 없으면 인식되지 않는다. 인식되지 않으면 다시 찾아가지 않는다.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고, 그 사람만의 느낌과 색이 있어 다시 만나고 싶은 상대여야만 한다.

너무 무난해 한 마리의 어장 속 물고기로 남으면 안 된다.

개인 카페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제는 대형화가 대세다. 게다가 자동화까지 더해지다 보니 어느 정도 자본을 갖고 시작하지 않으면 성공의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졌다. 예전에는 공부하지 않고 카페 창업한 사람들이 많아서 자본의 차이를 커피 실력으로 메꿀 수가 있었다. 나름대로 공들여 공부한 사람들이 가게를 차리면 커피맛은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것에 비해 월등했다. 그러나 커피 맛도 상향 평준화되었다. 커피맛 만으로는 일반 손님들이 그 가게만을 다시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대부분 개인 카페의 커피 맛이 좋아졌다. 다들 자신의 커피에 자신이 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관련 기술의 정보 공개가 큰 기여를 하였다. 

커피에 대한 정보는 유튜브와 서점에 넘쳐나고 있다. 아카데미에서도 잘 가르쳐준다.

이제는 정보의 접근성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보를 몰라 기술 차이가 나는 세상은 끝났다.

실제로 커피에 대한 시중의 모든 기술을 다 배우려면 2년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산지 여행을 제외하면 돈은 대략 3천만원정도 든다.

그만큼 커피 기술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가 쉽고 습득하기가 수월해졌다.


이런 정보의 공개와 공유는 커피를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이론으로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지만 커피업에 진출하는 장벽을 상당히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부메랑은 여지없이 영세한 개인 카페를 강타했다. 자본이 없지만 실력으로 무장하여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영세 로스터리 카페는 그나마 자존심이었던 실력 또한 쉽게 따라 잡힐 수 있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2년 만에 습득한 기술을 남이라고 3년이나 걸릴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자본이 있는 경우 그 기간을 1년으로 단축하여 턱밑까지 따라왔다. 


오래된 가게의 주인들이 며느리도 몰라 와이프도 몰라 외치던 비법들은 대단한 것이 있어서 감춘 것이 아니다. 반대로 너무나 별게 아니어서 알려지면 누구나 쉽게 따라 할 만한 것이어서 그리도 꽁꽁 감춘 것 들이다. 커피 역시 그렇다. SCA다 커핑이다 싱글 오리진이다 로스팅 프로파일이다 ROR이다, 유량제어다, 날정렬이다 말은 많이 하지만 그리 대단한 기술은 아니며  젊은 친구들도 마니아도 쉽게 전문가의 영역까지 도달했다.


기술의 허들이 무너지다 보니 결국 커피의 맛은 추출과 로스팅의 실력보다 원재료에서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불어닥친 노르딕 로스팅의 붐은 원재료가 좋지 못하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방법이라 더욱 그랬다.

그런데 커피의 원재료인 생두는 품질의 차이가 결국 가격의 차이다. 비싼 콩이 다 맛있는 건 아니지만 맛있는 콩은 다 비싸기 때문이다. 


아래 결과는 2019년 베스트 오브 파나마 옥션의 결과이다. 

1등을 한 게이샤는 1kg에 266만원이었다. 

<출처:bestofpanama.org>

이런 콩을 취급할 수 있는 커피 회사는 한정적이지만 그만큼 생두에 관심을 갖고 취급을 하는 회사는 너무 많다. 이미 커피의 실력이라는 건 자본의 경쟁으로 넘어갔다. 그걸 업자들은 알고 있다. 돈 없지만 열정 있는 바리스타 후보생들에게는 애써 노력만으로 모든 걸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지만, 이미 업계는 돈의 전쟁으로 넘어가버렸다. 로스팅을 배우러 오는 예비 창업자에게 로스팅만 잘하면 입지가 안 좋아도, 이면도로에서 하여도, B급 상권이어도 장사도 잘 될 거 같이 말하지만 장사는 첫 번째도 목이고 두 번째도 목이고 세 번째도 목이다.  그리고 목은 결국 돈이다.


그렇다면 개인 로스터리는 무엇으로 살아남아야 할까.

가난 하지만 열정 있는 로스터리는 다 폐업을 해야만 하는 걸까. 


한국 커피업계는 바리스타의 추출 skill로 시작해 라테아트 그리고 로스팅, 마지막엔 커핑으로 끝나는 기술 습득의 커리어 패스를 발전시켜왔다. 이제 남은 건 기술로서의 커피 공부가 아닌 학문으로서의  커피만 마지막 영역으로 남겨져있을 정도다. 지금은 커피 공부를 한다는 게 학문을 한다기 보단 기술 습득을 하는 것이지만 앞으로는 정말 학문으로서 커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바리스타 학과가 아닌 농대에 진학하여 커피 품종을 개량하고 전염병을 퇴치하는 일을 하고,  유학은 에티오피아나 케냐로 가며  졸업 후 진로는 USAID나 네슬레의 커피 연구실에 취업을 하는, 그런 커피인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학문으로서의 커피 말고 아직 열지 않은 커피 업계의 판도라의 상자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에스프레소 블렌딩'이다.


에스프레소 블렌딩은 저가의 콩들의 나쁜 점을 감추기 위해서만 하는 게 아니다.

많은 커피의 선배들과 바리스타 아카데미는 블렌딩 이야기만 나오면 나쁜 로부스타 콩을 섞어서 팔기 위해서 혹은 저가의 콩을 좋은 콩과 섞어 가성비 있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 있는 건 아니다. 


블렌딩은 개인 로스터리의 특색을 나타낼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블렌딩은 돈 없이 실력으로 승부하고자 하는 가난하지만 열정 있는 로스터리의 유일한 경쟁력이다. 


싱글 오리진이 최고라는 말에 놀아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싱글 오리진이 최고일 순 있지만 내가 그 최고의 싱글 오리진 생두를  살 돈이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경쟁력을 찾아야 한다. 


블렌딩으로 자신만의 커피맛을 창조해 내야 한다. 그래야 그 로스터리에 찾아가는 의미가 생긴다.

싱글 오리진은 결국 생두이고 그 생두는 나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또 다른 로스터리도 갖고 있는 생두이다. 내가 그들보다 더 좋은 로스터기를 갖고 있고 그들보다 더 좋은 커피 머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아마 나는 다들 카페에 비해 그 싱글 오리진을 제대로 서브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경쟁을 해서는 결국 자본에 지고 말 것이다.


경쟁력의 앵글을 바꿔보자. 마지막 열지 않은 에스프레소 블렌딩이라는 상자로 말이다.

결국 내가 그 카페를 가는 건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무엇인데, 로스터리를 한다는 곳이 자신만의 블렌딩 한 개 없다는 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게다가 그 상자는 향후에도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공유가 안 되는 커피 기술은 바로 블렌딩이기 때문이다.

추출 기술을  공유하고 로스팅 프로파일을 같이 공유해도 블렌딩은, 블렌딩에 들어가는 나라 정도와 비율밖에 공유되지 않는다. 더 이상은 아마 그 누구도 나서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결국 로스터리의 핵심은 블렌딩이라는 걸 커피업계의 타짜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그 비밀을 열지 않을 것이다.


순수하고 열정 많은 개인 카페의 주인장들이 자신만의 블렌딩으로 선전하기를 응원한다.


결국 개인 로스터리에게 남는 건 자신만의 블렌딩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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