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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정 Feb 01. 2021

명작은 영원히 <이터널 선샤인, 2004>

이게 이렇게 슬픈 영화 였다니

기억을 지워도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되살아난다. 미셸 공드리의 불멸의 역작, 이터널 선샤인. 사실 이 사람 영화 전부 다 너무 재미 없어서 보다가 맨날 조는데, 어릴 때 보았던 이터널 선샤인도 마찬가지 였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진짜 우연히 보았는데 어느 순간 줄줄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게 이렇게 슬픈 영화였냐고 되물으며. 


기억을 지워주는 곳 Lacuna 연구소. 너무 고통스러울 때면 우리는 차라리 애초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라쿠나 연구소는 사람들의 그런 절박한 마음을 실현 시켜주는 마법같은 곳이다. 조엘 역시 자신의 이별을 견디는 게 너무나 힘겨운 나머지 Lacuna 연구소를 찾아간다. 연구소는 의뢰자의 사연을 듣고 그 사연 속 주인공의 기억을 골라서 삭제해 준다. 


연구소의 직원들이 조엘이 잠든 집에 찾아오고, 머리에 이상한 헬맷을 씌운다(조악해 보이는 장치는 이 감독 스타일인 듯). 그리고 차례차례 조엘의 기억 속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기 시작한다. 조엘이 라쿠나 연구소에서 하워드 박사에게 이야기했던 클레멘타인과 자신이 실제로 기억하고 있는 클레멘타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둘이 사랑했던 기억은 너무 찬란하고, 아름답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고 원한이 아니라 오히려 후회로 얼룩져있다. 그날 그렇게 나가는 너를 보내주는 게 아니었는데. 너한테 사과하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얘기하고, 너를 안아주었어야 했는데. 자신이 기억하는 클레멘타인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조엘은 필사적으로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뺏기지 않으려고 저항하지만, 이내 깨닫고 만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결국 행복했던 기억은 전부 다 지워지고, 둘의 첫 만남까지 지워버리기에 이른다. 잊으려고 애쓸 수록 기억은 선명해지고, 미련은 더욱 짙어진 다는 것을 조엘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 알 수 있다. 


한편 클레멘타인은 조엘에 앞서 조엘과 관련된 자신의 기억을 지운 것으로 나오는데, 클레멘타인을 보고 한눈에 반한 연구소 직원 패트릭은 조엘의 집에서 물건을 훔쳐 그녀의 환심을 사고 그녀에게 접근하지만 클레멘타인은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 한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결국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내게서 그 과거를 조금이라도 없애버린다면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고결한 여신의 행복이 얼마나 큰가!
세상을 잊은 자, 세상이 잊으리.
티없는 마음에 비춰진 끝없는 햇살!

- Alexander Poppe, 「Eloisa to Abelard」


티없는 마음이란 결국엔 공허한 마음, 날조된 마음일 뿐이다. 오로지 고결한 여신 같은 환상 속 존재에게나 가치 있는 것이다. 기억을 지운 후에도 결국 같은 일을 반복하는 자신을 보고 연구소의 접수원이었던 메리는 큰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기억 삭제를 의뢰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야기가 담긴 테이프를 모두 발송해 버린다.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고 잔인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엘과 클레멘타인 둘 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털어 놓은 악다구니를 듣는다. 그들은 혼란스러워 하지만, 이내 그 테이프 속의 말은 그들이 지운 실제의 기억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냥 절박함이 쏟아내는 분노, 회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헤어질 때 집을 나서던 것처럼 떠나는 클레멘타인을 조엘은 붙잡는다. 그리고 용기있게 다시 한번 클레멘타인을 향해 고백한다.  그 끝이 비록 뻔한 베드 엔딩 일지라도. 조엘은 받아들이기로 한다. 


밥을 계속 씹고 씹고 씹으면 단맛이 나는 것처럼 어떤 기억도 계속해서 곱씹으면 쓴맛은 다 날아가고 어느 순간 단맛만 남게 된다. 죽을 것 같아도 내일은 오고 만다. 그저 지금, 여기에 나만 존재할 뿐이다. 인내는 어렵지만 그냥 그 모든 감정과 시간들이 내 일부임을.. 고통이나 슬픔, 외로움 까지도. 죽고 싶다는 마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들까지도... 정답은 없는 것 같다. 그저 그 기억들을 끌어 안고 또 다른 오늘을 맞이하는 수 밖에.


여기야. 우리가 만난날이야. 이제 다 끝이야. 넌 멀리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지. 난 네 뒷모습을 보고 있었어. 뒷모습만 보고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지. 넌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오렌지색 셔츠 차림이었어. 그땐 멋진 셔츠라고 생각했지.

클레멘타인: 안녕하세요
조엘: 네
클레멘타인: 여기 혼자 앉아있는 걸 보고는 너무나 고마웠죠. 나처럼 적응 못 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
조엘: 말주변이 없어서요.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이에요. 저기...치킨 한 조각 빌릴 수 있을까요?

그리곤 대답할 새도 없이 바로 집어갔지. 벌써 연인이 된 것처럼 허물없는 기분이었어.

조엘: 조엘이에요.
클레멘타인: 반가워요, 조엘. 내 이름 갖고 놀리기 없기예요.
조엘: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이를테면 이렇게?
클레멘타인: 네, 그렇게요.
조엘: 안 놀릴게요. 사실 어릴 적엔 '클레멘타인'만 불렀죠. 매혹적인 이름이에요.

- 이런 추억이 곧 사라지게 돼.
- 알아.
- 어떡하지?
- 그냥 음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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