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정 Jan 12. 2021

편린일지라도..<윤희에게>

나는 가끔 네 꿈을 꿔

잘 지내니? 넌 이제 내 생각을 하지 않겠지. 난 아직도 가끔 네 생각이 나. 영화에 나오는 쥰의 고모가 그런 말을 하더라.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도 가끔 그 사람을 생각하는걸 보니 평생 잊지 못한게 되겠다고 말이야. 나는 아직 죽을 날을 헤아리기엔 젊지만, 그래도 너를 알게된 후 부터 지금까지 난 쭉 네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무심코 했던 얘기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서 마치 동영상을 재생한 것처럼 가끔씩 생생하게 떠올라. 실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우리 인생에서 정말 찰나지만, 그래도 그 찰나를 함께한 사람이 너였다는 것에 감사해. 네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 나도 그냥 그때그때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연애를 반복했을지도 모르지.


대학교 때 모파상의 <미뉴엣>이라는 작품을 공부했었는데, 유행이 다 지난 미뉴엣을 추는 부부들이 주인공이야. 묘지 같은 공원에서 노부부가 반주도 없이 미뉴엣을 춘다. 왜 미뉴엣을 추냐고 묻는 질문에 마음속에 바늘로 콕 찌른 것 같이 그런 가느다랗고 미세하지만 깊숙한 것이 있다고 대답해. 그때부터 알게 됐어. 내 마음속에 네가 어떻게 남아있는지를. 그리고 바늘로 찌른 자국 같은 이 기억은 내 마음속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오늘 눈이 아주 많이 와.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더라. 내가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했더니, 네가 너희 부대로 오면 된다고 했었잖아. 너를 보러 오라고. 그때 진짜 너를 보러갈까도 생각했었는데 말야. 너를 보러 오라고 한 그 말이 좋았어. 내가 너한테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거든. 그런데 널 만나러 가질 못했네. 바로 프랑스로 떠나게 된 바람에. 프랑스에서도 네 생각을 참 많이 했지. 서울에서보다 더욱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그 후로도 난 계속 내가 혼자였던 것 같아. 그래서 나한텐 항상 네가 필요했었어. 하지만 너한텐 아니었나봐. 너는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그대로 인 것 같아서 어느 순간 창피하더라. 그래서 그때부터 너한테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는 사이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게 되더라. 어떻게 보면 넌 내가 더 먼저 변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 난 사실 그대로야. 지금도 계속 꿈을 꾸고,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이기도 해. 노래도 많이 듣고, 글도 끄적이고, 음악도 만들고...


있잖아. 이제 우리 아마 다시는 만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내가 가끔 널 생각해 준다는 거 기억해줄래? 네 20대의 한 순간이 나라는 사람으로 계속해서 남아 있다는걸 말이야. 난 앞으로도 변하지 않고 나를 잘 지키면서 살아갈거거든. 그리고 아마도 가끔씩 널 생각하겠지. 정말 아주 미세한 짧은 순간일지라도, 너의 어떤 한때를 내가 잘 보관하고 있을게. 이걸 무슨 감정이라고 얘기해야 될까. 사랑? 그래, 사랑이라고 해두자. 일단은.



누군가는 치기 어린 과거를 묻어두고 나아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마음 속에 오랫동안 간직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과거를 간직한 채 또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때로는 과거의 내 모습을 아예 부정하려고도 한다. 그럼에도 그런 무언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일일까. 내 안에 무언가 쌓여 있다는 게. 혹은 한때나마 잠깐 쌓였었다는게. 쌓였다 녹거나 오랜 겨울 꽝꽝 얼어있는 눈처럼.


20대 때엔 내 안에 쌓인 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지 못해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외롭고, 우울했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영원히 혼자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저 적막하고 까만 상태였던 것 같다. 윤희는 오랫동안 자신안에 쌓여있던 것을 꼭꼭 숨겨왔다. 쥰도 마찬가지다(윤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기억으로부터 오랫동안 도망쳐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존재였다. 조금씩 용기 낼 수 있게 해주는. 그리고 한때는 사랑하기도 했던. 바늘로 콕 찌른 것처럼 깊숙하게 아리는 느낌으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그런 존재 또는 기억.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해야할까. 사랑. 그래. 사랑이라고 하자.



p.s. 이제 눈이 오면 생각나는 영화는 러브레터가 아닌 윤희에게가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녀는 그렇게...<벌새, 201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