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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정 Oct 05. 2020

소녀는 그렇게...<벌새, 2018>

소녀가 문 앞에 서 있다. 벨을 눌러도 아무도 답이 없고 문은 굳게 닫혀있다. "엄마!" 몇번을 소리쳐서 불러봐도 묵묵부답이다. 한참을 악을 쓰다 소녀는 호수를 본다. 열심히 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부르던 곳은 우리집이 아닌 아랫집이다. 은희는 말없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벨을 누르자 엄마가 문을 열고 나온다. 휴. 지켜보는 이도 은희와 같이 마음이 놓인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중학교 2학년생 은희는 부모님, 오빠, 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지환이라는 남자친구도 있다. 가장 친한 친구는 함께 한문학원을 다니는 지숙이다. 은희네는 대치동 상가에서 떡집을 한다. 바쁠 때는 남매가 모두 떡집에 나가 부모님을 돕는다. 은희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평범한 가정에 살고 있는 평범한 학생이다. 


은희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별로 말이 없다. 유일하게 수다스러워지는 건 남자친구나 지숙이 앞에서 뿐이다. 그런 은희 앞에 신비로운 사람이 나타난다. 바로 새로 오신 한문 선생님이다. 한문 선생님은 처음 본 날 은희에게 물어본다. 좋아하는게 뭐냐고. 망설이던 은희가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만화 그리는 거 좋아해요."

담배를 피우고 조금은 특이해 보이는 서울대에 다니는 영지 선생님. 뭘 좋아하느냐는 선생님의 질문은 은희의 마음을 열기에 충분했다. 은희는 혼자 학원에 왔다가, 단짝 친구는 어딨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이제 친구 아니라면서, 같이 문구점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친구가 자기를 아버지한테 일렀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그런 영지에게 선생님은 따뜻한 우롱차 한잔을 내어주신다. 그때부터 은희와 영지선생님의 관계는 조금 더 특별해 진다. 은희는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영지 선생님은 아무도 은희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해 주신다.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펴봐. 그리고 움직이는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손가락은 신기하게 움직여 져. "

"은희야. 누가 널 때리면, 참지마. 맞서 싸워."


 "저는 선생님이 제일 좋아요." 


은희를 둘러싼 세계는 무자비하다. 공부를 못해서 강남에 살면서 강북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언니를 아버지는 죽도록 때린다. 지숙이처럼 오빠한테 매번 두드려 맞아도 부모님은 오빠를 혼내지 않는다. 은희는 그런 오빠한테 맞으면서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빠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슬퍼할 부모님을 생각하면 신이 난다. 담임 선생님은 내가 노래방에 다니고 남자친구가 있다고 해서 나를 '날나리'라고 한다. 서울대에 못 가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고 한다. 하나뿐인 엄마는 내가 잠깐만 한눈을 팔면 도망 가버릴 것 같이 위태롭다.


그런데 은희 언니를 그렇게 잡던 아버지가 은희가 수술을 하고 나면 얼굴이 마비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병원 복도에서 갑자기 서럽게 펑펑 눈물을 쏟으신다. 맨날 나를 때리고 못살게 구는 오빠새끼는 언니가 버스를 늦게 타는 바람에 살아 돌아온 날 저녁 밥상에서 갑자기 펑펑 운다. "그건 지난학기잖아요." 은희가 그냥 너무 좋다던 후배는 새학기가 되자 은희에게 냉랭하다. 하나뿐인 친구 지숙이는 은희더러 자기 중심적인거 알고 있냐고 한다. 다시 관계를 회복한 남자친구 지환이는 만난지 120일째 되는 날 "쟤가 그 떡집 애니?" 하며 나를 흘기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가버린다. 은희 곁에 머무르던 것들은 계절을 넘기면서 하나둘씩 그렇게 변한다. 너무 좋아하는 영지 선생님 마저도.


"나 이상한 애 아니라고!"


영지 선생님이 떠나고 은희는 처음으로 집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내 곁을 떠나는 걸까? 어색한 기분을 좀처럼 떨치지 못하는 은희 앞으로 영지선생님의 소포가 도착한다. 은희가 혹을 제거하기 위해 입원하기 전에 선생님에게 선물했던 책과 스케치북, 편지가 들어있었다. 은희는 기뻐하면서 선생님에게 줄 답장과 떡을 포장해서 소포가 발송된 곳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영지 선생님이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선생님이 떠난 방에서 은희는 가만히 자기 손가락을 들여다 본다. 은희는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에게 물어본다. 외삼촌이 그립느냐고.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냥 이상해. 외삼촌이 이제 없다는 게."


"엄마. 외삼촌이 그리워?"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이 떠나도 은희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은희는 계속 나아간다. 벌새를 보면서 문득 나는 그동안 너무 오래 내 과거에 발목잡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상처에 갇혀서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벌새는 가장 큰 것도 몸무게가 24g 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아주 작지만 날아다니는 힘이 엄청 강하기 때문에, 벌새는 공중에 떠 있는 채로 꿀을 빨아 먹을 수 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게 있는 큰 상처 때문에 나는 영영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상처가 나를 너무 약하게 해서 삶에 대한 면역력이 아주 낮아진 줄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매번 좌절하고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벌새를 보고 난 후 그 시간들이 문득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절대로 나을 수 없는 깊은 상처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까 그냥 툭툭 털면 그만인 먼지였다. 그래서 이제는 모두 다 털어버리고,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으려한다. 나도 계속 나아가야 하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해.
방학이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서 다 이야기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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