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Memento Mori, 1999>
내가 중학교때 한창 러브장이 유행이었다. 각종 잡다한 그림과 스티커들로 노트 한권을 가득 채워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던 풍습(?)이었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모두 여학교만 다녔는데, 특히 중학교때는 남자친구나 좋아하는 오빠에게 주려고 러브장을 꾸미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좋아하는 선배에게 주려고 러브장을 만드는 사람이 더 많았다. 짧은 숏컷을 하고 교복바지나 체육복을 입고 다니는 언니들. 주로 농구부거나 댄스부였던 언니들이 우리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 언니들은 뭔가 특별했다. 연예인과는 다르게 언니에게 쉽게 안부를 물을 수도 있었고, 대화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점이 우리를 더 열광하게 했던 것 같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 사람 같지만 무척 가까이 있다는 점 말이다.
시은도 그런 친구이다. 머리가 짧고 키가 큰, 주로 운동복을 입고 다니는 친구. 그리고 효신은 그런 시은에게 '러브장을 쓰는 친구'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교환일기'라고 하지만, 실제 영화에서 시은이 쓴 글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일기장의 화자는 사실상 효신이다. 그래서 나는 뭔가 그 노트가 러브장 같다는 생각을 했다. 효신은 생각이 많고 자신의 세계가 강한 친구이다. 그래서 친구들에게는 미움을 받는다. 남과 조금이라도 다른 말이나 행동을 하면 쉽게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조금이라도 도드라지면 아이들은 끈질기게 그것을 깎고 부수려고 한다. 효신은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 꼿꼿이 자신을 지키려고 애쓴다. 유일한 친구는 시은. 그리고 유일한 해방구는 친구 시은에게 '교환일기'를 쓰는 일이다. 효신은 시은과 생일이 같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한날 한시에 태어나 한날 한시에 세상을 떠나기를 바란다. 시은은 곧 효신의 세계이다.
효신 : 난 죽을 수도 있어.
시은 : 맘대로 해. 난 니가 창피해.
한편, 시은에게 효신은 소중한 친구이긴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만큼 효신과의 관계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시은에게는 효신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많다. 두 친구의 그런 차이는 효신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당당하기로 했으면서, 시은은 효신의 손을 뿌리치고 효신을 밀쳐낸다. 자신을 찾아온 효신을 보고,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만다. 효신은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한 날, 교무실에서 우연히 시은을 마주친다. 둘은 오랜만에 비밀 장소인 옥상에서 만나지만, 시은은 어쩐지 시큰둥하다. "그래, 나도 너랑 놀고 싶었어. 됐어?" 효신에게는 하늘이 두동강나는 슬픈 이별이 시은에게는 그냥 친구끼리 놀러다니다 마는 것과 같았다는 걸까? 애원하는 효신을 뿌리치며 시은은 옥상을 내려온다. 시은으로만 가득했던 효신의 세계는 그날로 그렇게 끝나버린다. 시은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말이다.
좋아하는 언니를 위해 러브장을 쓰는 친구를 자연스레 따라했던 그때처럼 여학생 두 명의 우정 또는 사랑 그 어디쯤에 있는 이 영화를 보는 일이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이 영화를 보는데 주인공들의 성별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는 저 두 사람과 닮아있는 내 10대를 마주하는 것 같아 심경이 복잡했다. 심지어 10대에 봤을때도 그랬다. 이 영화가 지금 현재의 나를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었다.
나도 누군가를 위해 애써 노트를 꾸미기도 하고, 돌아서는 누군가를 붙잡기 위해 엉엉 울기도 했다. 또 남의 시선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그 사람을 피해 본 적도 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속이 상해도, 미니홈피에 비공개로 속상한 마음을 쓰는 것 말곤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특별하지도 않은 이유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급식실에 같이 갈 친구가 없어 혼자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도둑으로 의심을 받은 적도 있었다. "너는 왜 이렇게 나대고 재수가 없어?" 라는 말을 듣고는, 지나치게 남의 눈을 의식한 나머지 애써 할 말을 삼키고, 점점 내성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떠올리기만 해도 자연스레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이 영화가 마치 내 10대 시절의 어느 하루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것은 항상 쉽지 않았다. 뭐부터 써야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서야 그 시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