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랑하시잖아요?" 기생충에서 기택이 박사장에게 하던 대사다. 그 대사로 인해 박사장은 기택이 선을 넘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부부 사이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무언가 담아내기에 어려운 표현이기 때문이 아닐까? 당신이 뭔데 우리 부부 사이의 사랑에 대해서 왈가 왈부 하는거야? 박사장은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지만, 부부에게 사랑이란 뭘까? 균일한 형태이든, 변화하는 형태이든 부부는 우선 결혼을 한 이상 지켜야 한다. '사랑'이라는 때로는 정의하기 망설여지는 무언가를. 확실한 것은 거기에 동화(fairy tale)는 없다는 것이다.
"당신을 사랑했었지만 우린 서로를 증오하고 조종하고 상처만 주잖아"
"그게 결혼이야."
닉은 천천히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에이미를 실망시켰다. 처음에는 무능하고 게으른 모습으로 나중에는 에이미를 기만하고 바람까지 피우는 모습으로. 그리고 거기에 실망한 에이미는 닉에게 벌을 줄 것을 계획한다. 닉 역시 에이미에게 실망한다. 어느 순간 자신을 구속하려고 하고, 숨막히게 하고, 주눅들게 하는 에이미에게 질린다. 그래서 외도를 하고, 자꾸 밖으로 나돈다.
너무나 평범한 우리네 부부들 이야기가 아닌가? 남편은 항상 자신이 구속당한다고 생각하고 벗어나고 싶어하고, 부인은 남편의 무관심과 침묵, 무성의에 화가 난다. 에이미는 닉과 자신이 그런 뻔한 부부가 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왜 부인들이 점점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게 되는지 에이미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혼을 한 후 에이미는 자신도 결국 그런 평범한 여자들, 자신이 가장 혐오했던 그런 여자들 중 하나가 되어가는 것을 깨닫고 환멸을 느낀다. 그리고 그게 모두 닉의 잘못이라 여긴다. 그래서 닉을 사형시킬 계획을 세운다. 에이미를 정말 싸이코패스라는 한마디로 단죄할 수 있는가? 정말 단 한번도 남편을 죽이고 싶었던 적이 없는 부인이 존재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에이미가 그랬듯 나 역시 여러번 내 안의 뭔가가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적이 있었다. 그 느낌은 나를 변하게 만들었다. 남편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던 나에서, 원래의 나로 말이다. 남편과 연애를 할때, 에이미가 그랬듯 나 역시도 그가 좋아하는 어떤 여자를 연기하고 있었다. 순종적이고, 순진한 여자. 그가 원할 때 언제든 어디서든 자 줄 준비가 되어있는 여자. 그리고 그 역할을 즐겼다. 남편 역시 내가 좋아하는 어떤 남자를 연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고 나를 지지해주는 남자.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남자. 나의 약한 부분과 결핍된 부분을 다 이해해주고 보듬어 주는 남자.
쿨한 여자. 남자들은 그 말을 항상 하잖아. 마치 칭찬인 것처럼. "그 여자는 쿨한 여자야"
하지만 결혼 후 남편은 여러번 나를 화나게 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나 역시 남편에게 똑같이 상처를 주고 남편을 화나게 했다. 우리는 때로 괴물 같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며 싸우기도 했다. 때로는 남편이 너무 미워서 남편이 자고 있을 때 베개로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적까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남편을 죽이지 못했고, 겉으로 보기엔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다.
닉은 에이미에게 질려서 떠날 생각을 하지만, 결국 둘은 행복한 커플을 연기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닉은 마고에게 에이미가 아이를 가졌다며, 책임감 때문에 같이 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마고는 그가 에이미와 같이 사는 현실 자체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그는 에이미와의 관계가 불러온 안정감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금새 실체를 드러낼 허구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호수를 떠올릴 때 잔잔하고 평화로운, 가끔 어지러워 지지만 이내 다시 고요해지는 풍경부터 떠올린다. 풍랑이 치거나 가뭄으로 물이 전부 말라버리는 비극까지는 바로 생각하지 못한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관계에 속하게 되면, 우리는 '정상가족' 이라는 큰 방패 뒤에 숨을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다. 그래서 호수라는 개념에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형화된 풍경이 가장 먼저 연상되듯이, 우리는 결혼이라는 단어와 함께 자연스레 사회적인 지위가 완성되는 안정을 꿈꾼다. '정상가족' 이라는 방패가 주는 특권만을 떠올린다. 그 뒤에 펼쳐지는 전쟁같은 치열함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또는 그 바라던 안정이 불러올 권태 역시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왜 나랑 결혼한거야?" 라는 남편의 질문에 나는, 언제나 조건반사처럼 "사랑하니까." 라고 대답한다. "그래도 남편분을 사랑하시잖아요?" 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사회가 정한 모범 답안을 충실히 읊어댈 것이다. 네, 저는 아직도 남편을 사랑하죠. 불같은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니까요. 오랜 관계가 주는 안정과 편안함도 사랑의 한 형태죠. 마치 카메라 앞에 선 닉과 에이미처럼 말이다. 그게 정말 진정한 사랑이야? 같은 질문은 그냥 무시해 버린다. 그게 결혼이니까.
지금 무슨 생각해? 우리가 왜 이렇게 된걸까?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