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정 Aug 26. 2019

인간의 조건 <그을린 사랑, 2010>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는 <그을린 사랑>을 포함해 총 4편을 봤다. 그 중에서도 <그을린 사랑>을 보면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영화는 <블레이드러너 2049>라는 영화였다. <블레이드러너 2049>에는 인류를 위협하는 로봇, 리플리컨트를 잡는 형사 케이가 나온다. 케이도 역시 인공지능 로봇이지만, 모종의 사건들로 인해 본인을 인간과 로봇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이라고 믿게된다. 그런데 무엇으로 로봇과 인간을 구분하는가? 로봇이지만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다운 케이를 보면서 인간다움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어릴 때 고아원에 맡겨져 전쟁광으로 길러진 니하드와 기독교 극단 세력의 수장을 암살하고 끔찍한 감옥에서 17년 동안 고문을 당한 나왈. 둘 중 누가 더 고통스러운 인생이었느냐고 한다면 쉽게 대답하기가 망설여진다. 그러나 나왈은 강간으로 인해 얻은 두 아이를 사랑으로 길렀다. 니하드는 아무 죄책감도 없이 어린 아이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여성 죄수들을 수십번씩 강간하는 괴물이 되었다. 니하드는 감옥이 폐쇄된 후에도 새로운 신분을 얻어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공동체에 섞여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살아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 영화의 내러티브적 목표라고 하는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나왈의 무덤 앞을 찾은 아부 타렉이자 니하드의 뒷모습을 멀찌감치 비추며 끝이 난다. 그 장면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아마도 이 영화의 목표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니하드의 뒷모습이 나오기 전의 장면은 나왈이 쓴 편지가 니하드와 쌍둥이에게 차례로 읽히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편지의 내용은 결국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이다. 이어서 마침내 비석을 갖춘 나왈의 무덤이 나온다. 그리고 카메라는 멀어지면서 자신의 엄마를 강간한 고문 기술자 아부 타렉, 즉 니하드를 비춘다. 


니하드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사실상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길러져, 소년병으로 키워지고 또 반대편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고문 기술자가 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선택에 의구심이 든다. 정말 그 선택 밖에는 없었을까? 정말 나왈을 강간하고, 수 많은 죄수들을 강간하는 선택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까? 니하드가 태어날 때 어둠 속에서 아이를 받은 나왈의 엄마는 아이를 엄마 쪽으로 가까이 하며 엄마를 기억하라는 대사를 한다. 그런데 그 대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니하드는 자신의 엄마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가장 악랄하게 자신의 어머니를 괴롭히고 짓밟는다. 그랬던 그가 나왈의 무조건적인 용서의 메시지 앞에 던져진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똑같이 고통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두 사람을 영화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난 후 나서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비극’이라는 단어이다. 이 영화는 비극적이다. 여기서 ‘비극’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비극' 1. 인생의 슬프고 애달픈 일을 당하여 불행한 경우를 이르는 말 2. 인생의 슬픔과 비참함을 제재로 하고 주인공의 파멸, 패배, 죽음 따위의 불행한 결말을 갖는 극 형식. 2의 의미로 탄생한 단어가 1로 확장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의 구조를 다룬 책인 ‘시학’에 따르면, ‘비극’을 ‘비극’으로 만드는 것은 주인공의 결함 때문이다. 주인공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순간적인 실수가 끔찍한 결말을 야기하게 된다. 


나왈과 니하드는 각각 잘못된 판단을 했다. 나왈은 와합의 아이를 임신했고, 이는 이슬람 공동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나왈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사랑에 눈이 멀어 니하드를 가졌고, 키울 수도 없는 아이를 세상에 나오게 했다. 평생을 아이를 찾아 해매이다 결국 기독교 극우주의 단체의 수장을 암살하고, 17년간 감옥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감옥에서 고문 기술자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과 함께 여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그리고 그토록 찾아해맸던 아들을 찾았지만, 그는 바로 자신을 강간하고 임신하게 만든 고문 기술자였다. 한편, 니하드는 군인이 되어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죽였고, 고문 기술자가 되어서는 죄수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짓밟았다. 그리고 그가 마구잡이로 유린했던 죄수 중 하나는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였다. 


나왈이 암살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감옥에 끌려가 그렇게 안타까운 일을 당하지는 않아도 됐을 것이다. 니하드가 부대에서 도망치거나 고문 기술자가 되어서도 죄수들에게 조금의 연민을 베풀었다면 어머니를 강간한 아들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처음에는 누가 니하드일지, 누가 쌍둥이의 아버지일지 모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잔느와 시몽만 모를 뿐 관객들은 눈치를 챈다. 그러는 사이에도 영화는 결말을 향해 계속 된다.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떨어져 친모를 모르고 살던 남자가 고문 기술자가 되어 자신의 엄마를 강간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듣는 이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뉴스 말미에 흔히 듣는 단신처럼 들을 때는 인상을 찌푸리지만 이내 잊어버리게 될 자극적인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우리는 영화가 주는 여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영화가 우리를 그 비극의 한가운데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잔느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나왈과 많이 닮은 잔느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치 동일한 사람이 겪은 일인 것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면서 곧 영화를 보는 이는 과거의 비극을 현재로 불러오면서 나왈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그녀가 겪는 일들에서 연민과 공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녀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모든 고통을 겪고도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을 만난다. 그리고 그와는 정 반대로 고통 속에서 결국 인간임을 포기해 버린 인간도 함께 우리 앞에 갑자기 던져진다. 무한한 용서와 사랑으로 점철된 나왈의 마지막 편지에 이어서 등장하는 아부 타렉의 모습은 이질적이다 못해 경멸이 들 정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본 후 우리 감정은 고요해지고 평온을 찾게 되며,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지칭했다. 어떤 작가가 모든 문학과 고전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면 이 영화 한편을 본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는데, 어떤 의도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에게는 니하드와 같이 잔악한 면도 있지만, 동시에 나왈이 보여준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잠재력도 있다. 결국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혹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 만들지는 그 두 가지 중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왈의 편지와 니하드를 비추는 편집을 통해 우리는 무엇이 ‘인간다운’ 선택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추하게 살지 않은 나왈의 인생을 곱씹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를 같은 인간으로 부를 수 없음을 이 영화를 본 우리는 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엄마인지도 모르고 죄수를 있는대로 유린하는 사람들까지 인간으로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익숙한 핑계는 함께 인 것으로 다 되었다는 나왈의 편지 앞에서 차마 꺼내기 부끄러운 문장이 되어버린다. 모진 세월을 다 견디고 강간으로 낳은 자식마저 사랑으로 기른 위대함은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한다. 철저히 주인공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영화는 우리 안의 위대함을 더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마치 모범적 인간의 전형인 것처럼 그려진 그녀의 모습과 우리를 비교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불가능할 것 같아 보이는 사랑을 실천한 위대한 인물 앞에서, 한계와 무력감도 느끼지만 우리의 영혼은 오히려 치유 받는다. 인간이라면 이래야만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도 함께 상기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나이게 하는 것<블레이드러너2049, 201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