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예전에 나온 영화의 속편 이란 것만 알고 아무 사전 정보 없이 보니까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이 좀 지루했다. 한번에 다 보지도 못하고 몇번을 끊었다가 다시 보기를 반복했는데 막상 다 보고 나니까 긴 여운이 있었다.
인간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일종의 복제인간인 리플리컨트들은 인간에 의해 노예처럼 착취 당하고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필요해서 리플리컨트를 생산하고는 그들이 감정을 갖고 인간처럼 행동하는데는 두려움을 갖는다. 리플리컨트들의 몇차례의 걸친 소요 후,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인간에게 순종적인 리플리컨트가 개발되고, 경찰은 블레이드 러너를 고용해서 자유의지를 가진 구 버전의 리플리컨트들을 없앤다.
인간들은 리플리컨트를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이 인간다워 지는 것을 계속 경계한다. 인간에게 반기를 들었던 리플리컨트들을 색출하고 죽이는 것 또한 그런 경계의 일환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인간과 리플리컨트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때로 우리는 동물들의 모습에서 인간보다 더 나은 점을 발견하거나, 같은 인간의 잔학함에 치가 떨릴때가 있다. 인간답다는 단어는 다른 존재들 위에 군림하려는, 그래야 한다는 의식에서 출발한 단어가 아닐까? 결국 무엇으로 존재하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어떻게 존재하는지 만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
무엇으로 존재하는지는 사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리플리컨트들이 인간과 같이 되기를 혹은 고유한 의미를 갖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나도 어떤 특정한 곳(적어도 지금 내가 속한 곳은 아닌 곳)에 속해야 내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었다가 진실을 깨닫고 절망하던 K처럼 나도 내가 평범하다는 게 고통스럽게 느껴졌을 때가 있었다. 뭘 해도 권태롭기만 하고 내 자신이 초라해 보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영화 말미에 프레이사라는 리플리컨트 반란군의 대표가 '옳은 것을 위해 죽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일이야(Dying for right cause, it's the most human thing we can do)'라는 말을 한다. 사실 프레이사가 주장하는 옳은 것이란 어떤 집단을 위한, 전체를 위한 '대의'에 가깝다. 그러나 그 대의라는게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K는 프레이사가 주장하는, 리플리컨트 전체를 위한 '옳은 것'이 아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 K가 실제 어디에 속한 존재이든, K는 그 순간 가장 숭고하고 진실된 존재였다. 그 어떤 존재보다도 현실적이고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은 정작 내 인생에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채찍질 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