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정 May 12. 2022

이걸 일이라고 시키냐

오늘은 내가 가장 스트레스 받았던 업무 지시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 마이크로 매니징으로 하나하나 세세하게 이것저것 참견하는 것도 너무 열받지만, 더 짜증나는 건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모호한 업무지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ex-팀장은 모호한 업무지시의 끝판왕 같은 놈이었다. 기억이 미화돼서 그새끼에 대한 악감정을 까먹기 전에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 나는 말도 안되는 업무 지시로 1년간을 고통 받았다. 전임자, 전전임자는 아무 일 없었는데, 넌 왜 그래? 동네 사람들. 이거 제가 이상한거에요?


매일 자신을 위한 보고서를 만들어줬어야 했나? 그는 매일 아침마다 '동향보고'를 듣길 원했다. 무슨 무슨 사이트에 매일 뭐 올라온게 있나 체크를 해서 있으면 그 즉시 그에게 보고를 해야하는 식이었다. 그것도 거기 올라온 자료들을 가독성도 떨어지는데 다 출력해서 갖다 줬어야 했다. 처음에는 그냥 뽑아 갔다. 그랬더니 내용을 어느정도 숙지를 하고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해서 그 다음부턴 내용을 꼼꼼히 봤다. 그래서 외운대로 말해주는데, 아니 일단 여기부터 이상한거지. 무슨 시험 공부도 아니고. 외워서 테스트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렇게 하래서 했는데 말은 다 듣지도 않고, 그렇게까지 자세히 볼 필요는 없단다. 이 놈이? 


지금 와서 전임자들과 나를 비교해보니 내가 뭐가 잘못됐었는지 알았다. 그는 그냥 본부장 놀이, 임원 놀이를 하고 싶었던건데 내가 장단을 안 맞춰주니까 화가 났었던 것 같다. 동향보고라고 하지만, 그냥 아침에 보고 같은 걸 받으면서 이바구나 좀 털고 싶었던 것이다. 근데 동향을 나보고 조사하라고 하고, 지는 맨날 유튜브 보고, 주식 보고 있으면 화가 나요 안나요? 그리고 내가 기껏 뽑아준 동향자료(...)들을 메모지로 쓰고 있는데 화가 나요 안 나요? 결국 동향보고 중요한 것도 아니었던 거잖아. 이런 개쉽싸리... 아침마다 한 사람을 그렇게 죄인처럼 세워 놓고, 눈치보게 하고 그렇게 했어야만 했냐! 


개쉽싸리는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볼 수 있는데 주로 연못이나 물가, 습지 근처에서 발견된다. 데일리ⓒ


그런 황당한 동향 보고의 끝판왕은, 경쟁사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자료들을, 거기 가입한 회원들만 볼 수 있는걸 일부러 아이디까지 어디서 훔쳐가지고 모니터링을 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디만 있으면 기업 경영정보까지 열람이 가능했는데, 어디서 아이디를 훔쳐와서는 그거를 가지고 거기 이사회에서 무슨 얘기 했는지 그런걸 보고 업데이트 되는 걸 계속해서 알려달라고 했다. 경쟁업체에서 몇번 뒤통수를 쳐서 그것때문에 회사에 몇번 일이 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감시를? 그것도 꾸준히 해서 지한테 보고 하라고? 국정원이냐? 


거기다 더 황당한건, A 업체에서는 매주 자기들이 만드는 자료를 우편으로 보내주는 메일링 시스템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A업체 자료를 받아서 갖다 주는 업무였다. A 입장에서 경쟁업체인 우리 회사로 받기가 좀 그렇다는 거다. 아니 왜? 받을 수도 있지.. 그건 심지어 아이디 패스워드 훔쳐서 구독하는 대외비 자료도 아니고, 그냥 아무나 신청하고 돈 내면 다 보내주는 자료였다. 근데 그걸 우리회사 주소로 받으면 산업스파이짓 하는거 같다고, 굳이 직원인 내 개인주소로 받아서 그걸 그 인간한테 다시 갖다주는 업무를 나보고 하라고 했다. 무슨 내가 두 업체 사이의 비둘기도 아니고.. 차라리 지네 집 주소로 받던가요. 왜 내 개인 주소로 받아서 지한테 갖다주는 일을 해야 돼. 난 보지도 않는데. 


전서구와 종이낭비 업무를 그 뒤로도 계속했는데, 내가 지 맘에 안 들게 하니까 인사팀에 패악을 부려서 다른팀 직원을 받은 후에 그 사람을 시켰다. 내가 느끼기엔 그 사람이나 나나 별로 퀄리티의 차이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새끼는 그 분과 나를 눈에 띄게 차별 했다. 그 분하고는 입만 잘 털면서, 나한테는 뭐라고 하고 이런거 출력만 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냐고 면박을 주었었다. 너 말 잘했다. 야 출력만 하면 되는데, 그럼 니 손으로 니가 직접하라고 개쉽싸리 같은 놈아!


진짜 저 놈이 어느정도냐면, 내가 맘에 안 든다고 지 혼자 나를 내보내려고 시나리오 짠 다음에 나를 불러서 "다정씨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습니다" 타령하고, 그러고 나서 결국 날 내보내는데는 실패하니까 은근히 부서 사람들과 분위기 조성해서 나를 따돌리고 나한테 나중에는 아예 아무일도 시키지 않았다. 기존에 하던 일들도 다 뺏어서 새로 충원된 사람에게 주고, 내 내선 전화번호도 다른 직원에게 주고, 나한테는 유튜브 동영상 편집하는 일을 시켰다. 내가 동영상 편집 해본 적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에 전혀 몰랐다면 진짜로 눈물로 매일 밤을 지샜을 것 같다. 


더 짜증나는건 그런 짓들이 법적으로 아무 처벌도 안된다는 것이다. 저런 똥같은 일만 계속 시키는데도 그게 합당한 업무 지시에 속한단다. 그는 지독한 수동공격형이라서, 절대로 내가 개선해야 될 점은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자기 심기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비록 어딘가 이상한 업무지시일 지 언정 자기 맘에 안 들게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수정 사항이나 요청 사항을 얘기해 주는 것이 정상적인 회사의 업무 시스템이다. 이 새끼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지 심기를 거스르고, 뭔가 지 맘에 안 드니까 사무실 분위기가 싸해질 정도로 나한테 뭐라고 하고, 면박을 주었다. 요즘은 자기 맘에 쏙 드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지 잠잠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진짜 퇴사 안하고 아직까지 회사 다니는 내가 레전드다, 레전드.

매거진의 이전글 팀장들은 어디서 괴롭히기 교육 듣는거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