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나도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나 복잡한 마음이 든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한편으로 엄마가 밉기도 하다. 나이가 들 수록 엄마한테 말하지 못하는 것도 점점 많아진다. "정말 너를 내가 낳은게 맞을끼?" 엄마도 이런 생각을 종종 하겠지?
경아는 혼자서 딸을 키우는 중년의 여성이다. 감독이 캐릭터 구축을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고 여겨지는게, 전형적인 중년 여성 캐릭터이면서도 그 인물만의 내러티브가 살아있는 캐릭터가 바로 경아이기 때문이다. 70대 이후의 노년 세대의 자식세대인 현재의 50대~60대 여성, 경아라는 이름은 '애로 영화'라 불리는 옛날 영화에서 흔하게 대상화 되던 여성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했다. 장녀이든 맏딸이든 남자 형제들을 먹여 살리는데 기여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어떤 대가도 누릴 수 없고, 가부장제의 폭력에 짓눌려 살았지만 거기에 저항하기 보다는 가부장제 자체를 내면화 할 수 밖에 없던 우리의 엄마들. 경아는 그런 엄마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경아의 딸이자 이야기의 또다른 주인공인 연수는 경아와는 다르다. 좋은 교육을 받아서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아이들을 대할 때도 소신있고 수업도 똑부러지게 하는 주체성을 가진 여성이다. 연수 역시 가부장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엄마와는 다른 선택을 하려고 한다. 감독이 연수라는 캐릭터를 구축할 때, 10대~20대 초반의 어린 여성들과 50대 이상의 중년 여성 사이에 놓인 청년 여성이라는 성격을 부각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교사라는 직업 역시 그런 세대간의 징검다리로서 연수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설정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봤을 때 이 영화는 단순히 평범한 모녀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그렇다. 이 영화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경아가, 연수가 그랬듯 가부장제라는 폭력은 여성들을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유일하게 피해자가 비난을 받는 범죄가 바로 성범죄라고 한다.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그러느냐, 꽃뱀 아니냐, 너도 즐겼지 않냐... 놀랍게도 최근까지도 성폭력 사건이 벌어지면 피해자들이 흔히 입는 2차 피해들이다. 이 나라에서 강간이 범죄라고 규정된 것이 1994년이다. 이전까지는 강간 피해자에게 법정에서 공공연히 그냥 가해자와 결혼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던게 우리 나라였다. 지금도 법정에서 강간을 입증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걸핏하면 무고죄로 맞고소를 하고, 피해자가 오히려 피해를 입증해야하는 황당한 상황이 부지기수로 벌어진다.
경아는 남편에게 맞아도 아이를 위해서 참아야만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온 세대이다. 경아의 친구들, 언니들은 강간을 당했어도 그 사실조차 이야기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 경아 역시도 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스스로 피해자라 생각도 못하듯이, 어떤 성폭력이 벌어졌을 때 피해자를 탓하는 것이 경아에게는 익숙했다. 그리고 경아는 자신의 딸 연수는 다르다고 믿었다. 그런 '꽃뱀', '창녀'들과 내 딸은 다르다고 믿었다. 내가 만든 이 온실 속에서 귀하게 길렀으니까. 내가 당한 폭력은 그냥 내가 잘못해서 당한 것일 뿐이니까. 연수는 나와 다르니까 이런 일을 겪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연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의 온실은 아무 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엄마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며 살았다. 엄마의 어쩔 수 없었다. 연수가 한 일이라고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직업을 가졌고, 남자친구를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사랑했던 것 뿐이었다. 왜 하필 이라는 질문은 연수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연수의 삶은 그로 인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N번방을 무너뜨려라' 라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봤던 것이 기억난다. 제대로 처벌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조차 없던 시기부터 주범들이 모두 체포 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났다. 흔히 생각하는 '험한 일'을 겪은 생각하는 것만큼 피해자는 약하지 않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인 지영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살아갈 기회를 새벽에게 양보한다. 그게 아마도 이 세상이 여성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도 현실보다는 미화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동정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피해자가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니까. 그래서 피해자는, 상처 입은 사람들은 어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본다면 아마도 이해가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언가 거대한 폭력이 나를 짓밟으려 한다고 해도, 살아있는 한 나는 살아간다. 분노도 하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고, 무서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살아간다. 이걸 극복이라고 부를 순 없을 것 같다. 극복을 했다고 하면 장애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피해를 입었는데 그게 노력한다고 아무 일이 아닌 것도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영이처럼 무기력하게 삶을 바로 포기해 버릴만큼 약하지 않다. 이렇게 강한 의지와 용기를 가진 연수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연수는 상처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피해자 신분이 되어버린 나, 유일하게 내 편이라 믿었던 엄마가 준 큰 상처,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 손가락질... 연수는 자신이 짊어진 이 모든 것들을 그저 짊어진 채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보면 영화 제목이 '연수'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럼에도 '경아의 딸'인 이유는 우리가 잊고 있지만, 경아 역시도 폭력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의 일부가 되어서 피해자인 우리를 비난하고 억압하기도 하는 그런 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때로 서로에게 상처주고, 지독하게 굴지라도 이건 엄마의 탓도, 내 탓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