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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일린 Oct 10. 2023

바야흐로 취향의 시대

_나불나불 정유미 편을 보고

나도 사실 취향이 없진 않는데, 있긴 있는데, 
그거를 이해 못 하거나 하지는 않는데... 

지금부터 찍먹으로 할게. 
그거 그렇게 정하는 거 아냐. 
어디 가서 물어보면 대답은 해야 될 거 아니야      



너 T

유튜브 라이브를 들으며, 먹고살만해지니까 취향을 따지기 시작했다는 이우정 작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군사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되었지만, 사회의 민주화는 그보다 느리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90년대 말까지도 중고등학교에서는 복장단속과 두발규제가 있었으니까. 개인의 개성과 취향은 말살되었고, 어른들은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다니는 것을 봐야 비로소 안심했다. 여전히 군대문화가 곳곳에 남아 있는 획일화된 사회였다.      


서서히 사회도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커졌다. 아마 그동안 제일 고통받았던 사람들은 타고나길 예민한 사람들이었을 거다. 왜 이것도 못 참냐는 질시를 받아가며, 스스로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얼마나 자책하며 살았겠나 싶다. 여전히 예민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훨씬 이해가 높아진 편이다.      


자신의 취향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맞고,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하는 것도 맞다. 그런데 요새는 너무 단순화시킨 취향 안에 사람을 끼워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일종의 변형된 획일화랄까. 예전에는 흑백 밖에 선택지가 없었다면, 이제는 빨주노초파남보 안에서 고르라고 하는 정도의 차이. 빨간색과 주황색 사이에 있는 무수히 많은 색깔보고 넌 빨강이나 주황이야 확실히 밝히라는 강요가 곳곳에서 이뤄진다.      


음식이나 성격에 대한 기호가 딱히 없다고 하면 그때부터 불편한 시선이 쏟아진다. 어떻게 취향이 없을 수 있느냐며, 오래전 획일화된 사회가 낳은 희생양을 보듯 불쌍하게 쳐다본다. 때론 이런 변화에 대한 반발도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복잡하게 따지고 취향을 일일이 존중하는 게 피곤하다는 거다. 특히 나이 든 남성이나 젊은 남성 중에서는 예전 획일화된 문화를 그리워하면서 과거로의 역행을 꿈꾸기도 한다.      

 

물론 매사에 명확한 취향이 없는 사람이,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것도 모르고 사는 불행한 사람일 수도 있다. 획일화된 취향을 강요받던 예전에는 이런 경우가 흔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저 무디거나 무심한 사람도 있고, 관심사 외에는 딱히 호불호가 강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예전에는 이런저런 취향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경계가 모호해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정보가 없다 모른다 두렵다      

취향을 가지는 것은 좋다. 끼워 맞추기식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세분화된 선택지를 주는 것 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상대에게 취향을 가지라고, 밝히라고 강요하는 걸까.      


이렇게 취향을 가지고 밝히는데 관심이 많은 모습은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다. 10대부터 20대까지는 내가 누구인지 찾고, 방황하는 시기이니까. 나를 드러내는 것에 민감하고, 나라는 존재를 설명하려 애쓰는 시기이니까. 이 시기를 잘 보내지 못하면 30대, 40대 심지어 은퇴 이후에 나를 찾겠다고 방황하는 모습도 꽤 찾아볼 수 있으니까. 


이런 논리라면 예전 10대~20대도 그랬을 텐데, 최근 들어 유독 취향을 찾고 드러내라는 강요가 두드러지는 이유는 뭘까. 그건 사회의 신뢰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신뢰가 약한 사회에서 정보가 없다는 건 곧 두려움과 직결되기 때문에. 


요즘은 화장품 하나를 사더라도, 유튜버의 리뷰 동영상, 인터넷 상세페이지와 그 밑에 달린 한 달 리뷰까지 찾아보며. 어떤 브랜드에서 살 것인지, 그 브랜드의 어떤 라인을 살 것인지 미리 정보를 찾는다. 음식점도 리뷰가 없는 곳은 웬만해선 가지 않는다. 부모보다 가난할 첫 번째 세대로서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선 실패를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가 됐다. 인간관계가 갑자기 확장되고, 새로운 만남이 수시로 일어나는 대학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전, 인스타그램에서 아이디를 나누며 평소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건 필수코스가 됐다. 최대한 정보를 파악해서 믿고 거를 사람들을 확인해 놓아야, 인간관계에서의 실패 확률을 줄일 수 있으니까.      


상대에 대한 정보 없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관계 맺는 것은 이제 두려운 일이 되었다. 취향을 미리 밝혀야 나랑 맞는지 안 맞는지 미리 확인할 거 아닌가. 취향을 밝히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너의 취향을 존중해 줄 테니 먼저 명확히 밝히라는 거다. 애매모호하게 굴다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험담 하거나 뒤통수 때리지 말고.


얼마 전에 한 분이 자기도 사람 좋아하고 만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인데,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자취하는 친구 집에 놀러 간다고 했을 때 가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요즘 같이 흉흉한 세상에 어떤 애인 줄 알고 집에 가느냐, 차라리 밖에서 만나라고 했다는 거다. 데이트 폭력과 안전이별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안타깝게도 소개된 스펙이 대부분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물건과 달리 사람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고 하고, 한두 가지 특성으로만 규정하기도 어렵다는 게 이들이 처한 딜레마다. 그렇게 재고 따지며 똑똑하게 굴어도, 스스로 실시한 사전 검증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쉽게 사람들에게 속거나 작정하고 덤벼드는 사기꾼들의 타깃이 되곤 한다. 


결혼이 늦어지고 출산이 줄어드는 것도 어쩌면 사회 전반의 신뢰의 부재와 부의 불공평한 분배가 혼재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정된 자원을 분배해서 써야 하는 입장에서 만남을 시작하는 것부터 너무 어렵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여자친구, 남자친구에게 나눠 줄 여유와 이유도 부족하다. 아이를 키우며 따라오는 희생은 직접 겪으면 생각이 달라지지만, 옆에서 지켜보면 그저 고통스럽고 자원의 낭비다. 




우연과 낭만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일 테다.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하염없이 기다리던 사람들과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으로 실시간 위치를 공유하는 세대와 간극은 생각보다 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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