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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일린 Mar 05. 2024

참을 수 없는 비루함이 찾아올 때

_(스포주의) 결국 중간에 포기했어요.

얼마 전부터 글 하나를 쓰고 있다. 긴 호흡의 글을 써본 적도 없으면서 호기롭게 도전한 글이다. 처음에는 곧잘 써지는 듯도 했지만, 이내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미소를 지었다. 웃음을 머금었다.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리고 또다시 반복. 평소 얼마나 어휘와 표현이 부족했는지 매일매일 확인받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결과물이 만족스러우면 그나마 버틸 텐데. 글도 어찌나 비루한지.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하지만 이건 재활용도 안 될 거라고 다시 읽을 때마다 강하게 확신했다.      

 

결국 한 열흘 동안은 원고 파일조차 열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비루한 글을 왜 쓰고 있는 건지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보다 나를 설득하는 게 우선이었다. 내 글의 비루함을 참아낼 방법을 찾은 후에야, 겨우 파일을 열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었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니까 

지금 쓰는 글은 개인적인 경험이 많이 배어 있다. 주제나 내용이 비슷한 글도 많고, 더 훌륭한 글도 더더욱 많지만, 완전히 같은 글은 없다, 이전에 없었던 글이자, 나만이 쓸 수 있다는 글이라는 그 고유성 하나만으로도 존재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모든 이야기는 잊히니까

내가 썼다고 하기에 너무 부끄러워, 차라리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비루한 글이 남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잊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저주이자 축복인 망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어차피 모든 건 잊히기 마련이고, 감정도 지나가기 마련이다. 얼마 전에 방송에 나온 박진영이 자기가 작곡한 노래도 못 알아보고, 누가 표절했다고 길길이 화를 낸 적이 있다고 민망하게 웃었던 것이 기억났다. 지금에야 그 글만 영원불멸할 것처럼 요란을 떨지만, 언젠가는 썼다는 것도 잊을 미래의 나를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비루함마저도 나의 일부이니까

내가 왜 이렇게 비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무언가를 했을 때만 사랑을 받았던, 조건적 사랑에 길들여진 어린아이가 보였다.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꾸미고 못난 점을 감추려는 내 안의 어린아이가 자꾸만 튀어나와, 비루함마저도 나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여전히 내 글의 비루함을 참아낼 아량이 부족하지만, 내 안의 어린아이를 다독이며,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 본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거라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조금씩 쓰다 보면 언젠가는 끝나겠지. 

그 희망 하나로 오늘도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린다. 




(스포주의) 

결국 글은 끝을 맺지 못한 채 멈추고 말았다. 처음부터 너무 긴 호흡과 분량의 글에 도전했다는 것이 첫 번째 패착이요, 상업적인 글을 쓸 거였으면 보다 더 팔릴 만한 글을 썼어야 했는데, 독자를 고려하지 않고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글을 썼다는 것이 두 번째 패착이었다. 도전하면서 느꼈던 소회는 다음 글감으로 삼는 걸로 위안하며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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