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그때는 개근상, 지금은 개근거지
90년대까지만 해도 부모들은 개근상을 놓칠 새라 전전긍긍하며 아파서 걷기도 힘든 아이들을 학교로 떠밀었다. 나 역시 등 떠밀린 아이들 중 하나였다. 드러눕더라도 학교에 가서 누워있어야 한다며 닦달하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뒤로 한 채, 열이 펄펄 나는 몸을 끌고 교문을 향해 걸어가던 길이 아직도 생각난다.
가파른 등굣길을 힘겹게 오르며 처음 알게 되었다. 발걸음이 천 근 만 근 같다는 표현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걸. 발을 뗄 때마다 평소의 몇 배의 힘으로 움켜잡아대는 지구 중력의 힘을 온몸으로 느꼈다. 학교에 가서 한 일이라곤 열 오른 숨을 내쉬며, 하루 종일 책상 위에 엎어져 있는 것뿐이었다.
교문 입구에서 체온을 측정하고, 조금이라도 열이 나면 교문조차 통과할 수 없던 코로나 시기를 보낸 아이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학교괴담이나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랬다.
아파도 학교에 가야 했던 이유는 개근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개근상은 근면 성실의 상징이었다.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고도 성장기를 이끌었던 노동집약적 산업은 우상향 하는 일차방정식의 그래프처럼 노동을 투입한 양만큼 결과가 나왔다. 근면 성실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보장하는 삶의 방식이자, 누구도 함부로 깎아내릴 수 없는 최고의 가치였다.
열악한 노동조건에도 불만 없이 묵묵하게 일할 사람을 양산하고 싶은 재벌과 독재세력의 이해관계와도 잘 맞아떨어졌기에, 근면 성실은 일종의 도그마처럼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들의 논리를 체화한 부모들은 근면 성실하게 버티면 언젠가 볕 들 날이 있을 거란 믿음을 아이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IMF를 기점으로 급격히 그 믿음이 해체되기 전까지는.
2000년대 정보통신의 발달로 산업구조가 급변하면서, 꾸준함보다는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대박을 쳤다는 성공신화들이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먼저 뛰어든 선구자들의 상상을 초월한 성공에 한탕주의자들까지 합세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취급하는 분위기가 조금씩 번져갔다.
화려한 성공 이면에는 유연한 고용을 보장해야 한다는 압박을 방패 삼아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이 자리 잡았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에 비인간적으로 대해도 된다는 의미가 포함된 건 아님에도, 사용자들은 열악한 처우를 당연시했다.
살아남으려 애쓰는 사람들은 선의 경계를 흐리는데 힘쓰는 대신, 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피 터지는 경쟁을 벌였다. 공평을 외치며 정규직 노조들은 차별을 당연시했고, 점점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극단적으로 갈리는 차별은 점점 공고화되었다.
비정규직의 광풍은 평생직장을 삼켰고, 불확실성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학창 시절 내내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를 나오기만 하면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근면성실하게 입시에 매진했던 모범생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예전의 성공공식을 여전히 잊지 못한 사람들은 교사나 공무원으로 몰려갔다. 이제는 그 직업들마저도 안정적인 삶과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거품이 빠지는 중이지만.
이제 대학 입학이 성공을 보장하는 건 의사가 유일하다. 의대 정원 확대의 본질은 필수의료, 지방의료 강화임에도, 지금 의대 정원 확대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안정적인 밥벌이 자리를 늘어나길 바라는 목적이 더 커 보인다.
의대 정원 확대에 반대하며, 12년 학창 시절 내내 쏟아낸 노력의 대가를 보장받아야 마땅하지 않느냐라는 전직 의협 회장의 주장에는 의사로서의 비뚤어진 자부심 외에도 근면 성실의 신화는 지켜져야 한다는 구세대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난다. 강남 3구를 중심으로 이미 출발선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은 외면한 채.
평생직장이 사라진 자리에는 꾸준히 뭔가를 오래 하다가 시대에 뒤처져 결국 도태되었다는 한탄만이 맴돈다. 이제 한 우물만 파는 시대는 끝났다며, 조금 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다른 것에 도전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제 더 이상 졸업식에서 개근상은 시상조차 하지 않는다. 개근 거지 또는 미련 곰탱이로 대변되는 근면 성실은 어느 순간 시대에 뒤떨어진 우스꽝스러운 가치로 전락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