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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꼭그래 Apr 29. 2018

사찰 설화

화엄사 각황전 설화

화엄사 각황전

전남 구례군의 화엄사 창건설화에 따르면, 인도에서 온 연기존자가 화엄경을 설법한 곳이라 해서 화엄사라 하였다 전해진다. 화엄사가 자리한 곳은 백두산과 섬진강, 산과 강이 구례에 흘러 두류산이라 하였으나 연기존자에 의해 대지문수사리보살에서 따온 지리산智利山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한다. 화엄사에는 아주 특별한 불전이 있는데 국보 67호 각황전이다. 웅대하면서도 화려한 각황전은 천왕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연기존자가 인도에서 와 화엄경을 처음 설법했다는 연기암

신라 문무왕 17년(677년) 의상조사가 장육금신(부처의 몸)을 모시는 곳이라 해서 장육전이라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조선 숙종대 계파 대사에 의해 새로 지어졌다. 임금을 깨닫게 해 준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각황전이라 이름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전란이 끝나고 100여 년이 흐른 숙종 대 (1699년~1702년 ) 계파 선사에 의해 각황전이 지어지게 된 이유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각황전 설화


벽암의 뒤를 이어 주지가 된 계파에게는 한 가지 스승에게 약조를 하였으니 장육전을 다시 중건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라 선뜻 실행할 수 없었다. 하루는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길 "항아리에 밀가루를 담아 물에 적신 손을 넣어 밀가루가 묻지 않는 승려와 장육전의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계파는 경내의 스님들을 모두 모아 손을 적시게 한 후 밀가루가 담긴 항아리에 손을 넣게 했다.


모두들 의아했지만 주지 계파가 시키는 일이라 아무 말 없이 따랐다. 그런데 한 스님의 손은 밀가루가 묻지 않았던 것이다. 계파는 다른 승려들을 물러가게 하고 장육전의 공양주로 선택된 스님을 불러 장육전 불사를 중창할 화주化主(염불이나 설법을 해 절에 댈 양식이나 물건을 구하는 것)를 떠나라 말하는 것이었다. 공양주 스님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 깊은 시름에 잠겨 대웅전에서 기도하는데 비몽사몽 간 꿈에 한 노인(문수보살)이 나타나 아침에 화주를 떠나면 제일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할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공양주 스님은 다음 날  화주를 떠났다.


한참을 가다 한 노파가 길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노파는 시주는커녕 움막에서 혼자 살며 간혹 절에 먹을 것을 구하러 올 만큼 가난했다. 하지만 공양주 스님은 꿈에 나타난 노인의 말을 믿고 그에게 절을 하며 시주할 것을 권했다. 노파는 화엄사를 바라보며 공양주 스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이 몸 밖에 없습니다. 이 몸을 시주하오니 다음 생에서 꼭 불사를 완성 하는데 도움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끝내자 노인은 늪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공양주 스님이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벌어진 상황이었지만, 말리지 못한 자책감에 화엄사에서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다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된다. 공주의 손이 펴지지 않는데 이를 펴는 자에게 막대한 돈을 하사한다는 말이었다. 공양주 스님은 공주의 손을 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한다.


한양에 도착하고 왕궁을 서성이는데 한 소녀가 손을 쥔 채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었다. 그러다 공양주 스님에게 달려와 스님의 옷자락을 잡기 위해 손을 펴는 것이었다. 펴진 손에서 한 편지가 있었다. 공주의 손이 펴졌으며 그 손안에 편지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왕은 편지와 공양주 스님을 궁에 불러들이게 한다.


편지의 내용은 그 노파가 죽어 장육전을 짓는데 도움이 되고자 공주로 환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숙종 왕은 장육전을 지을 돈을 하사했으며 장육전이 완성되자 사액을 내려 각황전이라는 이름 지었다 전해진다.


해석


화엄사 초입의 돌 항아리

화엄사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돌 항아리가 있다. 벽암 각성(1575 - 1660년)이 중건했다는 법주사에도 이와 같은 항아리가 땅에 묻혀 있는데, 항아리의 용도에 관해 수 많은 추측이 있다. 신도들이 시주를 하던 곳이라는 것 부터 승려들이 먹었던 김치를 묻었다는 주장도 있다. 화엄사 돌 항아리는 벽암이 화엄사를 중건하기 이전인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을 벽암이 화엄사와 법주사를 중건하며 가져다 묻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돌 항아리를 벽암 각성이 묻은 이유는 무엇인가.  


항아리의 용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곡식이나 음식물을 저장했던 것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일반적이라면 각 사찰에는 꼭 하나씩 있어야 하지만 화엄사와 법주사에만 있다는 것은 돌 항아리의 쓰임 보다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고 그것이 설화에 담겨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설화를 통해서 항아리에 관해 해석하자면, 시작은 승려들에게 밀가루를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게 했다는 것에서 곡물을 저장했을 수도 있다. 또한 노파가 절에 찾아가 양식을 얻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시주를 위한 용도였거나 흉년에 절에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기 위해 이용했을 수 있다. 이 항아리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용도는 바꾸었을 것이다.


장자 소요유편을 보면, 북쪽 바다 명에는 크기가 몇 천리가 되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한다. 또 이 곤은 변하여 새가 되는데 붕이라 한다. 이 붕은 태풍이 불어와야 날 수 있으며 날개는 하늘을 덮은 구름과 같다고 한다. 바닷물과 그 바닷물을 담을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가 존재해야 몇 천리 크기의 곤이라는 물고기가 존재할 수 있다. 몇 천리가 되는 날개를 가진 붕을 품으려면 하늘은 텅 비어야 한다. 그런데 이 빈 공간은 물고기인 곤을 새인 붕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담긴 어떤 것 자체가 스스로 변할 뿐이다.


설화에서의 항아리는 장자의 바닷물을 담을 수 있는 비움의 공空을 의미한다. 항아리 안에 밀가루라는 것을 채우고 승려들의 손에 밀가루가 묻거나 묻지 않게 된다는 것은 항아리가 관여 하는 것이 아니라 항아리에 밀가루를 담은 계파와 승려들의 손이 서로 일으킨 일일 뿐 항아리는 승려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밀가루가 묻지 않아 공양주 스님으로 선택된 스님의 손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계파의 스승인 벽암 각성을 통해서다.


벽암 각성은 선조 8년(1575년)에 출생해 10살 무렵 설묵에게 출가해 14세에 보정에게 구족계(정식 승려)를 받고 선승인 선수(善修)의 제자가 된다. 선승이기에 선 사상은 당연하고 교종의 핵심 사상인 화엄사상에도 해박했으며 교종 사상을 반영한 화엄사를 중건한다.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은 손을 가진 공양주 스님의 의미는 교종과 관련 없는 선승 벽암 각성이 교종의 사찰인 화엄종을 중건했다는 의미와 함께 제자인 계파가 스승의 뜻을 따른다는 의미다.


환생한 공주의 손이 펴져 장육전이 숙종의 지원에 의해 중건된다는 이야기는 벽암 사후 숙종대에 장육전이 벽암의 제자 계파가 스승의 명성에 의해 완공되었다는 의미다. 공주의 손이 펴졌다는 것은 화엄사의 대웅전과 각황전에 모셔진 불상 때문이다.


화엄사 대웅전의 비로자나불


화엄사 대웅전에는 미혹함과 깨달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의 지권인 수인(손 모양)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화엄사 각황전의 여래불

화엄사 각황전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가운데 마귀들을 물리치고 모든 번뇌를 떨쳐내어 깨달음을 얻은 순간의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공주가 손을 펴 공양주 스님을 붙잡는 것은 비로자나불이 손을 펴 지권인의 석가모니불이 되었다는 의미다. 공주가 손을 쥐고 있건 펴건 둘로 나눌 수 없듯이 진여실상(眞如實相)인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의미다.


숙종이 장육전을 지을 돈과 완공된 후에 각황전이라는 사액을 내렸다는 것에는 벽암이 화엄사를 중건해야만 했던 이유가 담겨있다.


세종 6년 예조에서 계하기를, 


"전라도의 순천 송광사(松廣寺)는 일찍이 공정 대왕(恭靖大王)이 중창(重創) 한 것으로 수륙사(水陸社) 요, 〈개성〉 유후사의 흥교사(興敎寺)는 후릉(厚陵)의 재궁이나, 모두 종(宗)에 속하지 아니하여 미편하니, 선종(禪宗)에 속한 전라도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와 황해도의 은율(殷栗) 정곡사(亭谷寺)를 혁파하고, 송광·흥교 두 절을 선종에 부속시키소서."


세종 6년 예조에서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화엄사를 선종에 속하게 한 다음 혁파하라는 예조의 상소문이다. 혁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선종의 사찰들이니 선종에 포함시킬 것을 권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승 벽암과 계파에 의해 교종의 사찰이 된다. 선종의 법맥이 끊어질 상황에 처한 것을 교종 사찰을 지으므로서 혁파의 대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돌 항아리를 벽암이 사찰 앞에 가져다 놓은 이유는, 조선이 선승들에게 교종 사상을 따르게 한다 한들 이미 선종의 사상은 교종을 품고 있는 자신감을 말하고 있다. 곤이 붕이 되는 것 처럼 선승이 교종의 사찰 안에 있다 한들 달라질 것이 없다는 자신감이다. 그래서 후대의 선승들에게 이 깨달음과 자신감을 갖게 할 목적으로 돌 항아리의 쓰임을 정하지 않고 기록으로도 전해지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제바달다(석가모니의 사촌 동생, 석가모니를 시기해 아사세왕과 함께 죽이려 했다)가 지옥에 있을 때 세존이 아난을 시켜 물었다.

"지옥에서 견딜만 한가?"

그러자 제바달다가 말했다.

"지옥에 있지만 마치 삼선천(색계의 사선천 가운데 있는 하늘)에 있는 것처럼 즐겁다"

아난을 시켜 다시 물었다.

"지옥에서 나오길 원하는가?"

제바달다 답했다.

"석가모니 당신이 지옥에 들어오면 내가 나갈 것이다"

아난이 말했다.

"세존은 삼계의 큰 스승이신데 무엇 때문에 지옥에 들어 가겠는가?"

제바달다가 말했다.

"석가모니가 지옥에 들어올 까닭이 없다면, 내가 어찌 지옥에서 나갈 까닭이 있겠는가?"


대혜가 말했다.

"이미 나갈 까딹이 없고, 또 들어올 까닭도 없다면, 무엇을 일러 석가라 하고 무엇을 일러 제바달다라 하고, 무엇을 일러 지옥이라 하는가?스스로 항아리를 가지고 시골 술을 사러 가서는 도리어 적삼을 입고 주인 노릇을 하는구나" 대혜 종고 어록.


하나의 의미가 나옴이 없어지면 제바달다가 되고 석가모니가 된다. 그런데 이 둘의 의미가 서로 들어가고 나오면 의미는 정해지지 않는다. 항아리 또한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쌀을 담으면 쌀 항아리, 물을 담으면 물 항아리, 술을 담으면 술 항아리가 된다. 그런데 항아리를 가지고 술을 사러 갔는데 항아리에 술을 채워야 술 항아리가 된다. 그런데 술을 채우지 않는 동안에는 그저 다양한 쓰임의 항아리다. 그런데 이미 항아리를 술 항아리라 부는 것은 이 항아리의 용도를 정한 물체의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항아리가 주인의 정해짐에 의해 담아내는 것도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조선왕조가 교종 사찰로 불교 전체를 담아내려 한 것에 벽암은 이렇게 답한 것이다. 왕조의 압력에 의해 교종 사찰 화엄사라는 항아리를 만들었고, 주인이 그 용도를 정했지만, 실제 주인은 항아리에 채워진 것이 주인이 되듯이 안에 선 사상을 담으면 선종사찰이라는 후대 선승들에게 전하는 벽암의 가르침이 항아리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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