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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꼭그래 Oct 07. 2018

영화 남한산성

시각과 색채언어로 옛 심정을 말하다

Artlecture 기고용


남한산성


역사를 배우는 이유와 같이, 문학과 영화에서 과거를 재현하는 이유도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역사를 통해서 현재를 이해하려는 이유는 과거와 현재에 머물러 있으려는 것이아니라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첫 작업은 새롭지 않은 과거를 검토하는것에서 출발한다. 과거를 검토하는 방식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시간의리듬감으로 말해지는 것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정확히 옳은 말이 아니더라도 역사를 시간의 리듬감으로말하는 이유는 이해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용이한 이해는 다른 누군가에게 납득시키기 쉬우며 보다 더 넓은대중적 파급력을 갖는다. 시간의 리듬감으로 말해진 역사의 이해는 결국 새로운 미래를 설정하기 위한 대중적인힘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해된 과거와 현재를 토대로 미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에서도 그렇겠지만문학이나 영화에서도 잘 쓰이는 방식이다. 그런데 역사와 달리 문학과 영화는 과거의 심정心情까지가져오는 작업이다. 


역사를 다루는 영화에서 사료에 의해 고증 가능한 사건을 가져와 재현하는 일은,시간과 돈이 들겠지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과거의 심정心情까지 현재로 끌어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현한 박물관이나 민속촌처럼고증만 한 것은 관객의 역사관이나 지식에 바탕을 둔 상상적 심정에 기댈 수밖에 없다. 보다 더 적극적인영화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심정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관객에게 역사 지식을 검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과 색채 언어로 느낌을 얻도록 하게 한다. 영화 “남한산성”이 그렇다. 


영화의 시선과 색


남한산성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자연과 인간을 산수화의 색채와 시선으로 촬영됐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점 때문에 관객은 과거로 빨려 들어간 듯한 착각을 하겠지만 영화는 과거를 현재로 끌어 왔다. 남한산성은 평면적이면서 이원적인 수묵화의 명도 대비로 자연을 표현하고 민화의 채도 대비로 삶의 생동감을 표현했다. 


자연은 수묵화처럼 담담하게 그려졌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레버넌트The Revenant가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움과두려움이 뒤섞인 자연을 표현하는 데에는 채색화보다는 명도 대비인 수묵화적인 표현이 더 적합하다. 짙게갈아낸 먹으로 강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하얀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그려지는 수묵화처럼. 


과거의 삶을 끌어 온 방식은 채도 대비를 통해서다. 마이파더, 도가니, 수상한 그녀 등의 영화에서 인간 내면을 배우의 몸으로 시각화하는작업을 해온 황동혁 감독과 스탭들은 다시 한 번 색채를 통해 옛 사람의 삶을 입체적으로 표현됐다. 또하나 주목할 점은 시선의 높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시선의높이와 수묵화, 그리고 전통 색채어를 통해서 옛 심정을 끌어 오려 했다.


시선, 그리고 높이



이념의 시선

사현파진 백만대병도, 국립중앙박물관


전진前秦(314 -394년)의 부견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9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東晉(317 - 420년)에 쳐들어 갔으나 비수에서 8만여의 군사였던 사현에게 대패한 전쟁, 사현파진 백만대병도를 그려오게 한 것은 숙종(41년, 1715년)이었다.

전진의 군사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동진의 부견을 쫓아가고 있다. 용포를 두른 부견은 병사들을 뒤로한 채 놀라움에 입이 벌어져 저 멀리 눈 덮인 산으로 황급히 달아나고 있다. 설산은 중국 북방의 부견의 영토를 의미한다. 비수대전은 한족이 북방민족의 침공을 물리친 전쟁이었다. 숙종은 그날을 눈에 담고 싶었다. 왼쪽 상단에 숙종은 사현파진도에 시 한 편을 이렇게 적어 넣었다.

晉時安石有高名 : 진(晉=東晋) 나라의 사안(謝安, 동진의 재상이자 사현의 숙부)은 높은 명성이 있어
 坐却符堅百萬兵: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백만 병사를 앉아서 물리쳤다.
 靑岡一潰旌旗倒: 청강(靑岡)에서 부견의 전진 군대가 궤멸되자 깃발이 거꾸러지고
 鶴喉風聲走者鶯: 학이 외치는 소리와 바람소리만 들어도 적들은 놀라서 달아난다.

절파법으로 그려진 산천으로 전쟁의 긴박감을 나타냈으며 소나무는 산수화처럼 기의적이며 기표적인 표현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내부가 밝아지는 기법으로 시각적 사실감을 주었고 병사들은 강물처럼 웅대하게 흐르듯 그려졌다.

권력과 문명의 정점이었던 왕의 시선은 세상과 역사를 아래로 펼쳐봐야 했다. 목숨을 앗아가는 참수와 같은 형벌로 인식되었던 것이 북방의 오랑캐 땅으로 버려지는 일이었다. 반문명이라 할 수 있는 오랑캐를 몰아내는 것은 조선이라는 문명을 지키는 일이었다. 숙종은 사현파진도를 통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바닥으로 떨어진 왕의 권위와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의 과제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인조(박해일)의 시선은 변한다. 높다가도 낮아지며 낮다가도 같아진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장면은 청태종을 우러러보는 장면이다.


이념의 색

인왕제색도, 겸재 정선


朝雨夕晴조우석청, 아침에 비가 오더니 저녁에는 맑게 개었다. 1751년 5월 25일(영조 27년)의 날씨를승정원일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76세의 노화가는 동문이자 선배인 사천 이병연이 위독하다는 소식을듣고 다급히 그의 집을 찾았다. 좀처럼 그칠 줄 모르던 비는 이병연의 집에 당도할 무렵 그치기 시작했다. 겸재의 걸음을 더디게 했던 것이 미안했던지 운무는 슬그머니 인왕산을 빠져나간다. 이병연의 병세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이병연의 쾌유를 기원하며 겸재는한 폭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왕제색도는 그날, 그렇게, 그 마음으로 그려졌다. 그림에서 오른쪽 하단에 크게 보이는 큰 지붕의집은 스승 김창흡의 집이며 그림 중앙에 작게 그려진 곳이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린 이병연의 집이다. 행여죽어 하늘로 떠나지 못하게 이병연을 인왕산에 매어 놓고 싶었던지 하늘을 산 정상에서 잘라낸다. 하늘로떠나려는 이병연을 붙잡기라도 하듯 붓은 산 정상에서 힘차게 내렸다. 하지만 정선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그날 이병연은 81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인왕제색도는 실경實景에 마음을 더해 그렸다. 겸재뿐만이 아니라 동시대미술가들의 관심은 중국화풍을 벗어난 한국적 화풍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산수화기 한 번도 보지못한 중국의 풍경을 중국 화첩을 보고 따라 그리거나 상상해서 중국 회화 기법으로 그려졌었다면, 정선을비롯한 동시대 화가들은 조선만의 화풍을 일으키고 싶었다. 정선이 다른 화가들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가진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실경을 시도했으며 정선의 기법(묵찰법, 겸재정선이 인왕산의 바위를 그릴 때 사용한 기법. 붓을 뉘어 쓸어 내리는 방식)으로 자연을 그린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 한국 진경산수화로의 전환기에 대표적인 그림으로 인식되고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사군자와 산수화만을 그릴 수 있었다. 아무리뛰어난 그림 실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숨겨야 했다. 사군자화와 같이 이념의 시선으로 자신의 내면을형상화하거나 유교사상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것만 허용됐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변화가 감지된다. 중국과 유교 중심주의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 대안이 되었던것이 민화다. 조선 후기에는 이념적인 그림보다는 실용적이면서 장식적인 민화를 선호했다. 하층민들이나 보는 그림이라며 멸시하던 하위 시각문화였던 민화가 조선 후기에는 상류층에게도 사랑 받게된다. 


삶의 색

화조도 8첩 병풍. 조선 민화 박물관


궁내宮內에 선 하나 긋는 것부터 건물의 소소한 칠까지 도맡아 하던 사람들이 도화서의 화원들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1417 - 1470년경 왕의 직제 기구였던 도화서가예조 산하의 도화원으로 강등되었다. 화원이 된다는 것은 출세와는 반대였다. 양반, 중인, 상민, 천인 중에서 궁중화원은 태생이 천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에 가까운 천시를 받았다. 화원이 된다는 것은 부와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얻은 것은그날그날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였다. 그림에 재능 있다 하더라도 양반들은 자신의 실력을 감춰야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 좋아한 양반이 화원이 되려면 신분을 포기해야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시각문화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숙종은 화원의 지원책을 궁리하였고 영조와 정조시대에 이르러서는 화원의 수요가 늘어나 녹봉을 받는 화원의 수가늘어났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것과 같다.조선 후기에는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화원의 그림이 높이 평가되기 시작했으며 화원의 신분도 양반과 중인 사이로 상승했다. 이런 흐름에서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 등이 도화서 화원으로 들어가현감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화원들의 그림은 서민계층뿐만이 아니라 양반층에서도 수요가늘어나게 됐다. 


조선 후기 시각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상인과 중인계층이었다. 상업을통해 부를 축적한 중인과 상인들은 그들의 현실적 욕구인 부귀와 무병장수를 충족할 그림을 필요로 했다. 서양인들이천국의 문을 열기 위해 예술을 이용했다면 조선인들은 현세적 구원과 삶의 균형을 위해 예술이 필요했다. 그렇기때문에 조선시대의 채색화는 주술적이며 음양오행적인 구도와 색을 사용하게 된다. 


작자 미상. 대부분의 민화들은 누가 그렸는지 모른다. 안료(광물)와 염료(동식물)로 색을 만들 줄 알고 다룰 줄 알았던 화원들이 그렸다는 정도만을추측할 뿐이다. 그림의 품질과 완성도는 가격이 결정했다. 궁의화원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그림에 남기지 않았으나 신분이 높은 대신들이나 양반들에게 그려주는 그림에는 간혹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궁에 소속된 화원이 되지 않더라도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거나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면서 자신이 원하는그림만을 그리려는 화가가 등장하기도 했다. 단원 김홍도와 같은 뛰어난 실력의 화가들은 소문을 통해 왕의초상화를 그리는 어진화사가 되기도 했다. 


색이 변하지 않는 광물로 만들어진 안료는 중국과 일본에 의존했기 때문에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조선 후기에 포항과 울산에서 안료 광물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 양은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조선 시대의 그림에는 동물과 식물에서 얻어낸 염료가 그림에 주로 사용됐다. 민화 채색에서 주술적 의미를 가져 중요한 색이었던 붉은색과 푸른색은 소량의 광물로 칠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염료를 사용하게 된 이유다. 색은 값비싼 것이었다. 


민화에서 음양오행적이자 주술적이며 눈을 가장 많이 자극하는 붉은색과 푸른색을 영화에서도 사용했다. 김상헌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공의 피는 붉은 색이 민중 삶의 색으로 영화에서 사용될 것임을 알린다. 조선시대에 붉은색은 왕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예외적인 경우에 사용되었는데, 군복과 무당의 무의巫衣, 여성들의저고리와 치마 중 어느 한 곳 그리고 그림에서 허용되었다. 영화에서 붉은색은 대장장이 날쇠(고수)의 쇳물로 표현되기도 하며 성벽 위에 지핀 모닥불이기도 하고고기의 살점과 피의 색으로 사용됐다. 


녹색을 포함한 푸른색 계열도 주로 양반층이나 대신들의 의복에 사용되던 색이었다.왕의 붉은색 의복과 신하들의 푸른색 계열(녹색도 포함)의의복은 음양오행의 균형을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됐다. 영화에서 푸른색이 사용되는 곳은 주화파인 최명길(이병헌)의 색이기도 하며 언뜻 보이는 조선의 하늘색이기도 하다. 


영화의 결말, 그리고 우리의 현재

NASA의 한반도 사진, 출처 구글


영화는 시선을 높임으로서 몸이 낮아진 인조의 항복의식과 백성의 삶을 가슴에 품지 못한 척화파 김상헌의 자결로끝난다. 시선의 높이와 색채로 과거의 심정을 끌어 온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관객마다 영화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달라서, 누군가는 한 편의 재미있는사극으로 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현재의 재현으로 보여 사정이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자괴감에깊은 탄식을 쏟아냈을 수도 있다. 

나사(NASA)가 촬영한 한반도의 사진이다. 누군가는 한반도의 반절인 북한의 낙후된 모습이 보인다 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한반도가 대륙에서 떨어져 나간섬이 됐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영화 남한산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반도의 고립이다. 김훈은 남한산성을 이렇게 말한다. 


성의 지세가 물을 두르고 산에 기댄 장풍국이라고는 하나, 규국이 작아서품이 좁고, 안팎으로 통하는 길이 멀고 외가닥이어서 한번 막히면 갇혀서 뚫고 나가기가 어려우며, 아군이 성문을 닫아걸고 성첩을 지키면 멀리서 깊이 들어와 피곤한 적병이 강가의 너른 들에서 진을 치고 앉아힘을 회복할 수 있고, 성 밑이 가팔라서 안에서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가 없으며, 좌우가 막히고 가운데가 열려 적이 열린 곳을 막으면 목이 눌리고, 목이눌리면 안팎이 통하지 못하여 원군을 불러서 부릴 수가 없으며, 또 성이 산에 기대어 있다 하나 성 밖산봉우리에서 손샅처럼 굽어 보여 내리쏘는 적의 화포를 피할 길이 없고, 성 안 농토의 소출이 백성들의일용에도 못 미쳐서 적이 성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말려 죽일 수 있고, 도성과 민촌이 가까워서 멀리서온 적들이 약탈과 노획으로 군수를 충당하며 머물 수 있으니 병서에 이른 대로, 막히면 뚫기가 어려워서멀리 도모할 수 없고,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 없으므로 움직이면 해롭고, 시간과 더불어 말라가니 버틸수록 약해져서 움직이지 않아도 해롭고, 버티고견디려면 트인 곳을 막아야 하는데 트인 곳을 막으면 안이 또한 막혀서, 적을 막으면 내가 나에게 막히게되니 막으면 갇히고, 갇혀서 마르며, 말라서 시들고, 적이 강을 차지하니 물이 적의 쪽으로 흐르고, 안이 먼저 마르니시간이 적의 편으로 흐르는 땅이 바로 여기라고 말하는 지관들도 있었는데. 

김훈의 남한산성 중에서 


역사는 반복된다기보다,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판단과 두려움에서 출발한비겁함, 갈린 이념과 탐욕으로 만들어진 무기력함으로, 오래전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다시 맞닥뜨리는 일이다. 여전히 지속될 것만 같은 우리의 미숙함과 부족함을다시 떠올리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마음은 종종 그것들을 회피하게 하거나 무시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언젠가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때로는 마음을 이성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깎아 내리기도 하지만, 마음은세상을 보게 하고 담아내는 곳이기도 하다. 불가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승려 둘이서 깃발에 관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 승려는 깃발이흔들렸다 하고 다른 승려는 바람이 움직였다고 말한다. 그러자 지나가던 다른 승려는 그들의 마음이 흔들리고움직인 것을 보려 했다고 말한다. 영화 남한산성이 과거의 심정을 가져오려 한 이유는 명확하다.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그리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반복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문제를 정확히 직시해야 한다는 것, 심정의 크기만큼의 용기와 울림만큼 단합된 힘을갖게 하려는 의도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누군가 말했듯이 국가 최후의 보루도 시민의 힘에 나온다. 영화남한산성은 시민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옛 시각기법과 색채로서 옛 심정에 감각적으로 다가가게 하려 한 이유다. 


PS – 근자에 어떤 사람들은 “심정은이해하지만 그런 행동은 옳지 않다”라고 말한다. 틀렸다. 그가 이해한 것은 자신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이해관계이지 누군가의 심정을 알아낸 것은 아니다. 심정은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본 과거는 다를 수도 있다. 


참고용 원글, 감상글



작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최희도, 황동혁이라는 두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마이파더, 도가니, 수상한 그녀 등의 영화에서 황동혁 감독은 인간 내면을 배우의 몸으로 입체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밀정, 저 사람의 연출을 했던 최희도 감독은 상황이 인간 내면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관해서 다뤄왔다. 다른 스타일의 감독의 만남은 남한산성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기대감이 높았다.


어떻게 소설을 영화화했을까. 첫 장면부터 그들의 의도는 드러났다. 최명길(이병헌)의 등장 장면부터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것은 소설의 회화성을 영화로 옮겼다는 점이었다.  소설 남한산성은 빽빽하게 수묵화로 채워져 있다. 소설 남한산성은 짙게 갈아낸 먹으로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흰 지면을 미끄러져 가는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이념으로 갈아낸 먹물로 세상을 채색했던 유학자들의 생각처럼 영화도 검프르다. 영화 전체적인 배경은 그렇다. 그림의 완성은 등장인물들이다. 등장인물의 신분, 이념에 따라 시선을 달리해 감상하게 했다. 소설 남한산성이 글의 이미지로 그려졌다면 영화 남한산성은 시각적이다.


역사라는 말에는 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하고  그 시선들의 기록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선이 늘 같을 수는 없다. 저마다의 시선으로 기록되고 전해진다. 우리는 한 사건에서 다양한 시선이 나타나는 것을 영화 남한산성에서 볼 수 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이념의 시선과 삶의 시선, 두 개의 시선선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념의 시선


사현파진 백만대병도, 국립중앙박물관


전진前秦(314 -394년)의 부견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9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東晉(317 - 420년)에 쳐들어 갔으나 비수에서 8만여의 군사였던 사현에게 대패한 전쟁, 사현파진 백만대병도를 그려오게 한 것은 숙종(41년, 1715년)이었다.


도망가는 부견

세상을 아래로 펼쳐보아야 하는, 하늘과 같은 시선을 가져야 하는 것이 왕이다. 왕뿐이겠는가. 조선의 유학자들도 산천을 아래로 내려 보았다. 내려 봄으로서 양반과 천민이 생겨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천민보다 못한 오랑캐가 되었다. 조선시대 가장 무거운 처벌로는 참수였지만 그와 같은 것이 북방의 오랑캐 땅으로 버려지는 일이었다. 오랑캐를 몰아내는 것은 조선이라는 문명이 반문명에 대항하는 국가적 과제였다.


도화원의 화원이 그려 온 사현 파진 백만대병도 안의 역사적 사건 역시 왕인 숙종의 시선으로 보여야 했다. 하늘과 같은 왕의 시선으로 산천은 모두 아래에 놓여있으며 붓을 찍어 힘차게 그린 절파법으로 전쟁의 긴박감을 나타냈다. 소나무는 문인화의 산수화처럼 기의적이며 기표적인 표현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내부가 밝아지는 그러데이션 기법으로 시각적 사실감을 주었고 병사들은 역사의 물결이 웅대하게 흐르듯 그려졌다. 


전진의 군사가 우右에서 좌左로 동진의 부견을 쫓아가고 있다. 용포를 두른 부견은 병사들을 뒤로 한채 놀라움에 입이 벌어져 저 멀리 설산雪山으로 황급히 달아나고 있다. 설산은 중국 북방의 부견의 영토를 의미한다. 비수대전은 한족이 북방민족의 침공을 물리친 전쟁이었다. 숙족은 그날을 눈에 담고 싶었던 것이다. 좌측 상단에 숙종은 사현파진도에 시 한 편을 이렇게 적어 넣었다.

晉時安石有高名 : 진(晉=東晋) 나라의 사안(謝安, 동진의 재상이자 사현의 삼촌)은 높은 명성이 있어
坐却符堅百萬兵  :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백만 병사를 앉아서 물리쳤다.
靑岡一潰旌旗倒  : 청강(靑岡)에서 부견의 전진 군대가 궤멸되자 깃발이 거꾸러지고
鶴喉風聲走者鶯  : 학이 외치는 소리와 바람소리만 들어도 적들은 놀라서 달아난다.


 하지만 숙종의 증조부 인조가 경험했던 것은 이와는 달랐다.


병자호란

다음 지도

인조 14년(1636년) 12월 13일, 청의 병사가 청천강을 건너 안주에 이르렀다는 도원수 김자점의 체계가 올라왔다. 인조는 신하들에게 어떻게 할지 물었다. 그러자 김류를 비롯한 대신들은 도원수에게 송경(개성)의 병사 천 육백을 지원케 하여 대비하게 하고 정묘 때와 마찬가지로 강화도로 피신할 것을 아뢰었다. 최명길이 말하길 비워진 한양 도성은 심기원에게 맡길 것을 고하였다. 12월 14일 최명길을 보내 사태를 살피게 하고 그들과의 강화 협상으로 진격을 늦추게 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

"경들은 저 너머 겨울 들판이 보이는가? 나는 보이지 않는구나." 소설에서의 인조의 마음을 영화는 최명길의 시각으로 대신하며 시작한다. 문인화의 산수화 같다. 이념의 시각으로는 오랑캐인 청의 대군은 희미하며 작다.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의  숭명배금 주의에 따르는 시각이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 글로 그려낸 정세적 시각을 영화 남한산성은 시각화했다.


너희 나라가 유신儒臣들을 길러서 그 뜻이 개결하고 몸이 청아하고 말이 준절하다 하나 너희가 벼루로 성을 쌓고 붓으로 창을 삼아 내 군마를 막으려 하느냐.


작가 김훈과 청의 황제 홍타이지가 본 조선의 현실이다. 지금처럼 이념으로 국가를 구성하고 유지하던 것이 아니라 무력에 의해서 국가를 유지했던 폭력의 시대라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유학자들을 소설에서는 지적한다. 현대 전쟁은 군사력의 대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념의 차이와 이익을 위한 것이다. 군사력이 강하다고 해서 약한 나라에 침공해 자기기 영토로 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군사력에 의해 국가의 영토가 팽창할 수 있었다. 유교라는 이념으로 국가를 구성하려 했지만 그 시작은 이성계의 무력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조선이 아니었던가.  


도화서


궁안 선 하나 긋는 것부터 작은 칠까지 도맡아 하던 사람들이 도화서의 화원들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1417 - 1470년경 왕의 직제 기구였던 도화서가 예조 산하의 도화원으로 강등되었다. "어떻게 해야 시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시인이 대답하기 전에 사람들마다 재능, 독서, 경험 등등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만, 시인은 "월 20만 원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이라고 대답했한다 한다. 예술인이 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화원이 된다는 것은 출세와는 반대였다. 양반, 중인, 상민, 천인 중에서 궁중화원은 천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에 가까운 천시를 받았다. 그들의 최고 직책은 종 6품까지 였으며 그것도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직책과 녹봉도 보장할 수 없었다. 세종대에 이르러 체아직(계절마다 평가받아 녹봉을 받는 직)이 이뤄졌다. 화원이 된다는 것은 그날 그날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림에 소질이 있던 양반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실력을 감추거나 신분을 포기하고 화원이 되기도 했다.


선비들이 그릴 수 있는 예외적인 그림이 매난국죽의 사군자와 산수화다. 사군자나 산수화는 사실화가 아니라 이념화였다. 이념화가 낯설게 느껴지질 수도 있지만 한국의 반공세대들에게는 익숙할 것이다. 잔혹하고 괴상한 북한 빨갱이를 그려내야 했던 것과 비슷하다. 도화서의 화원이 되기 위한 선발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나무, 산수, 인물과 영모翎毛(동물그림), 화초 중에서 가장 배점이 높은 그림은 대나무와 산수였다. 인물과 영모는 왕의 어진을 10년마다 그려야 했기에 화초보다 높이 쳐준 것에 불과하다. 조선은 시각에 의한 표현이 아니라 이념의 이미지를 그려야 했던 것이다.

인왕제색도, 겸재 정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시각 문화의 전환기를 갖는다. 유교 이념과 감각적 시각 세계가 그림에 담기게 되었다. 그것을 이끌었던 왕이 숙종이었다. 숙종은 궁 안에 머물던 자신의 시야를 넓히고 싶었다. 그래서 화원의 지원책을 강구하였고 영조와 정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녹봉을 받는 화원의 수가 늘어났다. 또한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화원의 그림이 높이 평가되기 시작했으며 양반과 중인 사이 정도로 신분적 상승도 이어졌다. 역사적 맥락에서 겸재 정선이 도화서 화원으로 들어가 종 6품인 현감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도 시각의 변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변화의 시작은 병자호란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지에 관한 숙종의 고뇌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그 이전을 말하고 있다.


남한산성, 최명길과 김상헌


남한산성,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성은 십 리 밖을 흐르는 강으로 격절되었고, 강의 여울이 사나워서 적의 대병이 건너오기 어려웠다. 성벽 밖은 산줄기가 가파르고 첩첩해서 적의 기병이 말을 몰아 다가올 수 없으며, 성 둘레는 가파르게 출렁거리며 길게 휘어져 갑자기 포위할  수가 없었다. 성벽이 급하게 휘어지는 굽이에서는 멀리 볼 수 있고 넓게 쓸 수 있어 적병이 성 뿌리에 붙을 수 없고, 성 밑이 가팔라서 밖에서는 치쏘고 안에서는 내리쏘니 성 뿌리에 붙는 적병이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또한 성 안에 작으나마 농토와 물줄기가 있어서 오래 버틸 수 있으니, 병서에 이른바, 편안히 진 치고 앉아서 멀리서 온 피곤한 적을 맞는 곳과 한 명이 지켜서 백 명을 물리친다는 지리의 노른자위가 바로 여기라고 지관과 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산과 물의 형세로 보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성의 지세가 물을 두르고 산에 기댄 장풍국이라고는 하나, 규국이 작아서 품이 좁고, 안팎으로 통하는 길이 멀고 외가닥이어서 한번 막히면 갇혀서 뚫고 나가기가 어려우며, 아군이 성문을 닫아걸고 성첩을 지키면 멀리서 깊이 들어와 피곤한 적병이 강가의 너른 들에서 진을 치고 앉아 힘을 회복할 수 있고, 성 밑이 가팔라서 안에서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가 없으며, 좌우가 막히고 가운데가 열려 적이 열린 곳을 막으면 목이 눌리고, 목이 눌리면 안팎이 통하지 못하여 원군을 불러서 부릴 수가 없으며, 또 성이 산에 기대어 있다 하나 성 밖 산봉우리에서 손샅처럼 굽어보여 내리쏘는 적의 화포를 피할 길이 없고, 성 안 농토의 소출이 백성들의 일용에도 못 미쳐서 적이 성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말려 죽일 수 있고, 도성과 민촌이 가까워서 멀리서 온 적들이 약탈과 노획으로 군수를 충당하며 머물 수 있으니 병서에 이른 대로, 막히면 뚫기가 어려워서 멀리 도모할 수 없고,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 없으므로 움직이면 해롭고, 시간과 더불어 말라가니 버틸수록 약해져서 움직이지 않아도 해롭고, 버티고 견디려면 트인 곳을 막아야 하는데 트인 곳을 막으면 안이 또한 막혀서, 적을 막으면 내가 나에게 막히게 되니 막으면 갇히고, 갇혀서 마르며, 말라서 시들고, 적이 강을 차지하니 물이 적의 쪽으로 흐르고, 안이 먼저 마르니 시간이 적의 편으로 흐르는 땅이 바로 여기라고 말하는 지관들도 있었는데.

수성전의 최선과 최악의 요새로서의 두 가지 견해를 소설 남한산성에 제시하고 있다. 막느냐 갇히느냐의 서로 다른 두 시선이 엇갈린 곳에서 청과의 강화를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과 청과의 결전으로 명과의 의리를 저버리지 말자는 척화파 김상헌의 대립과도 묘하게 닮은 곳이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이다. 최명길은 나가려는 하고 김상헌은 닫으려 한다. 나가면 이념으로 세운 국가의 위신이 떨어지고 백성은 흩어진다. 백성이 흩어진 나라는 존재할 가치가 없어진다. 닫고 싸우면 국가의 상징인 왕이 죽임을 당한다. 당시 조선이 처한 현실이 집약된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삶의 시선

* 좌측부터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자진뱅이탑, 돌탑, 강원도 정선의 서낭당


우리 옛 마을의 모습은 농경지인 논과 마을 초입에는 돌탑이 있었고, 돌탑에서 시작해서 마을로 가는 길가에는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 주거지가 시작되는 곳에 서낭당이 세워져 있었다. 마을은 노동과 전통 삶에 대한 신앙 공동체였다. 돌탑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금줄을 치듯이 병이 걸린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금줄을 치기도 했다. 농기구를 돌탑 안에 넣고는 가축의 질병을 막고 농사를 잘 되게 해달라 했다. 돌탑을 지나면 장승들이 악신과 질병신들에게서 마을을 보호해 달라고 했다. 서낭당에서는 출산과 풍요를 기원했다. 옛 마을의 모습은 자연의 것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시선이 담겨있다. 


사공


남한산성에서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립적 구도가 강렬해서 다른 시선일 것 같지만 다르지 않다. 두 사람 모두 이념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삶의 시선의 본 이념의 처음은 사공의 어린 손녀의 시선을 통해서다. 삶이 이념에 의해 파괴되는지 강렬하게 보여준다.


어린 손녀 나루(소설에서는 딸)의 눈에 비친 이념의 모습은 폭력(환도)과 함께한다. 어가를 건너게 했지만 좁쌀 한 줌 얻지 못한 사공은 청병을 건네주고 식량을 얻을 요량이었으나 붓으로 한 획을 긋듯 칼을 휘둘른 김상헌의 손에 죽는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결합해 조선을 건국했듯이 이념과 폭력은 결합하기 쉽다.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의 전쟁사를 통해서도 이념은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 했던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친조부를 죽인 김상헌을 위해 왕이 내린 떡국을 나루라는 아이가 대신 먹어주는 장면에서는 이념이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보여준다.


날쇠


서날쇠는 눈썰미가 매서운 대장장이였다. 쇠를 녹이고 두드려서 농장기와 병장기를 만들었고, 목수들의 연장까지 만들었다. 왼손잡이 목수들이나 손가락 두 개가 잘려 나간 석수들을 위해 그 일그러진 손에 맞는 대패며 끌, 징, 송곳, 톱을 만들었다. 깎고 쪼고 뚫고 파고 훑고 후비고 깨고 베고 거두고 찧고 빻고 밀고 당기는 모든 연장장들이 서날쇠의 대장간에서 나왔다. 서날쇠의 연장을 구하러 온 사람의 몸매와 근력, 팔다리의 길이와 허리의 곧고 굽음을 잘 살펴서 남자와 여자, 아이와 노인, 키 작은 자와 큰 자의 연장을 달리 만들어 주었다.


농경사회에서 삶의 시작은 농기구를 통해서다. 대장장이 날쇠가 자신이 만든 농기구에 날생生을 넣어 날쇠라 이름 지은 것도 김훈의 의도였을 것이다. 삶이 어떻게 생존해 가는지 날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날쇠의 대장간을 설명하는 소설 대목을 보자면 장자의 대붕은 날쇠와 같다. 때와 크기, 용도에 맞게 변형한다. 양반들이라는 사람들이 이념의 작은 차이를 오가는 것과 대비된다. 영화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날쇠(고수)의 활약이 조금 더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종말, 일제강점기, 전쟁, 독재, 민주화 운동을 지나온 사람들. 이념과 체제가 달라져서 끊임없이 자기변형의 생명력으로 생존해 온 민중들을 김훈은 말하고 있다. 조선을 배반하고 청의 사람이 된 정명수 조차도 이 땅이 만들어낸 변형된 존재다.


외부의 시선



청의 삼전도 진지에 최명길이 찾아간다. 그곳의 광경은 이념의 무기로 삶을 파괴했던 김상헌과 청군들을 대비해 보게 한다. 북방민족에게 칼은 삶의 도구이기도 하다. 청의 권력은 삶에서 나온다. 이 장면을 통해서 이념이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유학자들이 죽음을 위해서라는 존재하는 자들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삶과 이념은 먼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이념이 생겨야 하는 것, 삶이 살아져야 이념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삶과 이념이 하나가 된 청군들에게 조선은 끝내 무릎을 꿇는다.


시선의 변화, 왕이 하늘을 보다

왕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칸(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왕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왕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칸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왕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 차례에 따라 소리 지름)하게 하였다.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왕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단(壇)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칸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음력 1월 30일(1637년)

배례를 하는 방식과 좌석 배치, 차를 올리는 방식은 조선왕을 위해서인지 중국의 주자가례를 따르고 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북방으로 끌려가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뒤로한 채 인조는 궁으로 돌아간다. 그해 겨울의 비극이었다.


숙종은 도화원 화원의 수를 늘리고 본격적인 붕당정치를 시행한다. 영조는 녹봉을 받는 화원을 늘였으며 정조는 수원화성을 축성한다. 백성들의 삶을 그린 김홍도의 그림은 왕에게 전해졌다. 그렇게 조선은 재건되었다.

김정호의 대장간, 정조 수원행차도, 수원 화성


우리의 시선


누군가는 한반도가 넓은 태평양을 향하고 있어 기회의 시대에 있다고들 한다. 누군가는 나사의 사진으로 북한의 낙후됨을 비웃기도 한다. 대륙에서 멀어지고 일본에 둘러 싸인 큰 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립되고 갇힌 남한산성이 떠오르기도 했다. 북한을 잇고 대륙으로 갈 것인지, 고립된 상태로 있을 것인지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2018년 한국인들에게 평화가 멀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삶 속에서 이념을 찾고 대립이 아닌 협력을 통해서 후대의 한반도인들에게 우리가 답할 차례라고 김훈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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