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이야기
검은색 이야기
영화에서 주연과 조연의 역할이 있듯이 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에서 오랫동안 주연이었던 것은 예쁜 유채색이었습니다. 우리의 눈이 유채색의 예쁨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기뻐하며 환호한다는 것을 화가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채색은 유채색을 더욱 돋보이게 해야 하는 조연의 역할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종교적인 그림에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무채색인 검은색은 유채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빛에 굴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악이 선의 의지에 굴복하는 모습입니다. 카라바조의 마태오의 소명이라는 그림이 대표적입니다. 마태오의 소명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소망의 빛이 어둠을 물리치고 창문 너머 마태오의 얼굴을 비추게 했습니다. 고흐는 아예 밤의 어둠을 그의 그림에서 추방시키기도 했습니다. 밤의 카페 테라스라를 그리고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검은색을 사용하지 않고 밤을 그려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니까요. 검은색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티스의 이카루스의 절망을, 피카소는 미치광이라는 검은색 청동 흉상에서 감추어진 인간의 이중 인격성과 게르니카에서는 전쟁의 비극과 절망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서양에서 검은색은 눈의 감각기관으로 해석되는 색이었고 그것을 해석하는 마음으로는 불길함, 어둠, 절망, 공포,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었다면 동양에서는 시각적인 해석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확인하는 정신적인 색에 가까웠습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먹을 이용해 문자와 그림을 그렸던 시각적인 시기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지만 수양과 관련되어 정신적인 색으로 사용하게 된 시기는 중국의 고대 철학이 장자에 의해 완성된 당나라 이후의 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이 장자의 이기 일원론을 벗어나 이기 이원론을 독자적으로 펼치고 싶은 욕심은 당연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자의 사상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검은색에 관해서 동서양의 관습적 생각의 차이점을 극단적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요즘에는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 검은색은 지금은 각광받고 있습니다. 집안을 둘러보면 많은 가전제품들이 검은색으로 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에서도 검은색은 우아함과 세련됨을 상징하는 색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의 전환에는 흑백 영상을 보여주었던 극장 영화와 텔레비전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검은색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크게 전환시켜 준 것은 옷입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화학 염색 방법으로 검은색 옷을 흔하게 입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이라는 영화에서 입고 나온 검은색 드레스가 대표적입니다. 주연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의 역할을 아주 잘 해냈습니다. 그녀가 영화에서 입었던 우아한 블랙 드레스는 2006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무려 일억 오천 만원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검은색은 훌륭한 조연의 역할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림자 인형극에서는 유채색과 무채색의 역할이 뒤바뀝니다. 검은색은 주연이 되고 유채색은 조연이 됩니다. 미셸 오슬로의 실루엣 애니메이션 “밤의 이야기”에서는 말이죠.
밤의 이야기
미셸 오슬로 감독의 “밤의 이야기”는 화려한 색채가 조연이 되어 그림자 주연들을 돋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정작 두 주인공의 모습은 미지의 영역에 감춘 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미지의 영역은 생각 속에서 발견해 내야 합니다. 그래서 본 사람 저마다 떠올리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다를 수도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달리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실루엣 애니메이션, 혹은 실루엣 인형극이 주는 또 다른 상상의 세계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됩니다.
이와 같은 효과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앙리 루소는 실루엣 애니메이션과 같은 효과를 가진 그림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뱀을 부리는 남자가 그렇습니다. 단 한 번도 프랑스를 떠나 본 적 없는 앙리 루소의 상상 속 정글의 모습은 실제로는 식물원이 모델이 되어 줬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을 보면서 식물원과 같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정글에 살고 있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앙리 루소는 그의 모습을 그리기보다는 상상의 영역에 그대로 놔뒀습니다. 그래서 뱀을 부리는 사람의 모습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나이가 많고 적음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단단한 다리에서 그래도 정글의 생명력을 공유한다는 정도만을 알 뿐입니다.
그림이나 영화가 모든 것을 관객에게 모두 보여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관객의 관습적 생각에 충실할 이유도 없습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정글의 모습과 다르다고 앙리 루소의 그림을 폄훼하지 않는 이유는 끊임없이 살펴보게 하고 생각할 여지를 남겨둔 미덕 때문일 것입니다. 앙리 루소가 어린 시절 유랑극단의 그림자 인형극을 봤을 것으로 생각되며 “밤의 이야기”를 제작한 미셸 오슬로도 앙리 루소의 그림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시각적인 세계에서의 도화지가 하얀색이라면 분명하지 않은 검은색은 아직 채색되지 않은 상상의 도화지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미셸 오슬로 감독의 밤의 이야기는 왕자와 공주에 이어 그의 두 번째 실크 스크린 실루엣 애니메이션 작품입니다. 실크 스크린의 장점이라면 선명한 색감에 있습니다. 또한 그림자 주인공들의 정해지지 않은 모습을 통해서 아이들이 상상 속에서 채색하게 되는 시각적이며 정신적인 색칠 공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상상의 세계는 지금도 자유로운 곳이기에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애니메이션 밤의 이야기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