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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각자도생_첫번째 : 비움과 채움의 경계에서

각자의 도시생활

by 선유

인터뷰를 위해 집에 들어서 노트북을 켰다. “혹시 와이파이 비밀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어요?”라는 요청에 당황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저희 집엔 와이파이가 없어요.” 의류 관리기, 세리프 TV, 하만카돈 스피커까지 눈에 띄는 가전제품이 즐비한데 와이파이가 없는 집이라니. 자신만의 원칙으로 집을 가꾸고, 삶을 지켜나가는 사람, 하늘을 만나 일과 일상에 관한 생각을 들어봤다.


하늘1.jpg ⓒ그라퍼

윤하늘

농식품 매체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후 맛집 블로그 운영, 농식품 유통·디자인·컨설팅 등 다양한 실무 경험으로 업계에 잔뼈 굵은 7년 차 농식품 산업 종사자. ʻ정직하게 돈 벌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일을 하자.ʼ는 신념으로 농식품 업계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


거주지 서교동

거주기간 1년차

구조 원룸

면적 33m2


사업하다 보면 바빠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별로 없지 않아요?

한창 바쁠 때는 그랬는데, 최근엔 일을 잠시 쉬고 있어서 집에서 요리도 하고 청소도 깔끔하게 하고 지내고 있어요. 밖에서 에너지를 뿜어내려면 집에서 오롯이 충전하는 시간이 필수랍니다.


집에서 충전할 때는 주로 뭘 하세요?

창을 연 뒤 좋아하는 향을 피워놓고 보사노바를 들으며 책을 읽거나, 어두운 조명에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위스키를 마시는 걸 즐겨요. 독한 술을 마시고 침대까지 세 걸음입니다. 그리고 바빠서 한동안 못 했던 요리를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있어요. 다시 집밥이 먹고 싶어지는 시점이기도 하고요. 제가 먹는 것에 진심이거든요.


요리를 잘하시나 봐요?

자취 초반에는 요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는데 하다 보니 늘었어요. 한번은 제가 만든 요리가 너무 맛이 없어서 엄마한테 ʻ이런 걸 음식이라고 하니ʼ라는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예요. 명색이 농식품 업계 종사자이고 맛집 블로그도 오랫동안 운영해온 미식가인데 손맛이 못 따라오니까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네이버 찾아보면서 독학했죠. 밥 한 끼를 먹더라도 잘 차려서 맛있게 먹고 싶거든요.


저 같은 경우엔 혼자 살면서 집밥을 차려 먹기 쉽지 않더라고요.

맞아요. 1인분을 만든다고 해도 재료 손질하고 조리하는 과정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설거지도 많이 나와서

번거롭죠. 그렇지만 음식을 완성해서 한 상 차려냈을 때 뿌듯함이 크고 대접받는 기분이 들어요. 술 마실 때나

배달 음식을 먹을 때조차도 제대로 차려서 먹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먹는 걸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하늘 씨가 바라는 부엌의 모습은 어떤 건가요?

자취 경력이 늘면서 점점 집 평수가 넓어지고 주방도 이전보다 커졌어요. 그렇지만 더 커졌으면 좋겠어요.

(거거익선!) 집에 친구들 불러서 커피 한 잔하고, 같이 맛있는 것을 나눠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거든요. 며칠 전엔 지인들 초대해서 갈비도 하고, 육전도 만들어 먹었어요. 지금 부엌도 작은 건 아니지만, 별도의 조리대와 싱크대가 있는 아일랜드 조리대를 꿈꿉니다.

하늘2.jpg ⓒ 그라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나 봐요?

혼자서 충전할 수 있는 면도 있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과 교류해야 채워지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새로운 자극이나 아이디어도 많이 얻습니다. 2년 전부터 탱고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음악과 구두만 있으면 언제든 사람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게 매력적이에요. 홍대에서 탱고 추고 용산 집까지 귀가가 힘들어서 아예 이사했을 정도로 탱고에 푹 빠져 지내요.


정말 탱고 때문에 서교동으로 이사까지 했다고요?

귀갓길 택시비로 월 30만 원을 쓴 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했죠(웃음). 홍대 지역에 춤을 배울 수 있는 곳들이 몰려 있어요. 강북의 댄스 메카랄까요!


홍대 근처라 동네 분위기가 꽤 시끌벅적할 것 같아요. 주변에 맛집들도 많고.

우리 동네는 ʻ홍대ʼ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조용한 편이에요. 아침에 문을 열면 앞집 정원의 나무도 보이고, 100m 반경에 작고 예쁜 가게들도 많아서 만족하며 살고 있어요. 집을 고를 때도 햇빛이 잘 들고 조용한지를 최우선으로 까다롭게 살폈어요. 집에서 혼자 쉴 때는 어떤 것에도 방해받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집엔 와이파이도 없고요. 원래 TV도 없었는데 근래 업무 때문에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들였어요.


안정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안 환경을 의식적으로 만든 거네요.

네, 저에게 집은 오롯이 쉴 수 있는 ʻ혼자 비우면서 채워 넣을 수 있는 공간ʼ입니다. 노자 «도덕경»에서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이 “그릇이 채워지려면 비워져야 한다.”예요. 삶에도 비어있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저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비워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바로 집이에요.

하늘3.jpg ⓒ 그라퍼

집에 독특하고 예쁜 물건들이 참 많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위스키 컬렉션과 가전이에요. 위스키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군인 친구 덕에 일찍이

위스키에 입문해서 사 모으고 있어요. 일 마치고 혼자 단골 바에 가서 위스키 한 잔 하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는데 요즘엔 집에서 대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 가전은 외모 보고 들여오기 때문에 일단 예뻐야 해요. 사실 전자레인지는 1분 이하 설정이 안 돼서 삼각김밥 데우려면 앞에서 30초를 세고 있어야 하는, 기능 면에서는 꽝이랍니다.

장비 욕심도 많아 일본부터 남대문까지 고루 뒤져가며 사 모은 컬렉션들이 자랑입니다. 제가 일본 출장을 갔을 때 제일 만족스러웠던 건 자개 젓가락을 건진 거예요. 이거 하나 사려고 백화점 세 군데를 돌았다니까요. 파스타 전용 냄비도 ʻ최최ʼ 애장품 중의 하나입니다. 미세한 차이일지라도 이런 데서 느껴지는 저만의 행복감이 있거든요.


가격이 절대 소소해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 씨에게 확실한 행복을 주는 것들이네요. 좋아하는 것에는 망설임 없이 투자하는 편인가 봐요?

선택과 집중을 하는 거죠. 저를 행복하게 하는 것, 제 취향인 것에 집중하지만 그 외의 것은 합리적 소비를 하려고 해요. 옷을 좋아라 해서 의류 관리기에 투자하고, 음악을 좋아라해서 하만카돈 스피커로 보사노바를 듣지만 동시에 집의 가구는 대부분 가성비 좋은 이케아 제품으로 채웁니다. 13년 동안 혼자 살아오면서 저에게 맞게끔 ʻ선택과 집중ʼ을 통해 집을 최적화해온 것 같아요.


«도덕경» 인용도 그렇고 집 한켠에 책들이 많아요. 좋아하는 책 한 권 소개해주세요.

최근에는 페르난두 페소아가 쓴 «불안의 책»과 플라톤의 «향연»을 읽고 있어요. 삶이 불안정해지다 보니 다시

철학으로 돌아오게 되네요.

가장 좋아하는 책은 방금 이야기한 노자의 «도덕경»이에요. 노자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위에 있을수록

아래에 있어라. 아래에 있어야 군림한다.” 그러니까 바다가 제일 위에 있을 수 있는 거는 모든 물이 거기로 흘러들어 맨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고요. 제가 일할 때 원칙으로 삼은 ʻ정직하게 돈 번다ʼ는 거는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고 내가 안분지족할 만큼만 벌면 된다는 건데, 그 생각과도 연결되거든요. 매년 초 한 번씩 읽으면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사는 태도를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꿈꾸는 집의 모습이 있나요?

앞으로 열심히 벌어 서교동에 단독주택 하나 짓고 싶습니다. 지하에는 바, 1층에는 카페를, 위층에는 사무실과 거주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홍대 지역은 미술학원에 다녔던 10대 때부터 제 생활권이었기에 많은 시간을 보내며 온갖 흑역사가 함께하는 애정이 큰 곳이라 가능하면 이 동네에서 계속 살고 싶어요.

하늘4.jpg ⓒ 그라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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